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교수님이 별말씀 안 하셔?”
“아빠도 정신없으시잖아.”
우연재는 문서윤의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교수님이라는 호칭어를 사용하는 것 역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왜 애를 안 아끼지. 우연재가 보기에 문 교수는 지극한 나르시시스트였다. 성정이 무딘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때때로 우연재는 제가 그보다 더 문서윤을 잘 보살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동갑의 동성 친구에게 품기에는 이상한 생각이었으나, 보살핀다는 단어 외에는 적절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 살 빠지는 것도 걱정하지 않는 아버지라니, 이상하지 않나. 우연재는 턱을 괸 채 연신 빨대로 얼음을 뒤적거렸다.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 건 언제나 그렇듯 문서윤이었다.
“교수님은 도대체 왜 그래?”
“응?”
아, 이건 패드립인가. 우연재는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제대로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별생각이 없는 건지 문서윤은 쉽게 수긍하며 차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우연재는 새삼스레 책임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래된 소꿉친구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건 단순히 그가 눈앞에서 죽을 뻔한 사건 때문은 아닐 테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분명 다른 불순물들이 섞여 있었다.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는 친구를 향한 걱정, 아버지 도리를 다하지 않는 문 교수에 대한 미약한 짜증, 한편으로는 제 인생의 오랜 시간을 문서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세워 두는 계획. 뭐 그런 것들.
“아, 맞다. 와 줘서 고마워.”
차를 홀짝이던 문서윤이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가.”
“엄마 너 오면 은근 좋아하시거든. 엄마랑 내 얘기 해?”
“응. 문서윤 나 말고 친한 애들 너무 많아서 질투 난다고 했는데.”
“뭐래.”
못 믿겠다는 듯 키득거린 문서윤이 이내 조금 멋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그래도 좀 귀찮잖아. 아무리 오래 알았어도 남인데…….”
“남? 존나 선 긋네?”
“아니, 너랑 나 말고. 이모랑 우리 엄마.”
“그건 우리 엄마가 섭섭해하겠는데.”
“……아, 그런가? 이모한테는 말하지 마.”
당황해 팔랑이는 속눈썹을 보아하니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우연재는 턱에 기댄 자세 그대로 고개를 조금 더 깊이 파묻었다.
“맨입으로?”
“맛있는 거 사 준다니까.”
“알았어.”
문서윤은 그제야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다음에…… 학교 끝나고 나랑 같이 오면 안 돼? 너 교복 입은 거 궁금해하시더라.”
“응. 어려운 것도 아니고.”
“고마워.”
“가족인데 뭐.”
우연재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가끔 문 교수의 자리를 뺏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걸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문서윤을 가족으로 편입시킨 게 아닐까 싶었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 ‘교수님 자리 내가 뺏을까?’ 역시 반쯤은 진심이었다. 문서윤은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그러니까, 서윤아.”
“응.”
우연재는 가볍게 빨대를 움직였다.
“나한테서 독립하려고 하지 마.”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 * *
대부분의 감정이 평행 곡선을 그린다 해서 사춘기까지 거세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우연재는 가끔 충동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저와는 별 관계 없는 감정이라 치부해 왔는데 때로는 이성적인 계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부터 나갔다.
“문서윤이 씨발, 자위 안 해 봤으면 네가 대딸이라도 쳐 주게?”
물론 그 후에도 뒤처리는 제대로 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사람 하나를 고립시켜 숨통을 조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 *
“안녕, 연재야. 나 알지?”
“안녕하세요.”
우연재는 저를 아는 눈치인 한 학년 위의 선배를 향해 까딱 고개를 숙였다.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나, 학교에서는 제법 유명 인사였다.
“동생한테 물어봤는데 너 여자 친구 없다며? 나 너한테 관심 있는데, 사귈래?”
또래들이 많이 사귀고 많이 헤어지는 시기였다. 상대를 향한 애정이 충만해 사귀는 건 아닐 테다.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며 사귄다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귀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별 감정 없이 사귀고는 하니까. 성가시긴 해도 때로는 유별나지 않음을 증명해야 했다.
우연재는 턱을 괸 채 문서윤을 빤히 응시했다. 방에서 함께 숙제를 하던 중이었다.
“문서윤.”
“응?”
“나 여자 친구 생겼어.”
갑자기 그런 고백을 해 올 줄 몰랐다는 듯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변했다. 우연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얄팍하게 웃었다.
나도 다른 애들이랑 똑같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 * *
우연재는 여자 친구를 사귈 때마다 문서윤에게 가장 먼저 보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증명의 대상은 늘 문서윤뿐이었으므로.
* * *
똑같이 생긴 교복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누가 매점이라도 갔다 왔나 보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리로 가려던 찰나,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또래보다는 조금 커도 여전히 저보다는 작은 키였다. 입 짧은 문서윤이 저렇게 관심을 갖는다는 건 애들이 몰린 이유가 매점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드물게 호기심이 동해 우연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익숙하게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턱을 기대자 문서윤이 힐긋 고개를 내렸다. 저를 끌어안은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뭐 봐?”
우연재는 그 표정을 확인한 뒤에야 시선이 쏠린 곳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재윤이 여자 친구한테 줄 선물이래.”
“야, 우연재.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존나 예쁘지?”
책상 위에는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화가 있었다. 예쁘냐고 묻는 건 운동화보다는 박스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운 꽃을 말하는 듯했다. 우연재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뭔데, 이건.”
“나 여자 친구랑 이제 100일이잖아. 100일 선물.”
“응, 예쁘네.”
“이 몸의 심미안이란. 여자 친구가 좋아하겠지?”
무미건조한 대답에도 김재윤은 자화자찬하듯 콧대를 높이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런데 왜 신발이야? 야, 김재윤.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것도 모르냐?”
뒤늦게 무리에 합류한 이연주가 신발을 내려다보며 참견했다.
“뭐래.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라. 꽃신 모르냐, 꽃신?”
“그거 군대 갔다 오면서 주는 거 아냐?”
“아, 군대 얘기하지 말라고. 아무튼 꽃신 신으면 좋은 데 간다잖아. 꽃길 걷는다고. 그런 의미로 주는 거야. 하, 존나 멋있지 않냐?”
신발에 별 쓸데없는 의미 부여를 다 하네. 도망간다는 것도 웃겼고, 꽃길을 걷는다는 건 더 웃겼다.
“문서윤. 네 생각은 어때? 너 피아노 치니까 이런 거 보는 눈 있을 거 아냐. 여자 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
느긋하게 턱을 떼어 낸 우연재는 눈꺼풀만 내려 문서윤의 머리꼭지를 응시했다. 질문이 웃겼는지 문서윤이 웃는 소리를 냈다.
“피아노가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좋아할 것 같은데. 여자애들한테 물어봐.”
또다시 주위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놓자 문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매점 가자.”
“지금?”
“응. 목말라.”
“알았어.”
점심시간이라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우연재는 문서윤의 손에 사과주스를 들려 준 후에야 매점을 나섰다.
“너 이번 생일에 신발 사 줄까?”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팩 음료를 든 채 빨대를 씹어 대던 우연재는 느릿하게 눈썹을 끌어 올렸다.
“갑자기? 아까 김재윤 선물 감명 깊었어?”
“아니, 재윤이 선물이 감명 깊었다기보다는……. 그냥, 뜻이 좋잖아. 좋은 데 가라고. 어차피 내후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면 너 미국 갈 텐데. 겸사겸사.”
우연재는 꽉 짓눌린 빨대로 주스를 빨아들였다. 상큼한 음료가 도리어 갈증을 불러일으켰으나 빈 팩에서는 요란한 소리만 났다.
“알았어, 그럼.”
“올해 우연재 생일 선물 고민 끝났다.”
“나도 신발 사 줄게.”
“그러든가.”
“그 신발 신고 미국 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서윤이 키득거렸다.
“알았어.”
살짝 접힌 콧잔등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진심인데.”
“알았다니까.”
우연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장난스러운 대답만큼이나 장난스럽게 걷고 있는 발이 보였다.
* * *
물끄러미 떨어진 시선이 발치에 고정되었다.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문서윤이 머쓱하게 웃었다.
“뭔데.”
나오기 어렵다고 하더라니, 다리가 이 꼴이었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으니 이 모양이 된 건 어제일 테고. 우연재는 내리깐 눈꺼풀을 스르르 끌어 올리며 해명을 요구하듯이 물었다. 문서윤이 민망하다는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넘어졌어.”
“문서윤이?”
뭘 어떻게 넘어졌길래 깁스까지 하지.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격한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더 의아했다. 게다가 제가 알기로는 어제 일정이 피아노 레슨뿐이었다.
우연재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침대 위로 붕대를 감은 다리가 보였다. 통깁스가 아니라 다리 보호대를 착용했는데도 긴바지는 불편한 듯 반바지 차림새였다. 무릎 위로 드러난 다리가 붕대만큼이나 하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