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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51)화 (51/139)

51화

“병원 안 가도 될 것 같아.”

조그마한 목소리에 미미한 기침 소리가 섞여 있는 듯했다. 우연재는 목을 문지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응시했다.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너 방금 죽을 뻔했어.”

“뱉었잖아. 그냥 앉아서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그리고 누가 이런 걸로 병원 가? 창피하게.”

헐떡이던 문서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냥 네 옆에 있으면 안 돼?”

눈물이 고여 눈가가 발갰다. 우연재는 입술만 달싹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서윤이 어디 아프니?”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아저씨.”

“……죄송한데 물 한 잔만 가져다주세요.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대요.”

문서윤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던 남자가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따뜻한 물 가져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대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병원 가는 거다. 알았지?”

“네.”

우연재는 아래층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힐긋 보다 다시 문서윤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뒤늦게야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학교에서 처치법을 배웠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한 상황이었다.

얘는 도대체 어떻게 젤리를 먹다가 목이 막히지. 저보다 작아서인지 몰라도, 동생이 생기면 이런 기분일 것만 같았다.

고작 젤리 하나에 목이 막히는 것도 그렇고 문서윤은 가끔 지나치게 무던했다. 하긴, 친하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끌려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서윤아, 여기 물 마시렴.”

후다닥 뛰어 올라온 남자가 물컵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머쓱하게 웃은 문서윤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얀 목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꼴깍꼴깍 소리가 나는 게 아직도 어린애 같았다.

역시, 문서윤은 내가 책임져야지.

우연재는 죽을 뻔한 친구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

집에 있는 젤리란 젤리는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 * *

“연재 오랜만이네.”

“엄마가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우연재는 유려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과일 바구니를 병실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웃는 낯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뭘 그런 걸 사 왔어.”

“과일 좋아하시잖아요.”

“고마워. 잘 먹을게. 엄마는 잘 지내시고?”

“네. 다음 주쯤에 들른다고 하시던데요.”

VIP실은 병원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너른 침대에 앉아 살포시 미소 짓는 여자만이 병색이 완연할 뿐이었다. 문서윤 또 울었겠네. 우연재는 어색하게 얼쩡거리는 대신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워진 만큼, 사람들에게 녹아드는 것 역시 자연스러워졌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 보겠다. 그나저나 연재 중학교 교복 입은 건 아직 한 번도 못 봤네.”

“다음에는 학교 끝나고 올게요.”

“다음에도 또 오려고?”

문서윤의 어머니가 농담을 던지듯 장난스럽게 물었다. 우연재는 부러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 끝을 떨어트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한데. 저희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요.”

“어머,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네. 서윤이 때문에 걱정 많은데 연재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아니에요.”

“애가 남자애치고는 너무 물러서……. 요즘 애들 거칠다는데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우연재는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

중학교는 서열이 갈리는 시기였다. 사립 초등학교를 거쳐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으니 집안 수준은 다들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도 엄연히 차이가 존재했다. 물론 서열의 기준이 늘 집안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명백한 위계의 기준은 다양했다.

또래 아이들이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진 만큼 우연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그를 병원에 드나들게 만들었던 기질은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더 도드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크게 문제 될 만한 일은 없었다. 폭력성을 보이는 인격 장애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또래보다 영특한 머리를 이용해 사람을 조금 더 교활한 방식으로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늘 뚱하게 굴던 어릴 때와 달리 다양한 표정을 꾸밀 수 있게 되면서 훨씬 쉬워진 일이기도 했다.

“그래 주면 고맙지. 피아노 치는 것도 그렇고, 일반적인 남자애들 진로랑은 조금 달라서 걱정 많이 했거든.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나 아프면서 애가 차분해지기도 했고……. 예민한 시기라 걱정되네.”

“문서윤 좋아하는 애들 많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애들이랑 잘 지내?”

“네.”

우연재 자신 덕분은 아니었다. 문서윤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중학생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살 만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눈에 띄어서인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놈들이 제법 많았다.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가끔 희한한 것들이 꼬이고는 했다.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라 크게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래저래 거슬리기는 했다.

“저 말고도 친한 애들 많아서 저 맨날 질투하는데.”

진심이었으나 우연재는 농담인 척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말투에서 애교가 느껴졌는지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언뜻 안심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말해 주니까 안심된다. 고등학교는 같이 못 가겠지만……. 그 전까지 부탁할게.”

“네.”

문서윤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건 중학교까지만이었다. 제 미국행은 아주 오래전에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런데 피아노도 유학 많이 가지 않아요?”

“그 부분은 나보다 남편이 더 잘 알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내가 몸이 이래서 고등학생 때는 안 보낼 것 같고……. 대학 들어가고 보내지 않을까 싶은데.”

우연재는 머릿속으로 피아노로 유명한 학교 몇 군데를 추려 냈다. 미국으로 갈 가능성은 낮은 듯했지만 그래도 제가 먼저 외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미국 오라고 꼬실까.’

결정은 문 교수 몫이어도 아버지께 부탁드리면 언질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테다. 순간적으로 치민 욕구를 우연재는 혀를 씹으며 억눌렀다. 미국에서 같이 생활하면 재밌긴 해도 문서윤 인생에 너무 많은 부분을 간섭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다.

“어, 연재야.”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문 교수와 함께 들어서고 있는 문서윤이 보였다.

“연재 왔구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자리에서 일어난 우연재는 사근사근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디 갔다 오나 보네.”

“근처에 베이커리. 엄마가 케이크 먹고 싶다고 하셔서 아빠랑 사 왔어.”

“연재 너도 이리 와서 같이 먹으렴.”

“아, 금방 밥 먹고 와서 괜찮아요. 서윤이랑 잠깐 산책 좀 하다 올게요.”

“그럴래?”

병실 밖으로 나서자 문서윤이 졸랑졸랑 쫓아왔다. 우연재는 힐긋 시선을 내려 제 옆에 선 친구를 응시했다. 또 살 빠졌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는 거 왜 말 안 했어? 미리 말했으면 네 것도 사 오는 건데. 이거라도 마실래?”

“뭔데?”

“아마도 차일걸.”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는 테이크아웃 잔이 들려 있었다.

“봐.”

우연재는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루이보스티인 듯했다. 컵 홀더를 씌우고 있는데도 손바닥이 뜨거웠다.

“네가 고른 거 아니야?”

“아빠가 주문하셨는데…….”

“교수님은 아들 취향도 모르시나 봐.”

“당연히 모르시지. 아빠랑 카페 갈 일 없잖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편의점이 나타났다. 우연재는 그 방향을 향해 고갯짓했다.

“뭐 마시게?”

“시원한 거.”

얼음 컵과 근처의 팩 커피를 대충 집어 든 그는 빠르게 계산을 마친 뒤 건물 밖의 간이 테이블로 문서윤을 이끌었다.

“내가 산다니까?”

“다음에 밥 사.”

테이크아웃 잔 뚜껑을 연 그는 얼음 컵에 담겨 있던 얼음 몇 개를 그 안에 쏟아부었다. 차가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높였다. 뭐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쳐다보는 얼굴이 웃겼다.

“문서윤 고양이 혀잖아.”

“어……. 고마워. 왜 생각 못 했지?”

우연재는 픽 웃으며 남은 얼음 컵에 편의점 커피를 부었다. 아메리카노는 쓴맛이 났다.

“안 써?”

“써.”

“근데 왜 그거 마셔?”

“다른 건 너무 달잖아.”

빨대로 컵을 휘젓자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우연재는 의미 없는 손짓을 반복하며 차를 홀짝이는 친구를 대놓고 관찰했다. 얼음을 많이 넣어 미지근해졌을 텐데도 사뭇 신중한 표정이었다.

“어머니 몸 상태는 어때.”

“그냥 그래.”

“밥 잘 먹고 다녀. 걱정하시던데.”

“잘 먹어.”

“살 빠졌는데.”

“……내가?”

문서윤이 모르겠다는 듯 손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가끔 신기할 정도로 둔할 때가 있는데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저런가.’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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