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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49)화 (49/139)

49화

“안녕.”

수줍게 얼굴만 빼꼼 내민 게 언제였냐는 듯 조그맣게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우연재는 하얀 얼굴을 힐긋 바라보다 마지못해 인사말을 입에 담았다.

“안녕.”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정 교육 선생님께 배운 대로 인사를 해야 부모님 귀에 이상한 소리가 흘러들어 가지 않았다. 다소 쌀쌀맞은 대꾸에 우물쭈물하던 아이는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세 뼘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나는 문서윤이야.”

“난 우연재.”

“아까 이모한테 들었어. 넌 예쁜데 이름도 예쁘다.”

예쁘다는 칭찬은 너무 많이 들어 새롭지도 않았다.

자꾸 말을 거는 게 성가셔 우연재는 힐금 문서윤을 쳐다봤다. 머리카락도 짧고 반바지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었으니 남자애가 확실한데 제가 아는 남자애들과 달리 시끄럽지도 않고 피부도 하얬다.

“고마워.”

남자한테는 예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잘생겼다고 해야 한다고 고쳐 주고 싶었으나 못 알아들을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그리고 너도 예뻐.”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문서윤은 남자인데도 예뻤다. 눈은 동그랬고 저와 달리 갈색이 도는 눈동자는 순한 인상을 한층 더 순하게 만들었다. 여자애들이 공주 놀이를 하자며 달려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쁘다는 말에 문서윤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여섯 살인데. 연재 너는 몇 살이야?”

나이도 모르면서 그냥 이름을 부른 건가 싶어 어이가 없어졌다.

“여섯 살.”

우연재는 책으로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진짜? 나랑 친군데 키 엄청 크다. 너는 무슨 계절에 태어났어?”

“겨울.”

“난 여름에 태어났는데 왜 작지?”

문서윤이 또래에 비해 작은 게 아니라 제가 또래에 비해 큰 것에 가까웠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태어났어도 우연재는 봄에 태어난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어릴 때야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작았지만, 어느샌가 비슷해지더니 이제는 반에서 제일 큰 축에 속했다.

“나중에 커.”

걸어오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어 우연재는 대충 대꾸했다.

“나도 연재만큼 컸으면 좋겠다. 그런데 무슨 책 봐? 동화책?”

세 뼘쯤 떨어져 앉은 문서윤이 꼼질꼼질 움직이더니 조심스레 책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우연재는 괜스레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순간 손가락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

종이에 베였는지 길게 그인 선 위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어나 휴지로 닦으려는데 문서윤이 손목을 낚아챘다. 앙 벌어진 입술이 아무렇지 않게 피가 나는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혀가 닿는 축축한 느낌에 우연재는 움찔 손을 떨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해?”

아이스크림을 빨아 먹듯 손가락을 핥던 문서윤이 손목을 놓아주며 헤 웃었다.

“원래 피 나면 이렇게 하는 거랬어.”

“누가?”

“우리 엄마가.”

위생적이지 못한 행위였으나 엄마가 그랬다는데 지적하기도 뭣했다.

“봐 봐, 지금은 피 안 나잖아.”

“원래 종이에 베인 건 금방 멎어.”

우연재는 피가 멎은 손가락을 멀거니 들여다봤다.

잘못 예뻐해 주다 망가트린 게 몇 개 있다 보니 이 정도 피는 혼자 닦아 내고는 했다. 피만 보면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던 기억이 있어서였다. 혹 제 새끼의 상처가 아닐까 봐.

“그래도 아프잖아.”

이런 식으로 구는 사람은 문서윤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책 같이 볼래?”

“응. 같이 봐도 돼?”

“여기 앉아.”

제멋대로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묻혀 그럴 테다. 더러운 건 딱 질색인데, 이상하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우연재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문서윤이 다가오자 살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함께 좋은 냄새가 풍겨 왔다.

* * *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오래 안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연재는 문서윤이 제 친구임을 인정했다.

친구가 아닌데도 저를 친구라 칭하는 아이들이 많은 건 여전히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문서윤의 친구도 제 친구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몇몇은 친구의 범주에 집어넣었다.

엄마 아빠가 좋아했다.

문서윤도 좋아했다.

* * *

가끔 속이 답답할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의 경계가 명확할 때면 더 답답했다.

친구를 때리는 게 나쁜 일이라는 사실은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알 터였다. 하지만 먼저 건드린 건 저쪽인데 왜 제가 참아야 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연재야. 친구랑 싸우면 안 되지.”

우연재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불만스레 뺨을 부풀렸다. 단정한 눈썹이 어린애답지 않게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걔가 먼저 때렸어요.”

“그래도 친구는 때리면 안 되는 거야.”

“저는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게 많아요?”

눈을 조금 크게 뜬 어머니는 이내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 바른길로 가라고 그러는 거지.”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 관한 경계는 우연재에게 매우 익숙했다. 하지만 이럴 때면 짜증이 나고는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 때리면 서윤이가 친구 안 한다고 할 텐데. 나쁜 아이라고.”

문서윤이 나랑 친구를 안 한다고? 왜?

“문서윤은 제 친구예요. 그러니까 제 건데.”

우연재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네 거? 얘들이 참…….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어머니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강아지를 보듯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다른 친구 때리면 서윤이가 속상해할 거야. 서윤이 속상하게 하는 건 싫잖아.”

곰곰이 생각하던 우연재는 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 때릴게요.”

문서윤이 싫어하는 짓은 하기 싫었다.

* * *

“야! 우연재!”

일곱 살이면 소꿉놀이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문서윤 때문에 흥미도 없는 소꿉놀이에 동참한 때였다.

“우연재! 너 왜 내 말 무시해?”

우연재는 그제야 제 앞에 선 여자아이를 응시했다. 새침한 표정으로 양손을 허리에 올린 햇님반 김다정이었다.

“너 왜 서윤이랑 소꿉놀이해?”

“문서윤이 하자고 했으니까.”

“안 돼! 서윤이 여자 친구는 나니까 나만 할 수 있는 거야. 너는 저기 가서 다른 애들이랑 놀아.”

“너 문서윤 여자 친구야?”

“그래! 오늘 아침부터 여자 친구 하기로 했어!”

우연재는 문서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짜냐고 묻듯 빤히 쳐다보자 문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뺨에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비켜. 와이프 역할은 여자 친구가 하는 거야.”

우연재는 김다정의 손짓에 허망하게 밀려났다. 문서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 * *

김다정이 또다시 밀쳐 냈다. 우연재는 뒤로 넘어졌다.

일부러 울었다.

깜짝 놀란 문서윤이 달려왔다.

문서윤이 김다정에게 이별 통보를 했다.

* * *

우연재는 주황 물이 든 손톱을 내려다봤다. 지난밤 문서윤과 함께 들인 봉숭아 물이었다. 손톱에도 노을빛이 물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해도 방방 뛸 정도는 아닌데 문서윤은 침대 위에서 방방 뛰었다.

문서윤의 어머니가 조그마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거 지워지기 전에 첫눈 오면 첫사랑이 이뤄지는 거야.”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우연재는 별 뜻 없이 물었다.

“첫사랑이 뭔데요?”

“으음. 우리 서윤이랑 연재가 제일 먼저 좋아하는 사람?”

제일 먼저 좋아하는 사람? 좋아한다는 의미가 모호했다. 제일 먼저라면 부모님이나 가족일 텐데, 아무래도 그것과는 다른 감정인 모양이었다. 여자 친구를 말하는 걸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서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와아, 첫눈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우연재가 첫사랑의 말뜻을 깨달은 것과 동시였다.

아이는 제 소꿉친구의 첫사랑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얼마 전까지 여자 친구였던 김다정일 테다.

아직 7월이니 문서윤의 바람처럼 눈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우연재는 저도 모르게 저보다 조금 더 작은 손톱을 응시했다.

“난 눈 늦게 왔으면 좋겠는데.”

“왜? 눈 오면 연재 네 생일 다가온다는 거잖아.”

“난 눈 내리는 거 싫어.”

우연재는 뺨을 찡그렸다. 여태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곰곰이 고민해 보니 싫은 것 같았다. 올해 눈이 늦게 왔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눈이 아주아주 늦게 와서…….

문서윤 첫사랑 안 이뤄졌으면 좋겠다.

* * *

“서윤아. 너 피아노 칠 줄 알아?”

“응. 왜?”

“멋지다! 한 번 쳐 봐.”

“선생님한테 쳐도 되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내가 말할게!”

우연재는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홀랑 사라지는 제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블록을 내던졌다. 제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옮긴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문서윤에게는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

‘내 친구는 문서윤뿐인데.’

문서윤은 아니었다.

“왜 자꾸 다른 애들이랑 놀지.”

부쩍 짜증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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