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47)화 (47/139)

47화

“……토닥여 주라고?”

문서윤에게는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들이 제법 많았다. 가만히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느끼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있다가 적당한 때에 공감을 표현해 주고 등을 토닥이는 건 제 나름의 위로 방식이었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아무리 남자끼리라지만 친구 사이에서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스킨십이었으니까. 그러니 등을 토닥이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우연재이니만큼 표정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쓰긴 해야겠지만 이상할 것 없는 접촉이었다.

“아. 이제 나는 다른 새끼들이랑 동급이야?”

예쁘게 웃으면서 묻는 것치고는 단어 선택이 사뭇 거칠었다.

“하나뿐인 소꿉친구한테 존나 야박하네?”

“아니……. 그럼 내가 뭐 너한테만 따로 해 준 거 있어?”

“또 나만 기억하네…….”

허벅지 위를 가로지른 팔이 슬쩍 움직여 허리께를 건드렸다. 습관적인 스킨십에 문서윤은 손을 밀어내며 기억을 곱씹었다.

“같이 자자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절로 눈매가 찡그려졌다. 꼬꼬마 시절처럼 자주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가끔 한 침대에서 자고는 했다. 공부를 핑계로 우연재의 방에서 놀다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잠들던 때였다.

보통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경우였다. 새벽에 깨기라도 하면 다시는 잠들지 못한 밤이기도 했다.

“응. 오랜만에 같이 자자고.”

샐쭉이 웃은 우연재가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처럼 허벅지 위로 얼굴을 묻었다.

“문서윤 아니면 누가 나 위로해 줘.”

눈웃음을 따라 물크러지는 눈매가 열에 녹은 듯 느릿하게 깜박였다.

문서윤은 뻣뻣한 자세로 천장만 응시했다. 이불을 가슴까지 올린 뒤 양손을 깍지 끼고 배 위로 올려 둔 자세였다. 부자연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도대체 어떻게 누워야 자연스러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괜찮겠지. 군대에서도 정직하게 잔다는 소리를 들었었고 평소에도 똑바로 누워 자는 편이니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는 자세는 여전하네.”

우연재가 침대로 올라오며 웃음을 흘려 댔다. 웃음소리에 열이 섞일 수 있다면 딱 저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미묘하게 뭉개지고 미묘하게 나른한 목소리였다.

“보여?”

“난 누구랑 달리 밤눈 밝아서.”

이불이 들리는 사그락 소리와 함께 우연재가 눕는 기척이 느껴졌다. 침대 사이즈가 큰 덕분에 꼭 붙어 누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침실이라는 공간 때문인지 아니면 사방에 깔린 어둠 때문인지 시각 대신 다른 감각들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우연재가 쓰는 스킨 냄새였다. 안 바꿨구나. 머리를 말려 줄 때도 맡지 못한 냄새가 지나치게 의식됐다.

이 타이밍에 뒤척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문서윤은 이불 아래에 감춰진 발끝에만 힘을 실었다. 긴장된 호흡이 덜컥 튀어나올까 봐 겁이 났다.

“같이 자는 거 오랜만이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저와 달리 우연재는 옆으로 돌아누운 자세였다. 침실이 어두워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집요한 시선만큼은 피부를 찌를 듯이 생생했다.

우연재가 어둡게 자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더라도 어둠이 붉어진 뺨을 숨겨 줄 테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이렇게 자는 게 좀 그렇긴 하지.”

“좀 그렇긴 하지?”

“……이상하게 본다고.”

“누가 이상하게 봐.”

아닌가. 문서윤은 잠깐 침묵했다. 김현승과 한 침대에서 잔다고 상상해 보자 특별하게 이상한 그림은 아닌 듯했다. 또 예민하게 반응했나 싶어 지레 마음이 찔렸다.

“군대 가는 새끼들은 자지 없어, 그럼?”

갑자기 군대는 왜 튀어나오지. 그리고 뭐? 자지? 우연재의 말을 이해한 건 몇 초 정도가 흐른 뒤였다. 자지라는 비속어에 인상을 찌푸릴 틈도 없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주제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요즘은 군대에서도 침대 따로 써.”

농담이었는지 우연재가 같이 키득거렸다.

“그래?”

“응.”

“다행이네……. 생각만 해도 기분 더러웠는데.”

눈이 슬슬 어둠에 익으며 우연재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문서윤은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리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가만히 옆에 누운 친구를 응시했다.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았다.

“거기 있는 침대 두 개 합쳐도 이거보다는 작지 않아?”

우연재의 추측처럼 군대에서 쓴 침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한 사람이 누우면 여유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건 그런데…….”

“그럼 나랑 같이 자는 거 이상할 거 없잖아.”

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문서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연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였다.

“알았어.”

“그러니까 남 눈치 신경 꺼. 어릴 때는 나랑 잘만 잤는데 왜 자꾸 선 긋지.”

“나이 먹으니까 그렇지 뭐…….”

그보다는 숨겨 온 마음 때문이었다.

열여섯의 여름, 문서윤은 제 짝사랑을 단순한 풋마음이라 정의 내렸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우연재가 옆에 있었던 것뿐이라고, 설레는 감정도, 들뜨는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가라앉으리라고 여겼다. 우연재가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해 올 때도 괜찮았다. 두근거리는 심장과는 별개로, 지나치게 의식해 본 적은 없었다.

꼬박 1년이 지난 뒤에야 문서윤은 제 마음이 풋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우연재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게 된 것도, 그를 성애적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나이 먹는 게 무슨 상관이야.”

어깨 때문에 옆으로 눕는 자세가 불편했는지 우연재가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받쳤다.

“그냥…….”

문서윤은 어물쩍거렸다.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한다, 정도로 여겼던 짝사랑 상대가 성애적 대상이 된다는 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이성이었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하고 넘겼겠지만, 우연재는 저와 같은 남자라 더 괴로웠던 것 같다.

문서윤은 그때가 돼서야 제 마음의 죄악과 무게를 짐작해 냈다.

문제는 이성 사이에는 선이 있지만, 동성 사이에는 선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연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몸을 붙여 왔고, 그럴 때마다 문서윤은 곤란함을 느끼곤 했다. 오래된 소꿉친구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밀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우연재가 스물셋이 된 지금까지도 스스럼없이 저를 껴안고 한 침대를 공유하는 건.

결국 진작 쳐 내지 못한 제 탓이었다.

바보 같은 짓 했네, 입 안이 썼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함께 침대에 누운 저도 저였다. 우연재가 아프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피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차마 열이 펄펄 끓는 친구를 두고 매정하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우연재가 아플 때면 늘 마음이 물러지고는 했다. 같이 자자는 말이나 군대 운운하는 실없는 농담을 받아 주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삼스럽긴 한데 우리 이렇게 같이 잔 것도 오래전이다 싶어서. 고2 때가 마지막 아니었나?”

문서윤은 흐려지던 말을 간신히 이어 붙였다. 자그마치 5년 전 일인데도 오래전이라 말한 것치고는 최근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혹시라도 우연재와 닿을까 봐, 그래서 티가 날까 봐 마음을 졸인 기억이 선명했다.

‘5년 지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네.’

그나마 약간 떨어져 누워 다행이었다.

문서윤은 연신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길 반복했다. 향수처럼 후각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도 아닌데, 익숙한 스킨 냄새가 지나치게 오감을 자극했다.

“문서윤.”

시간이 흐를수록 눈이 어둠에 적응한 것과 달리 우연재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샐샐 눈웃음을 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꼭 그랬다.

“그때가 마지막일 것 같아?”

“뭐야. 아니야?”

문서윤은 기억을 더듬기 위해 애썼다. 그날 이후에 침대에서 얘기하다가 먼저 잠든 날이 있었나?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제 마지막 기억처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닌데. 왜 모르지?”

“아니면 아닌 거지.”

미묘하게 길어지는 말꼬리에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나 자. 아프다며?”

고개를 바로 한 문서윤은 민망함을 감추듯 팔을 뻗어 우연재의 얼굴을 밀었다. 거세게 민 것도 아닌데 우연재는 아,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피부에 맞닿은 손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열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심상치 않은 느낌에 문서윤은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반 정도 일으킨 뒤 우연재의 뺨을 건드렸다.

“약 먹었어.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걸.”

자세히 살피려면 불부터 켜야 할 것 같아 침대에서 내려서기 위해 손을 떼어 내려는데 돌연 손목이 붙잡혔다.

“더 만져 줘, 시원해.”

손을 뺨에 가져다 대며 비비는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문서윤은 움찔 손끝을 떨었다. 검지에 긴 속눈썹이 스쳤다.

“내 손이 시원한 게 아니라 네가 뜨거운 거야.”

“비싸게 구네…….”

손목을 쥔 손가락이 손등을 타고 올라가더니 손가락 사이사이로 엉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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