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반년은 사귀었나. 애초에 우연재는 애인의 사생활을 간섭하는 부류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도 뭣도 아닌데 만나는 친구들까지 단속한다니, 연애보다 구속에 가까운 행위라는 감상이 들었다.
“하.”
김선주는 헛웃음과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자신이 우연재의 일상에 간섭하는 건 월권이라는 의미였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대단히 배려심 넘치는 화법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말했다면 단번에 정이 털렸을 텐데, 빙빙 돌려 말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우연재의 화법을 싫어한 적은 없으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계속 이런 식으로 굴 거면 헤어져.”
“그럴래?”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목소리는 스타카토처럼 가볍기만 했다.
“너는 진짜 모든 게 쉽다.”
김선주는 꽉 쥐고 있던 크로스백을 놓았다. 그런가……. 혼잣말을 하듯 말꼬리를 흐린 우연재가 마침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김선주한테도 쉬운 일 아닌가? 나 지금 두 번째 차이는 것 같은데.”
“사귄 지 한 달도 안 된 남자 친구가 바로 휴학하고 1년 동안 해외 간다는데 그럼 내가 기다려야 해?”
“설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약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순순히 헤어졌잖아.”
“그러게. 그때 그대로 헤어질 걸 그랬네. 올해 복학한다고 학교 근처에서 놀다가 너랑 마주치는 게 아니었는데.”
김선주는 귀걸이를 빼기 위해 손을 들었다. 쿨한 연애를 원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우연재와 제 기준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어쩌면 조금쯤은 진심으로 좋아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 해도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진심이 조금 더 커지기 전에 관계를 잘라 내는 게 유익했다.
뾰족하게 깎인 침을 막아 주던 실리콘을 빼내자 귀걸이는 쉽게 빠져나왔다. 관계를 정리하기란 귀걸이를 빼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나한테 관심 없는 남자랑 연애하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귀걸이 같은 거에 혼자 의미 부여한 내가 바보지.”
김선주는 우연재를 향해 귀걸이를 내던졌다. 하얀 진주 귀걸이가 맥없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귀걸이가 아닌 우연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우연재는 느릿하게 허리를 굽혀 발치에 떨어진 귀걸이를 주워 들었다. 자연스레 하얀 손가락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오던 핏방울이 떠올랐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귀걸이는 문서윤이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우연재는 김선주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쓰레기통이 나타났다.
그는 그 안으로 가볍게 귀걸이를 던져 넣었다.
그때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손쉽기 그지없는 버림이었다.
* * *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차 키는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주춤거리던 문서윤은 이내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둥그런 굴곡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멀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어떤 정신으로 기숙사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 모르겠다. 주체하지 못하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애써 삼킨 후에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차 주인의 말대로 학교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택시를 타도 상관없었지만, 다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컸다. 힐긋거리는 시선을 견뎌 내기에는 정신이 너무나도 너덜거렸다.
‘일단…… 가서 생각하자.’
다짐하는 듯한 혼잣말과 함께 조수석에서 내려섰을 때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살랑이는 공기가 무색하게도 발걸음이 향한 곳은 운전석이었다. 스무 살부터 끌고 다닌 덕분에 차를 몰기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라 다행이었다. 적어도 기숙사까지 가는 동안에는 조금이나마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
주말의 기숙사는 한적했다. 차를 대고 내렸을 때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까지 올라갈 때도 사람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남태은 역시 금요일 밤부터 주말까지 내리 기숙사를 비우는 편이라 걱정할 게 없었다.
책상에 차 키를 올려 둔 뒤에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또다시 볼썽사납게 운 건 아니었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우연재의 요구대로 마음을 비울 수는 없으니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념들이라도 비워 내야 했다.
“하…….”
결국 또 이런 식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상념처럼 끊임없이 치솟았다.
키를 내려 둔 문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없는 발걸음이 향한 장소는 욕실이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라기보다는 그저 찬물에 얼굴을 씻어 내리고 싶었다.
“꼴 가관이네.”
거울 속에 비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두덩이가 퉁퉁 부은 정도는 아니어도 인상이 해쓱했다.
송주아가 걱정스레 쳐다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룸메이트와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다 나온 길이라 초췌하다고 둘러댔는데도 믿지 않는 눈치더라니, 이 정도 수준이면 못 믿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월요일쯤 되면 그럭저럭 나아지겠지. 우연재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답도 내리지 못했는데 이런 생각부터 드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작게 고개를 흔든 문서윤은 세면대 물을 틀었다. 손바닥에 고이는 물웅덩이의 싸늘함이 기꺼웠다. 지금은 다른 것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몇 번이고 세수를 하자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예 얼굴을 찬물에 담그려는데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허리를 세운 그는 얼굴을 닦으며 욕실을 나섰다. 눈두덩이를 꾹 누른 수건을 천천히 떼어 내자 벽에 손을 짚은 채 신발을 벗고 있는 남태은이 보였다.
“야, 똥강아지. 밑에 차 봤냐?”
“차? 아니, 그전에 벌써 온 거예요?”
“어쭈. 룸메가 오는데 반길 줄도 모르고 말이야.”
두 시간 뒤면 출입문이 잠기는 자정이었다. 잠깐 들른 것 같지는 않고, 남은 주말을 기숙사에서 보낼 계획인 듯했다. 이제 보니 팔에는 하얀 봉투가 걸려 있었다.
저게 뭐지. 조그마한 거실 한가운데에 밥상 테이블을 펼쳐 둔 남태은이 그 위에 봉투를 올려 두었다.
“주차장에 처음 보는 차 있던데? 비싼 거.”
“아…….”
우연재의 차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멋쩍어져 차 키를 보이지 않는 곳에 뒀어야 하나,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때마침 침대 위로 지갑과 핸드폰을 던져 놓던 남태은이 덩그러니 놓인 키를 발견하곤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네 차였어?”
“제 게 아니라 친구 차예요.”
“친구? 아, 걔? 우연…… 지?”
“우연재요.”
“근데 왜 걔 차 키가 너한테 있어?”
겉옷을 대충 벗어 둔 남태은은 밥상 테이블 앞에 앉더니 하얀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캔 맥주였다.
“뭐예요?”
“보쌈. 지나가는데 먹고 싶어서 사 왔지. 와서 앉아.”
문서윤은 세탁 바구니에 수건을 놓고는 남태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오늘 거의 굶다시피 했다. 그래도 입맛이 없어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혼자 먹으라고 할 수도 없고 사 온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몇 점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만났냐?”
남태은이 비닐을 뜯으며 넌지시 물었다. 키를 보고 눈치챈 게 분명했다.
“어제요.”
조금 늦게 답하자 쳐다보는 시선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뭐. 알아서 잘했겠지.”
어깨를 으쓱인 남태은은 비닐을 마저 뜯었다. 이어 캔 맥주를 따 건넸다. 문서윤은 제 앞에 내밀어진 술을 잠자코 받아 들었다. 기숙사에서 술 마시다 걸리면 퇴실 아닌가. 시답잖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번에 맞춰 본 대로 말했어?”
남태은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상추에 고기를 올리며 물었다. 문서윤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가 차가웠다.
“네.”
우연재가 얼마나 믿을지는 몰라도 습관 때문에 거짓말을 들키지는 않았을 테다. 거짓말은 우연재가 보지 않을 때 내뱉었고, 그 외에는 목적어가 없는 솔직한 감정이었으니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다.
“잘했어. 자, 이건 칭찬의 의미로 주는 형의 너른 마음.”
남태은이 상추에 싼 보쌈을 건넸다. 문서윤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가 건넨 쌈을 받아 입에 넣었다. 목이 메는 기분이 들었지만, 꾹꾹 눌러 삼켰다.
“잘 먹을게요.”
“고마우면 다음에 맛있는 거 사.”
“알바비 받으면 살게요.”
“비싼 거 먹어야지.”
낄낄거리며 맥주를 마시던 남태은이 캔을 몇 번 흔들다 운을 뗐다.
“야, 똥강아지.”
“네?”
“괜찮냐?”
괜찮냐고. 문서윤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진짜 괜찮아요, 형.”
“엉, 그럼 됐지. 많이 먹어.”
남태은은 제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