43화
오늘도 새로이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우연재는 핸드폰 화면을 끄며 월요일에 모르는 척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다. 문서윤에게 맞춰 2학년 전공까지 빽빽하게 채워 넣은 시간표는 후회스럽지 않았으나, 제 친구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을 버거워할지도 모르겠다.
숨 좀 쉬게 해 줘야 하는데.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인내심은 이럴 때 제법 큰 도움이 되고는 했다. 우연재는 갉작거리는 신경을 억누르듯 능숙하게 호흡을 골랐다.
“날씨 진짜 좋다. 이런 날은 걷는 게 좋더라. 운동화 신고 오길 잘한 것 같아.”
김선주가 다 마신 테이크아웃 잔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말했다. 얇은 카디건이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렸다.
“응, 날씨 좋네.”
“차는 어쩌다 고장 났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폐쇄된 공간 특유의 적막한 공기, 핸들과 손가락 사이에서 파생된 미약한 소음,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시선을 피하던 문서윤.
차를 끌고 갔는지 그대로 두고 갔는지 우연재는 알지 못했다. 기실 그리 신경 쓰이는 문제도 아니었다. 고작 차였다. 자동차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남자들이 많지만 제게는 소모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건 조수석에 멀거니 앉아 있었을 문서윤뿐이었다. 차 주인이 꼴도 보기 싫어져 그대로 두고 갔다 해도 어련히 택시를 타고 돌아갔겠거니 싶었지만, 어린애를 물가에 내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우연재는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군대까지 다녀온 성인 남자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인에 박인 이미지는 어지간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냥, 가벼운 접촉 사고.”
“뭐야. 수리 맡겼다길래 갑자기 고장 났나 했는데 접촉 사고였어? 어디 다친 거 아니지?”
멈춰 선 김선주가 팔을 잡으며 몸을 살폈다. 우연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안 다쳤어. 접촉 사고 별거 아닌 거 알잖아.”
문서윤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경미한 접촉 사고였다.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운이 나쁘면 살면서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당시에는 조금 놀랄지 몰라도 곧 까맣게 잊힐, 그런 단순한 사고에 불과했다.
“병원은 다녀왔어? 아무리 가벼워도 교통사고는 병원 가야 한다던데.”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고칠 수 있는 감정일 테다.
우연재는 그게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나 병원 안 좋아하는데.”
“병원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럼 안 갔다는 소리야?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진짜 가벼운 사고였어?”
“괜찮다니까.”
“당일에 약속 취소 통보해서 좀 짜증 났는데 이번만 봐줄게.”
김선주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아.”
습관적으로 귓불에 손을 가져다 대던 그녀는 무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귓바퀴에 꽂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봐.”
여자 친구의 요청에 우연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그마한 귓불에는 하얀 진주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깔끔한 티셔츠에 청바지, 카디건을 걸친 차림새와 그린 듯이 어울리는 귀걸이였다. 심미안이 높으니 무엇을 고르든 잘 어울리기는 했다. 왜 갑자기 보라는지는 모르겠지만.
“귀걸이네.”
“뭐야, 그게 끝이야? 할 말 없어?”
김선주가 다시 고개를 바로 하며 물었다. 우연재는 가늘게 눈가를 좁혔다. 예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 대답을 바란 건 아닐 테다.
“네가 처음 사 준 귀걸이랑 같은 거잖아. 네 차에서 잃어버리고 못 찾아서 어제 다시 샀단 말이야.”
“뭐 하러 다시 사? 다른 거 사 줄게.”
“……끝까지 말 안 하네.”
김선주가 슬쩍 콧잔등을 찌푸렸다.
“뭐가.”
“서윤이가 네 오피스텔에서 내 귀걸이 봤다던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해 줘?”
“아, 그거.”
우연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버렸어. 일하시는 분이.”
“쓰레기도 아니고 귀금속인데 버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린 김선주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진짜 어쩌다가 네 오피스텔까지 갔지? 난 아직도 우연재 오피스텔 못 가 봤는데.”
은근한 섭섭함이 묻어 나오는 뒷말을 우연재는 모르는 척 흘려들었다.
“옷에 붙어 온 것 같던데.”
씻으려고 옷을 벗은 순간 뭔가가 톡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간 우연재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에야 귀걸이를 주워 들었다. 버릴까, 생각한 것도 잠시 그는 돌려주는 방향을 택했다. 제게 의미 없는 물건이라 해서 상대에게까지 의미가 없는 건 아닐 테니까.
고작 귀걸이 하나에 울상을 짓는 여자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김선주가 제 감정을 자신에게 허락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연재는 귀걸이를 침실에 두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 한 행동은 아니었다. 조그마한 물건이라 눈에 띄는 장소에 두었다 가지고 나갈 심산이었다. 김선주가 훌쩍 여행을 떠난 바람에 만날 일이 없어 방치해 둔 것뿐이었고.
문서윤이 그 조그마한 물체에 찔려 피를 볼 줄 알았다면 침실에 두는 대신 곧장 버렸을 것이다.
“옷?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차에 떨어진 게 아니라 내 옷에 떨어졌나 보네. 네가 안전벨트 풀어 준다고 가까이 왔을 때 붙었나 보다. 겨울이라 니트 같은 거 입고 있었잖아.”
“그렇게 마음에 든 줄 몰랐는데. 같은 걸로 하나 더 사 줘?”
“됐어. 이미 끝났거든요.”
김선주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어 내며 툴툴거렸다.
“맞다. 나 오늘 저녁에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가도 돼?”
왜 허락받듯이 물어보지. 우연재는 무심하게 답했다.
“친구들 만나는 것까지 나한테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다니까. 만나고 싶으면 만나.”
“친구 남자 친구랑 걔 친구들도 온다던데?”
의도가 명백한 말에 우연재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떠보는 거 피곤한데. 김선주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질투라는 감정에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자 친구이기도 했다.
“선주야. 가고 싶으면 가라니까.”
피곤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김선주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야. 우연재.”
우연재가 걸음을 멈춘 건 그녀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뒤였다. 비스듬히 몸을 틀자 화난 기색이 가득한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길 주변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잔뜩 피어 있는, 연인들이 걷기에 안성맞춤인 산책로였다.
“다른 남자 만난다는데 신경도 안 쓰여?”
예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문서윤의 하나뿐인 법적 보호자와 식사를 한 날이었다.
“술 마시고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런 건 애인이 바람날까 봐 걱정되는 놈들이나 신경 쓰는 거 아닌가…….”
“너는 감정이 그렇게 딱 떨어지게 재단돼? 나를 믿어서가 아니라 나한테 무관심하니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겠지.”
김선주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꽉 쥐었다.
“선주야.”
무관심. 우연재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지 않았어?”
빈정거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어조였다.
“뭐?”
“사람들 앞에서 남자 친구 티 좀 내라길래 길거리에서도 끌어안고……. 만나자는 날마다 만나고. 주말은 시간 비우래서 비웠고……. 친구들 만나는 자리도 꼬박꼬박 따라가서 좋은 트로피 됐던 것 같은데. 아니야?”
“트로피?”
“쿨한 연애 하자며.”
하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창피를 주려는 의도는 없던 터라 우연재로서는 그 반응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선을 지키는, 쿨한 연애를 하자고 한 장본인이 바로 김선주였다.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것도 그 제안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싸한 연인으로 느껴질 법한, 그래서 귀찮게 구는 이성을 손쉽게 쳐 낼 수 있는, 그런 연애.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이 악의 없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는 사회가 바로 대학이라 더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막 입시에서 해방된 데다, 한창 연애에 목숨을 걸 시기이고, 무엇보다 남을 헐뜯는 데 낭비할 체력이 있는 나이였다. 그중에서도 외모나 집안이 튀면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우연재는 저를 둘러싼 소문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딱히 신경 써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소문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퍽 성가셨다.
“내가 네 마음에 드는 남자 친구 노릇 못 하면 차랬고.”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한 말이잖아. 그게 지금 여자 친구한테 할 말이야? 우리가 그동안…….”
“선주야.”
우연재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말을 끊어 냈다.
“고작 몇 개월 만난 걸로 내가 네 일상까지 간섭하는 건 월권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