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53)화 (53/139)

53화

“삐끗했는데 손목 다치면 안 되니까…….”

손목을 보호하겠답시고 그냥 넘어졌다가 더 크게 다쳤다는 소리였다. 자기도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아는지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래서 그냥 넘어졌다고?”

우연재는 슬쩍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헛숨이 섞인 목소리에 문서윤이 살살 눈을 피했다.

“신발 사 준다고 약속하자마자 다리가 이 꼴이네.”

“그래도 심한 건 아니래.”

심한 건 아니라 해도 잘못 관리하면 습관적으로 삘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신경 써 줄 만한 어른이 없는 상황이라 더 신경이 거슬렸다.

“금방 풀걸.”

오래지 않아 붕대를 푼다는 말이 구겨진 인상을 풀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보호대를 착용한 다리를 침대 아래쪽으로 내려 둔 문서윤이 괜찮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다리를 붕붕 흔들었다.

“우리 서윤이가 더 오래 고생하고 싶어서 환장했네?”

우연재는 딱딱하고 무거운 보호대를 단번에 낚아채 침대 위에 올려 두며 빈정거렸다. 제가 없는 곳에서 다쳤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학교 가면 애들이 귀찮게 굴겠다.”

핑곗거리가 없었는지 문서윤이 말을 돌렸다. 어쩔까, 고민하던 우연재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미 다친 걸 무를 수도 없고, 주의를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걷기 힘들어서 더 기대 오긴 하겠네. 애들이 목발로 장난칠 거 뻔하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당연히 제게 기대 오리란 사실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애들이 왜.”

우연재는 깁스한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낙서할 것 같은데.”

문서윤이 보호대의 딱딱한 겉면을 건드리며 말했다.

“낙서?”

“저번에 승호 깁스했을 때도 다 달려들어서 낙서하던데? 난 통깁스 아니니까 안 하려나?”

얼핏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친구들이 부르는데도 동참하지 않은 장난이었다.

아직 깨끗하기만 한 보호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우연재는 몸에 힘을 실어 의자를 뒤로 굴렸다. 문서윤의 책상 위로 손을 뻗자 곧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펜이 딸려 왔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다시 바퀴만 굴려 침대로 돌아온 그는 곧장 펜 뚜껑을 열었다. 뾱. 장난스러운 소리가 났다.

“낙서하게?”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문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싫어?”

“딱히 상관은 없는데……. 너 애들이 승호한테 낙서할 때 안 했잖아.”

“문서윤 처음은 내가 해야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우연재는 아무렇지 않게 하얀색 보호대 위로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렇게 쓰면 연서 누나가 나 놀려.”

여자 친구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우연재 거’라고 써 뒀으니 ‘왜 서윤이가 네 거야?’ 하고 놀릴 게 뻔했다. 내 거니까, 하고 심드렁하게 반응하면 옆에 선 문서윤만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를 터였다.

“네 반응 재밌어서 더 놀리는 거잖아.”

“장난은 네가 치는데 누나는 나만 놀리더라.”

문서윤이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우연재의 입버릇 중 하나가 바로 문서윤 내 거 운운하는 소리였다. 워낙 뻔뻔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말하다 보니 다들 또 시작이네, 하고 마는데도 문서윤은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하는 편이라 놀리는 맛이 있는지 괜히 한 번 건드리듯 장난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근래에는 문서윤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챈 듯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그러다 어쩌다 한 번 파드득거리는 게 더 놀릴 맛을 준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것도 그려 줄게.”

키득거리던 우연재는 손안에서 펜을 한 바퀴 굴렸다. 검은색 마카가 하얀 보호대 위에 삐뚤삐뚤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슨 꽃이야.”

“멍청한 짓 했으니까 신발 사 주기 전에 꽃신이라도 신으라고.”

며칠 전 김재윤이 한 말이 떠올라 말하자 문서윤이 작게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우연재 거라는 글자를 본 순간부터 말리기를 포기한 눈치였다.

“내일 애들한테 색칠 공부하라고 해야겠다. 이연주한테 예쁘게 색칠해 달라고 해.”

엉망이 된 다리 보호대가 웃겼는지 결국 문서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연재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문서윤이 눈 밖에서 다쳐 온 바람에 짜증이 치솟긴 했으나 처음은 제가 차지했으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보호대를 푸는 날 제가 산 신발만 신기면 완벽했다.

* * *

우연재는 비행기에서 내려섰다. 2주 만에 밟는 한국 땅이었다. 방학이면 또 모를까 학기 중에는 미국에 다녀오지 않으려 하는 편인데도 간혹 불가피한 일이 생기고는 했다. 그래도 덕분에 문서윤의 생일 선물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저녁 9시를 가리키는 숫자가 보였다. 눈길이 그 숫자에서 미끄러져 아래의 텅 빈 화면으로 향했다.

‘웬일로 연락 없네.’

늘 입국에 맞춰 오는 안부 연락이 없었다.

“벌써 자나.”

먼저 연락할까, 고민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재야!”

우연재는 힐금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잘 다녀왔고?”

“그럼요.”

“캐리어 이리 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지금쯤 씻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연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캐리어를 가져가려는 손길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제가 끌고 갈게요.”

“안 무겁겠어?”

“괜찮아요.”

그때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전화할 심산이었다.

“안에 중요한 선물 있어서.”

서운하다고 칭얼거리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래는 목소리가 돌아올 테다. 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런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지금 갈게.”

- 너 이제야 입국했잖아.

“너 우는데 쌩깔까?”

- ……안 울었어.

우연재는 방금 씻고 나와 부슬부슬해진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 냈다.

“녹음된 거 들려줘?”

아니나 다를까, 문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혼자 있지, 지금.”

- 응.

그럴 줄 알았다. 문 교수는 병원에 있을 테다.

“갈게.”

- 내가 너네 집 가면 안 돼?

“교복 챙겨서 와.”

- 왜…….

“내일 학교 가잖아. 우리 집 왔다가 다시 가게? 그럴 거면 왜 와. 내가 너네 집 가서 자지.”

- 알았어. 가져갈게.

“차 보낼게.”

우연재는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하며 말했다.

- 무슨 차야. 됐어. 택시 타고 갈게.

“저녁은?”

- 안 먹었는데…….

“알았어. 빨리 와.”

곧 전화가 끊겼다. 새까맣게 암전된 화면 위로 짜증스러운 얼굴이 비쳤다.

‘우연재. 나, 흣, 이, 제, 흐윽, 어떡해…….’

도대체 왜 울었지. 2주 동안 별말 없었는데.

기척이 느껴졌는지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연재야, 왜. 배고파?”

“서윤이 온다고 해서요. 애가 저녁 안 먹었다는데, 간단한 거 준비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어, 그래. 서윤이 좋아하는 걸로 준비해 줄게.”

“번거로우실 텐데 죄송해요.”

“아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우연재는 까딱 고개를 숙인 뒤 문밖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문서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가가 발갰다. 눈꼬리로 향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문서윤이 멋쩍게 웃었다. 어머니 때문에 운 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랬으면 여기까지 올 정신도 없었을 테고.

우연재는 문서윤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손에는 과일과 빵이 담긴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침실을 향해 고갯짓하자 문서윤이 망설이다 방향을 틀었다. 우연재는 트레이를 건네준 뒤 친구가 메고 온 가방을 책상 옆에 가져다 놓았다. 곧바로 침실로 돌아가자 얌전히 앉은 채 코를 훌쩍이며 딸기를 먹고 있는 문서윤이 보였다.

우연재는 침실에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를 싫어했다. 이렇다 할 부스러기가 나오지 않는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아무리 아파도 꾸역꾸역 1층으로 내려가 식사할 정도였다. 그러나 문서윤만큼은 예외였다. 꼬꼬마 시절 제 침대에서 과자를 먹는 문서윤에게 화를 냈다가 애를 울린 경험이 있어서인지 예외로 두게 됐다.

“왜 울었어?”

우연재는 의자를 침대 옆에 끌어다 앉았다.

“…….”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문서윤이 힐금 눈치를 살폈다.

“2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가 울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애들과도 친하고, 그사이에 콩쿠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서윤이 울 만한 일이 없는데 도대체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 단정하게 뻗은 눈썹이 어느 순간 찡그려졌다.

“또 이상한 새끼 꼬였어?”

문서윤에게는 희한하게 이상한 새끼들이 많이 꼬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남자애치곤 예쁘장한 외모 때문인 줄 알았더니, 변성기에 들어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술 한다고 지껄이는 종자들은 다 그런가. 저절로 짜증이 몰려왔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학교에 이상한 소문 나서…….”

“소문?”

우연재는 찡그려진 눈썹을 그대로 끌어 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서윤이 이상한 소문에 휘말릴 만한 일이 뭐가 있지, 의문이 엄습했다. 소문이라고 해 봤자 학기 초, 피아노를 치면서도 예중에 진학하지 않아 잠깐 말이 나온 게 전부였다.

“내가……. 꼬신다고 소문났대.”

“뭐? 누구를?”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순간 제 여자 친구와 그 무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제 옆에는 늘 문서윤이 붙어 있으니 여자 친구의 친구들에게 귀여움과 관심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게 꼬신다는 소문까지 갈 일인가?

그 원인을 찾아내고 있는데 문서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둥그런 눈가로 눈물이 고여 들었다.

“……나이 많은 윽, 아저씨 꼬신다고.”

우연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웬 개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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