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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48)화 (48/139)

48화

“하긴, 문서윤 손 비싸지. 피아노 쳤던 손인데.”

확연히 굵기가 다른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손바닥에 닿은 뺨도, 손등을 뒤덮은 손도 온통 뜨거웠다.

우연재가 손끝만 움직여 손가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는 게 신기하다며 매만지던, 아주 오래된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목덜미로 바짝 소름이 돋아 문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고 자게?”

“응. 가까이 와.”

“차라리 얼음찜질해 줄게.”

손목이 잡힌 채로 완전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우연재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어정쩡하게 상체를 세우고 있던 터라 몸이 그대로 넘어지듯 끌려갔다. 곧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침대 위로 닿았다.

“됐어. 축축하잖아.”

다리가 뒤엉킬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게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문서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티 나지 않게 침만 삼켰다.

“…….”

조금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진 덕분에 흐릿하게나마 우연재의 표정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아직 잘 생각이 없는 듯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 뜨이길 반복했다.

“서윤아.”

입술이 벌어지며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왜.”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짧게 튀어 나간 대답은 다소 퉁명스럽게 들렸다.

“내가 잘못했어.”

우연재가 명료한 발음으로 잘못을 고했다.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문서윤은 그가 일주일 전 일을 사과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문서윤한테 미움받을까 봐 걱정돼서 잠도 잘 못 잤는데, 나…….”

시무룩한 목소리와 함께 우연재가 몸을 뒤척였다. 잡혀 있는 손바닥 아래로 뭉그러지는 뺨이 느껴졌다. 언뜻 엄지와 이어지는 둔덕 위로 입술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아니, 우리가 몇 년을 알았는데 왜 자꾸 미워하지 말래.”

우연재를 미워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문서윤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미워할 줄 몰랐다. 가깝지 않은 사람도 쉬이 미워하지 못하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프다는 한마디에 오피스텔까지 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헤어졌어도,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우연재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걱정이 됐다. 고작 말다툼 때문에 미워할 수는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응. 미워하지 마.”

“내가 애야? 그런 걸로 미워하게.”

우연재가 키득거렸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느껴졌다.

“그 일도 묻을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문서윤은 움찔, 손을 떨었다. 우연재에게도 전해졌을 만큼 명백한 동요였다.

“그러니까 나 피하지 마.”

어둠 속에서도 눈이 마주쳤다. 장난치듯 바람을 불면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렇게 넘어가면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닐까, 문서윤은 막연하게 생각하며 우연재의 뺨을 꾹 눌렀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친구 사이니까.

“알았으니까 자.”

“넌 자지 마.”

“뭐?”

“나 자는 거 봐.”

뺨이 슬쩍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농담을 내뱉으며 웃는 게 분명했다.

“네가 애야?”

“보고 싶을 때 와서 그런가……. 애교 부리고 싶네?”

“다 큰 남자 새끼가 이러면 욕먹어.”

“알아. 그래서 너한테만 애교 떨잖아, 나.”

“뭐라는 거야.”

문서윤은 은근슬쩍 손을 빼낸 뒤 우연재의 눈두덩이를 눌렀다. 가닥가닥 늘어진 속눈썹 때문에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

어쩌면 가슴에서 시작된 감각이 손으로 옮겨 갔을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친구를 두고 이런 마음을 느껴도 되는 건지 불쑥 자괴감이 샘솟았다.

나야말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아야겠다. 문서윤은 그 자괴감마저 익숙하게 눌러 삼켰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문서윤 없으면 존나 섭섭하겠다, 그치.”

괜스레 혀를 깨무는데 우연재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잠들면 가야겠다, 생각하던 차라 마음이 읽힌 것처럼 당황스러워졌다.

하여튼 못 당하겠다니까. 결국 문서윤은 한숨을 삼키며 백기를 들었다.

“자고 간다니까? 빨리 자. 나도 자게.”

“알았어.”

우연재가 눈을 덮은 손을 떼어 내며 웃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사르르 휘어지는 눈꼬리가 예뻤다.

“잘 자.”

“……너도.”

문서윤은 어느새 옆으로 향한 몸을 자연스럽게 바로 뉘었다. 그러곤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눈을 감았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떨어지고 싶었으나, 우연재가 귀신같이 눈치챌 것 같아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다른 생각을 하기 싫어 머릿속으로 양만 세고 있는데 어느 순간 느릿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천천히 눈을 뜨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

잠이 든 우연재가 보였다. 약 기운이 돈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숨을 내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짝사랑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이 들 때까지.

* * *

우연재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찬물에 몸을 담그는 수고를 들인 보람이 있는지, 온몸에서 열이 들끓었다. 약 기운을 빌렸더라면 편하게 잠들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약을 먹을 생각이었다면 굳이 감기 기운이 있는 몸으로 찬물 샤워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서윤.”

허리를 세워 앉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잠든 이의 이름을 불렀다. 문서윤은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꿈을 헤매는 듯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간헐적으로 떨릴 뿐이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웠다.

“……면 안 되지.”

뇌까리는 혼잣말은 미약한 숨소리를 잡아먹을 듯 사납게만 들렸다. 그와 함께 거리낌 없이 뻗어 나간 손이 문서윤의 뺨 바로 앞에서 우뚝 멎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우연재는 천천히 손을 물렸다.

옅은 한숨이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가려졌다.

꽃신

병원은 늘 그렇듯 불유쾌한 장소였다. 우연재 역시 병원이 싫었다. 또래 친구들처럼-왜 엄마가 친하지도 않은 애들을 친구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주사를 맞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꺼림칙한 시선, 혹은 연민의 눈길, 그러한 것들이 불편했을 뿐이다.

때때로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감정을 더 잘 읽어 내고는 했다.

“너무 속상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4%라는 게 생각보다 높은 숫자거든요.”

“혹시 나 때문에 저렇게 된 걸까 봐…….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이것저것 알아보니까 후천적인 문제인 경우가 많다던데.”

“후천적인 케이스가 많긴 한데, 뇌라는 게 아무래도 복잡해서요.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문틈 사이로 주치의 선생님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연재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병원에 오면 기분이 나빴다.

* * *

“미안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우리 애가 조금 유별나서.”

우연재는 누군가와 통화 중인 어머니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방에서 놀다 거실로 나온 참이라 훔쳐봤다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겠지만, 슬쩍 몸을 숨긴 순간부터는 맞는 단어였다.

유별나다는 게 뭐지.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생소한 단어를 혀끝으로 굴렸다.

“아니, 친구들이랑 싸우고 그러는 건 아니고. 서윤이 순해서 괜찮다고?”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거실 창가로 향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손목에 고민의 흔적이 묻어 나왔다.

“으음, 그럼 다음에 우리 집으로 올래? 그러고 보니까 애들 어릴 때 빼고는 잘 못 봤네.”

집에 손님이 오려나 보다. 우연재는 거실로 나서는 대신 등을 돌렸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많았다. 또래보다 영특하다 해도 고작 여섯 살짜리가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연재는 가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 책장 구석에 놓인 사전을 들춰 보고는 했다.

두꺼운 사전에서 궁금한 단어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음과 모음 순서만 맞춰 책장을 넘기면 끝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마침내 한 구역에서 멈췄다. 우연재는 유별나다는 글자 아래의 설명을 소리 내어 읽었다.

“보통의 것과 매우 다르다.”

유별나다는 게 그런 뜻이구나. 아픈 곳도 없는데 주기적으로 병원을 가는 것도 제가 유별나서일지도 모르겠다.

우연재는 탁 소리가 나도록 사전을 닫았다. 어쩐지 오래된 책 냄새처럼 퀴퀴한 기분이 들었다.

* * *

친구라는 단어는 짜증스러웠다. 유치원에 친구들이라 묶이는 또래들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친구라고 하기도 싫었다. 혼자 화장실도 못 가는 멍청이거나, 유치원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울보거나, 그도 아니면 같이 놀자며 귀찮게 달라붙는 거머리였다.

그래서 우연재는 친구가 왔다는 말에도 처음 보는 어머니의 지인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 제 서재에 틀어박혔다. 거실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술래잡기를 하자거나 소꿉놀이를 하자는 바보 같은 소리만 듣게 될 게 뻔했다. 귀찮게 구는 애와 어울려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 책을 읽는 게 좋았다.

서재에 놓인 소파가 아닌 책장에 기대앉아 책을 펼쳤을 때였다.

“연재야.”

문이 열리며 낯선 얼굴이 뽈뽈 들어왔다. 처음 보는 이모의 다리 뒤에 숨어 있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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