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50)화 (50/139)

50화

“서윤아.”

“응?”

“손.”

문서윤이 집에 놀러 온 날이었다. 우연재는 앉아 있는 친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곱 살이 됐는데도 아직 덜 큰 문서윤이 꼬물꼬물 손을 잡아 왔다.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섰다.

“어디 가?”

“뒤뜰에.”

날씨가 좋아 밖에서 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몸에 흙이나 나뭇잎이 닿는 건 질색이었지만, 문서윤은 풀이나 열매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니 제가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앞서 걷자 문서윤이 졸랑졸랑 따라왔다.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연재는 힐긋 하늘을 올려다보다 커다란 나무 밑으로 문서윤을 이끌었다.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그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커다란 나무는 약한 빗줄기를 막아 주기에 충분했다.

“비 온다. 하늘 맑은데 왜 비 오지?”

빗물을 받으려는 듯 문서윤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연재는 조그마한 손 우물에 고이는 빗방울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답을 일러 주었다.

“이거 여우비야.”

“여우비?”

문서윤이 그제야 시선을 맞춰 왔다. 비가 튀었는지 뺨이 살짝 젖어 있었다.

“맑은 날 내리는 소나기를 여우비라고 한대.”

“이름 예쁘다. 연재 너는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

“책 읽잖아.”

우연재는 다소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서윤이 다른 아이에게 피아노를 쳐 줄 때 읽은 책이었다.

“똑똑해지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 봐. 난 피아노밖에 칠 줄 모르는데.”

“잘하는 것만 하면 되지. 난 피아노 칠 줄 몰라.”

“우리 집 놀러 오면 쳐 줄게.”

배시시 웃은 문서윤이 무릎을 한데 끌어모았다. 우연재는 무릎 위로 뺨을 기대며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 봤다. 햇빛을 받자 갈색 홍채가 더 또렷한 색채를 머금었다.

“왜?”

“예뻐서.”

왜 그렇게 보냐는 의미로 묻자 문서윤이 무해한 얼굴로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우연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한테는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잘생겼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문서윤의 입에서 나오는 제가 예쁘다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예쁜 건 네가 예쁜 거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보다는 문서윤이 더 예뻤다. 하얀 피부도 동글동글한 인상도 옅은 색채의 머리카락도 전부 예쁘다는 단어에 적합했다.

“아니야. 네가 더 예뻐. 우리 반 여자애들도 연재 네가 제일 예쁘대.”

아닌데. 여자애들이 예쁘다고 하는 남자애는 늘 문서윤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을까 고민하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서윤이 갑자기 입술을 삐죽였다.

“초등학교 입학해도 나랑 제일 친하게 지내야 돼.”

“나 친구 문서윤밖에 없는데?”

우연재는 진심이었다.

“그럼 유치원 친구들은 뭐야? 승우랑 재윤이는?”

“걔들은 그냥 아는 애들.”

문서윤 친구였지, 제 친구들은 아니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서윤은 마음에 드는 대답이라는 듯 또다시 눈꼬리를 접어 배시시 웃었다. 동시에 우연재는 조금 안심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자신과 제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하는 걸 보면 문서윤에게 제일 친한 친구는 저인 모양이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연재 너랑만 친구 할게.”

친구들도 많으면서 나랑만 친구 한다고? 그럼 다른 애들이랑은 안 논다는 의미인가?

우연재는 짧은 고민 끝에 솔직하게 물었다.

“그럼 너 내 거야?”

문서윤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그럼.”

흡족스러운 대답에 우연재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저보다 살짝 짧은 손가락이 그 위로 걸렸다.

“약속.”

우연재는 엉킨 손가락이 아닌 문서윤을 쳐다보다 상체를 기울였다. 입술이 내려앉자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왜 입술에 뽀뽀해?”

뺨이 아니라 입술에 하자 놀랐는지 문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내 거에는 이렇게 하는 거래.”

우연재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보던 드라마 속에 나온 이야기였다.

“그래?”

순하게 대답한 문서윤이 따라 하듯이 상체를 기울이더니 짧게 입을 맞춰 왔다.

쪽.

갑자기 뽀뽀할 줄은 몰랐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던 우연재는 뒤로 물러서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어, 비 그쳤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는 어느샌가 그친 채였다. 손가락을 거느라 뒤엉킨 손을 문서윤이 잡아끌었다. 우연재는 엉겁결에 그 뒤를 따랐다.

“연재야. 저기 무지개 떴다!”

해맑게 웃은 문서윤이 무지개를 가리켰다. 우연재는 알록달록한 무지개가 아닌 문서윤만 시야에 담았다.

그냥, 웃는 얼굴이 예뻤다.

* * *

우연재는 힐긋 문서윤의 옆모습을 살폈다. 계단을 올라가는 제 소꿉친구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웬 나이 많은 아저씨가 손을 주물럭거린 게 불쾌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허허, 네가 서윤이구나!’

자신을 음대 교수라 칭한 남자는 문서윤의 아버지 이름을 들먹이며 악수를 청해 왔다. 우연재는 문서윤과 오랫동안 맞잡은 남자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렇게 오래 잡고 있을 일인가. 가뜩이나 예술 계열에 종사하는 나이 많은 남자들은 이상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 기분이 배로 불쾌해졌다. 아무리 문서윤이 같은 성별이라 한들, 지키라고 있는 선을 종종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씻는 버릇을 들여 다행이었다. 우연재는 문서윤이 세정제로 뽀득뽀득하게 손을 씻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화장실을 나섰다. 난간을 짚는 손에서는 저와 같은 냄새가 날 듯했다.

하여튼 별 쓸데없는 것들이 꼬인다니까. 피아노 때문에 꼬이는 인간들이라는 걸 알았으나,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술성을 들먹이며 별 같잖은 짓들을 벌이는 인간들이 들끓는 세상이었다. 문서윤이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니 저라도 경계하는 게 좋았다.

우연재는 제 방으로 들어가는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다짐했다.

“뭐야?”

겉옷을 벗어 드레스룸에 걸어 두었을 때였다. 공부방으로 향하자 문서윤이 책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가 미국에 다녀오며 사 온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다. 젤리였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내년에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에게 사다 줄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먹어.”

단걸 좋아하지 않는 저와 달리 문서윤은 아무거나 잘 먹고는 했다. 우연재는 가방을 내려 두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나만 먹을게.”

“다 먹어도 되는데. 나 단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아예 다 가져갈래?”

“아저씨가 너 먹으라고 사 오신 거잖아. 하나만 먹는다니까.”

문서윤이 개별 포장된 젤리를 까 입에 넣었다. 맛있었는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웃겨 우연재는 피식 웃었다. 피아노를 치듯 책상을 두드리던 손이 슬쩍 젤리 쪽으로 향했다.

“더 먹어도 돼?”

“다 먹어도 된다니까.”

“다는 아니고 ……그냥 몇 개 더 먹을래.”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사람은 교복을 입었다. 우연재는 다시 드레스룸으로 가 교복 재킷을 걸어 둔 뒤 돌아와 숙제할 책들을 책상 위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순간 옆에서 의자 바퀴가 밀려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왜 그래?”

순간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찾아왔다. 문서윤이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얼굴은 희게 질렸고 입술은 새파랬다. 다른 손은 목을 더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숨을 쉬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야, 문서윤!”

젤리가 목에 걸린 게 분명했다. 우연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문서윤의 등 뒤로 바짝 붙어선 그는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친구의 다리 사이로 제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책상에 손을 짚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혹시나 옆으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흐윽, 읏, 허억…….”

우연재는 뒤에서 끌어안듯이 문서윤을 껴안았다. 왼손과 오른손을 단단하게 얽은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지르물며 명치와 배꼽 사이를 압박했다.

“씨발.”

돌발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우연재는 팔에 최대한 힘을 실어 파들거리는 옆구리를 조였다. 어지간한 중학생보다 키가 큰 데다, 큰 덩치만큼이나 힘이 세 다행이었다. 배를 압박한 팔을 대각선 방향으로 거세게 당기길 몇 번, 앞에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문서윤. 뱉었어?”

“흐으, 으……. 응. 콜록.”

우연재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혈색부터 확인했다. 뺨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입술은 그럭저럭 붉은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연약하게 떨리는 등을 연거푸 두드린 그는 책상을 꼼꼼하게 훑어 내렸다. 다행히 튀어나온 젤리가 눈에 띄었다.

“잠깐 앉아 있어.”

의자를 끌어와 문서윤을 앉힌 그는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저보다 작은 등을 토닥이는 중이었다.

“아저씨, 저예요. 연재.”

- 응. 뭐 갖다줄까?

일을 봐 주시는 분이었다.

“아뇨. 서윤이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구급차 부를 상황은 아니라 아저씨한테 전화드렸어요.”

- 병원? 무슨 일 있니? 지금 올라가마.

대꾸하려는 순간 문서윤이 교복 셔츠를 잡아당겼다. 습관적으로 등을 토닥이던 우연재는 그제야 시선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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