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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45)화 (45/139)

45화

주말은 주말이었다. 평일 아르바이트 때보다 손님이 훨씬 많았다. 문서윤은 오랜만의 주말 알바를 실감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일한 덕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감 시간이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몸은 힘들어도 하루 종일 잡념에 빠질 겨를이 없어 좋았다.

“와, 오늘 진짜 바쁘네요. 꼭 대타 뛰는 날은 더 바쁜 것 같더라. 어제도 그렇고.”

“그러게. 좀 쉴래?”

테이블 손님이 전부 빠진 직후였다.

“아니에요. 마감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나저나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 계속 움직이던데. 어제도 그랬잖아요.”

“술 좀 깨려고.”

문서윤은 적당한 핑곗거리를 둘러댔다. 어제 맥주를 마시긴 했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름 괜찮은 핑계였다고 생각했는데, 송주아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눈을 흘겨 댔다. 퍽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수상한데.”

“진짜라니까.”

“흐음.”

장난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콧소리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꼬리만 끌어 올리는데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레 시선이 카페 입구로 향했다.

“어…….”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핸드폰을 보며 들어온 사람은 김선주였다. 곧 카운터 앞에 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 서윤아.”

“여기서 보네.”

다소 어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알바 여기서 하는구나. 학교 근처인데 왜 여태 몰랐지?”

“그러게.”

“맞다. 주문해야지. 바닐라 라테 두 잔 주라. 아이스로.”

우연재랑 있는 게 아닌가? 문서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카드를 긁었다.

우연재의 커피 취향은 한결같았다. 우유는 물론 시럽까지 들어가는 바닐라 라테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제가 만들게요.”

송주아가 등을 툭 치며 지나갔다. 문서윤은 카드를 다시 김선주에게 건넸다.

“어쩐지. 우연재가 여기 자주 오더라.”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어설픈 미소만 짓는데 김선주가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이젠 전 남친이라 관심 없지만.”

그러고는 쾌활한 어조와 함께 카드를 지갑에 집어넣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문서윤은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깜박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김선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연재가 말 안 했어?”

“……응. 헤어졌어?”

“어제.”

“아…….”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웃길 듯했다. 문서윤은 입술만 달싹이다 간신히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미안.”

“네가 왜 미안해해.”

대답이 웃겼는지 김선주가 피식 웃으며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이런 경우 처음이라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몰라서.”

왜,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머릿속을 급습했다. 딱히 기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해서 제게 어떠한 가능성이 생기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앞으로가 더 괴로워질지도 몰랐다.

언젠가 우연재에게는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길 터였다. 옆에 낯선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또 봐야 한다는 의미였다. 막연하게 상상만 하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 순간 어떤 감정이 저를 괴롭혀 대는지 문서윤은 모르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벌써부터 버겁고 또 끔찍했다.

“하긴, 전 남친 친구한테 헤어졌다고 말하는 나도 웃기긴 하다.”

김선주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근데 내가 우연재랑 헤어졌다고 갑자기 너랑 쌩까는 사이 되는 것도 웃기잖아. 친한 건 아니어도 인사는 하면서 지냈는데.”

“응. 그렇지…….”

“혹시 우연재가 나 씹더라도 같이 씹으면 안 된다?”

장난스러운 말투는 농담에 가까웠다.

“안 그래.”

“바닐라 라테 두 잔 나왔습니다.”

송주아가 캐리어를 내려놓자 김선주는 키득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다음에 만나면 인사하자. 갈게.”

문서윤은 사라지는 김선주를 향해 어설프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뭐야. 오빠 친구랑 헤어졌대요?”

대화 내용을 모르는 척하기에는 홀이 지나치게 조용했는지 송주아가 알은체를 해 왔다.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이 여태 당황스러웠다.

“그런가 봐.”

“저번에 볼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왜 헤어졌지?”

그러게. 왜 헤어졌지.

문득 차 문을 열고 나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 * *

월요일과 수요일은 어찌어찌 옆자리에 앉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일부러 시간에 딱 맞춰 강의실에 들어간 덕분이었다. 그 사실을 빤히 알았을 텐데도 우연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쪽을 돌아보는 얼굴이 설핏 찌푸려진 게 전부였다.

금요일. 마지막 강의에서는 웬일로 우연재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늦게 오려는 건가.

내내 마음을 졸이던 문서윤은 강의가 끝나고 나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당장 피했다는 생각에 마냥 안심한 건 아니었다. 고작해야 이틀이라는 시간을 벌었을 뿐, 계속해서 피해 다닐 수는 없으니 주말 동안 어떤 얼굴로 우연재를 봐야 하는지 고민을 해 봐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안 보이지. 헤어졌다던 김선주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오빠.”

혹시 뒷자리에 있나 싶어 가방을 챙기며 강의실을 훑어보던 순간이었다. 서지은이 다가왔다.

“연재 오빠 이 강의도 안 왔네요?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이 강의도? 다른 전공들도 빠졌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잘 모르겠는데. 다른 강의도 안 들었대?”

“오빠도 몰라요? 오늘 3학년 전공도 안 들어왔다던데. 그 오빠 수업 빠진 적 없다고 들었거든요. 선배들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길래 저도 잘 몰라서 오빠한테 물어봤죠.”

제게 소식을 묻는 걸 보면 남들 눈에도 우연재와 제일 친한 친구는 저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빠도 모르시는구나. 음, 별일 없겠죠. 아무튼 다음 주에 봐요!”

“다음 주에 봐.”

얼떨떨하게 대답한 문서윤은 가방을 챙긴 뒤 강의실을 나섰다. 그는 무심결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설사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우연재에게는 별것 아닌 일일 확률이 높았다.

‘별일 아니겠지.’

그렇게 자위하며 신경 쓰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의식할 새도 없이 온 신경이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설마 헤어진 것 때문인가. 그렇다면 더 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주제에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기만일 테다.

“하…….”

얼마나 망설였을까, 결국 문서윤은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곧 손가락이 익숙한 이름을 찾아 눌렀다.

‘한 번만 하고 안 받으면 신경 끄자.’

내심 우연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받을까 봐, 혹은 받지 않을까 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기계음으로 넘어가기 직전, 미세한 소음이 전해졌다.

- 응.

곧이어 잔뜩 늘어지는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움찔 손을 떨었다. 설마, 하는 생각은 금세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연재. 너 어디 아파?”

- 으응, 아파.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는 물론 말투가 평소보다 배로 늘어졌다. 아플 때마다 우연재에게서 튀어나오는 버릇 중 하나였다.

- 아픈데 혼자 있어서 서럽네……?

문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 나 지금 문서윤 보고 싶은데…….

하얀 잇새에서 톡 튀어나온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 문서윤.

대답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응.”

- 나 보러 올 거야?

칭얼거리는 듯한 말투에는 웃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택시에서 내려선 문서윤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봤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돌던 고민의 귀결점은 결국 이런 방향이었다. 아무리 껄끄럽게 헤어졌다 해도 아프다는 친구를 매정하게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우연재가 아픈 날은 손에 꼽아 더 그랬다.

“이모한테는 말씀드렸나.”

부모님께 이것저것 말하는 살가운 아들은 아니니, 두 분은 모르고 계실 듯했다. 다 큰 성인이 감기에 걸렸다고 부모님께 미주알고주알 알리는 일도 드물 테고.

문서윤은 오피스텔 입구에서 호출 벨을 눌렀다. 몇 초간 기다렸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쓰러졌나?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없었다면 뛰어서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우연재가 머무르는 층까지는 금방이었다. 고작 한 번 왔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문 앞에 서서 문서윤은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벨을 눌렀다. 이번에도 답이 없으면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셈하며 지금 들어갈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 볼지 고민하고 있는데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왔네.”

다행히 우연재는 멀쩡히 서 있었다.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였다. 아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눈가는 미묘하게 풀려 있었고 양 뺨은 열로 달아오른 듯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았다. 샤워까지 하고 나온 걸 보니 쓰러질 정도로 심각히 아픈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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