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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46)화 (46/139)

46화

“씻었어?”

문서윤은 가장 무난한 질문을 던지며 우연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미미하게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열이 심한가, 만져 보면 쉽게 풀릴 의문이었으나 선뜻 손을 대기가 망설여졌다.

“방금.”

“아……. 어쩐지. 아까 1층에서 호출했을 때 반응 없더라.”

“걱정했어?”

뒤를 돌아본 우연재가 느릿하게 웃었다. 야트막하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고 있자니 기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아파도 쓰러질 정도로 체력이 약한 편은 아닌데, 너무 과하게 걱정한 것 같았다.

건강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게 트라우마라도 됐는지 큰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연재가 아프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났다. 이번에도 지레 걱정한 것 같아 민망했으나 그래도 쓰러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친구가 아프다는데 걱정 안 되면 그게 사람이야?”

“아, 그럼 난 사람 아닌가 보네. 문서윤만 빼면 별로 걱정 안 되는데.”

단지 말버릇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마디에 걸린 비닐이 손가락이 아닌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적당한 말을 내놓았다.

“현승이 앞에서는 그 소리 하지 마. 삐져.”

“김현승은 원래 툭하면 삐지잖아.”

“그 얘기도 하지 마.”

눈썹을 찌푸리자 우연재가 작게 키득거렸다. 혼몽한 눈동자가 아래로 도르르 떨어졌다. 비닐에 담긴 게 뭐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배.”

“배?”

“감기에 좋다길래. 죽은 사 와도 시간 늦어서 안 먹을 것 같고……. 과도 있지?”

택시를 타러 가던 길에 우연히 과일 가게를 발견했다. 수십 번을 지나친 길인데 여태 과일 가게가 있는 줄도 몰랐던 곳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서윤은 우연재의 오피스텔로 향할지 기숙사로 돌아갈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굳이 카페 앞으로 택시를 부르는 대신 대로변까지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몇 시간 내내 고민만 하다 마감 시간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과일 가게를 발견한 것도, 배가 감기에 좋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도, 제철도 아닌 과일이 바구니에 소복이 담겨 있는 걸 본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주방에 있을걸. 나 먹으라고 사 왔어?”

비닐봉지를 가져간 우연재가 그 안을 들여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하얀 비닐 위로 미끄러져 결국엔 바닥으로 추락했다.

“손 씻고 올 테니까 빨리 머리나 말려. 감기 걸렸다며?”

“으응. 말 잘 들어야지.”

문서윤은 배를 들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후끈한 수증기가 덮쳐 오리라는 예상과 달리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세면대 물을 틀자 찬물이 쏟아져 나왔다.

괜한 어색함에 오랜 시간 손을 씻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거울 속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당장 우연재와 마주치면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상대가 환자라 그런지 몰라도 막상 얼굴을 보니 견딜 만했다. 감정을 묻으라는 말이 상처로 남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할큄 역시 온전한 제 몫이었다. 지금은 그저 우연재와 어색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내색하지 말자.”

문서윤은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물을 잠갔다. 감정을 내색하지 말자는 건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내색하지 말자는 건지 그 스스로도 목적어를 알 수 없는 다짐이었다.

또다시 쓸데없는 생각이 몰려와 고개를 털어 내며 손을 닦는데 멀찍이 물기 어린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샤워 후 뒷정리를 안 할 성격은 아닌데,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욕실을 나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주방 쪽으로 방향을 틀자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배를 깎는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 말리라니까 뭐 해?”

“다 했어.”

환자가 왜 직접 과일을 깎고 있지. 머리부터 말리랬더니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손에 들린 과도부터 빼앗은 뒤 머리나 말리라고 밀어내고 싶었으나 칼을 쥔 상태라 다칠까 봐 함부로 손을 뻗기도 어려웠다.

설마.

문서윤은 껍질이 거의 다 깎여 나간 배를 보고 나서야 우연재가 제게 맡기는 대신 직접 과도를 든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야. 나 피아노 그만둔 게 몇 년 전인데.”

“아는데, 햇수로 8년째인 거. 교수님 제외하면 내가 제일 먼저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아니, 그러니까 왜 네가 하고 있냐고. 손 좀 베여도 돼.”

“너 다치는 거 싫어서 내가 하는 건데.”

일정한 모양으로 잘린 배가 접시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문서윤 과일 존나 못 깎잖아.”

부정하기에는 맞는 말이라 아니라고 대꾸할 수도 없었다.

“……무슨 환자 부려 먹는 것도 아니고. 빨리 머리나 말려.”

멋쩍음에 말을 얼버무리자 우연재가 배 하나를 집어 건넸다. 문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감기에 좋다길래 사 온 과일이었지, 제가 먹으려고 사 온 건 아니었다. 늦은 시간이라 딱히 먹고 싶지도 않았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지 그대로 손을 물린 우연재가 배를 씹었다.

“먹고 말릴게.”

“아프다면서.”

“문서윤 와서 괜찮아진 것 같은데.”

“허튼소리 하지 말고.”

지금은 만져도 괜찮지 않을까. 망설임 끝에 문서윤은 우연재의 이마에 손을 댔다. 제 체온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뜨거웠다. 손등을 스쳐 지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진 물방울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온도였다. 머리카락에 매달린 물방울에는 냉기가 스며 있는데 손바닥은 뜨겁기만 했다.

“열 심하잖아.”

“신경 쓰이면 말려 주든가.”

“네가 애야?”

“으응. 그럼 먹고 말릴게요, 선생님.”

일곱 살짜리 어린애도 이런 투정을 부리지는 않을 듯했다. 능글거리는 태도에 한숨이 새어 나왔으나 배 하나를 다 먹길 기다릴 시간에 차라리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드라이어 어디 있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우연재가 사각, 배를 베어 먹으며 웃었다.

인공적인 바람보다 다리에 스치는 몸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문서윤은 드라이어를 내려 두며 고분고분한 정수리를 응시했다. 지금처럼 우연재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경우가 아니면 그를 내려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올려다봐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180은 안 되어도 그에 근접한 키라 스스로가 작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우연재 옆에 서면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훌쩍 크더라니,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 그를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우연재가 지금처럼 저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나저나 약 먹어야 될 것 같은데. 먹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열이 심상치 않았다.

걱정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연재는 배만 먹고 있었다.

“감기는 어쩌다 걸렸어? 너 잘 안 아프잖아.”

“으음. 바람맞아서 그런가…….”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철렁거렸다. 차를 두고 망설임 없이 내려서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날 날씨가 어땠더라. 조수석에서 잠깐 내렸던 기억은 있지만, 날씨가 어땠는지는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손끝이 차게 식던 감각이 전부였다.

저 때문인가 싶어 입술만 달싹이는데 우연재가 고개를 기울여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등을 지고 앉은 자세였으나 그가 턱을 위로 젖힌 덕분에 눈이 마주쳤다.

“나 차였잖아.”

아, 헤어졌댔지. 진작 알게 된 소식인데도 어쩐지 이제서야 현실성이 느껴졌다. 처음 듣는 척하기에는 티가 날 것 같아 문서윤은 솔직하게 대꾸했다.

“선주한테 들었어.”

“선주?”

기대고 있던 머리를 느릿하게 일으킨 우연재가 바닥에 앉은 자세 그대로 방향만 틀었다. 완전히 마주 보는 자세였다.

“왜 선주야.”

문서윤의 오른쪽 허벅지에 비스듬히 팔을 걸친 그는 그 위로 제 얼굴을 기댔다.

“응?”

이름 불러서 화났나. 둘이 어쩌다 헤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말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문서윤은 느리게 팔랑이는 속눈썹을 내려다보다 마음속 깊이 숨겨 둔 물음을 꺼내 들었다.

“왜……. 헤어졌어?”

불가항력적인 물음이었다.

“헤어지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해.”

그런가.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뜨거운 바람을 오래 쐬어서인지 아니면 높아진 체온 때문인지 손가락에 스미는 온도가 따뜻했다.

“그래서 아팠나…….”

툭 튀어 나간 혼잣말은 미처 말릴 새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당황해 손을 떼어 내려는데 우연재가 머리를 조금 더 깊숙이 기댔다.

“위로해 주게?”

위로가 필요한 일이구나. 문서윤은 혀를 깨물며 울컥거리는 감정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위로가 필요한 우연재는 낯설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짝사랑 상대는 도대체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 걸까. 하물며 그것 때문에 앓고 있는.

“뭐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는데.”

쩍쩍 갈라지는 마음과 달리 목소리는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문득 목이 탔다.

“왜. 문서윤 잘 써먹는 위로 방법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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