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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54)화 (54/139)

54화

소문의 진위를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우연재는 몇 마디로 제가 원하는 이야기들을 얻어 냈다.

“씨발, 별…….”

물론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문서윤이 운 것 역시 저를 둘러싼 질 나쁜 소문에 속상해서였지, 그 소문을 들먹이며 악질적으로 구는 인간들 때문은 아닌 듯했다.

“유정 누나 때문에 그랬다고?”

“엉. 그 누나 문서윤 엄청 귀여워하잖아. 근데 상현 선배가 그 누나 짝사랑 중이고. 꼴 보기 싫어서 소문냈다던데. 형들이 그 새, 아니, 선배 찐따 짓 한다고 말해 줘서 알았지.”

“별 같잖은 새끼가 지랄을 다 떠네.”

우연재는 비죽이 입술을 끌어당겼다.

“근데 어차피 믿는 애들도 없을걸? 소문난 것도 문서윤 때문이 아니라 그 선배 등신 같다고 소문난 거잖아. 학교에서는 맨날 너랑 붙어 다니고 학교 끝나자마자 피아노 치러 가는데 뭘 꼬시냐.”

“사진은 무슨 소린데.”

“나도 봤는데 문서윤이랑 그 아저씨 얘기하는 사진이 끝이던데? 근데 원래 피아노로 유명한 사람이라며? 인터넷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던데. 방송도 자주 나오고. 어디더라, 아무튼, 무슨 대학 교수래.”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찍어 별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데 사용한 모양이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정도의 접촉이었겠지만 사진에 담기면 그럴싸하게 보일 테다.

다만 문서윤이 굳이 그런 일을 할 정도로 돈이 급한 상황이 아닌 데다 남자가 유명인이라면 유명인이라 다들 믿지 않은 듯했다. 언론에까지 얼굴을 비치는 교수가 대낮에 교복을 입은 학생을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일 리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학교라는 집단에서 사람 하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원조 교제, 그것도 상대가 같은 남자. 사회가 혐오하는 요소란 요소를 모두 갖춘 소문은 그만큼 질 낮고 더러웠다.

“좆같네…….”

문서윤에게 별 피해가 없는 단순 해프닝이었으나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서윤 요즘 어떤데? 그래도 괜찮아 보이던데. 소문 가라앉은 지도 꽤 됐고.”

“저번에 울던데.”

“걔가? 학교에서는 내색 안 해서 몰랐는데. 하긴, 애가 오죽 착해야지. 야, 씨발. 나는 그런 소문 돌아도 안 운다? 개 빡쳐서 쌍욕이나 하지. 왜냐, 존나 개소리인 걸 아니까. 근데 문서윤처럼 순진한 애들은 놀랄 만해.”

우연재는 다시금 사건의 전말을 곱씹었다. 한마디로 나이도 많은 새끼가 문서윤이 짝사랑 상대에게 귀여움받는 게 질투 나 헛소리를 꾸며 냈다는 소리였다.

덜덜 다리를 떨던 김재윤이 힐긋 눈치를 봤다.

“우연재 눈 돌아갔네.”

우연재는 제 친구를 향해 시선을 떨어트렸다.

“너 보면 은근 문서윤 과보호하더라. 우리 둘이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나 처음에 너 문서윤 좋아하는 줄 알았다니까? 친구 말고. 뭐라고 하냐. 이성적으로? 아, 아니. 이건 동성인가?”

“뭐라는 거야.”

그러잖아도 짜증이 나는데 김재윤의 개소리에 더 짜증이 났다.

“남자가 남자를 어떻게 좋아해.”

진심으로 개소리를 듣는다는 듯 신랄하게 대꾸하자 김재윤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사랑도 번식 욕구야. 동성은 번식하지도 못하는데 같은 성별 좋아하는 게 말이 되냐?”

“와, 이 새끼는 낭만도 없네. 그리고. 버, 번식 욕구가 뭐냐? 진짜 좋아하는 거거든? 막 그런 생각 없거든요?”

“지랄. 호르몬 때문이지.”

사람들은 사랑을 대단한 감정으로 치켜세우곤 하지만, 우연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 역시 본질적으로는 짐승이었다. 번식 욕구를 지닌.

번식하기 위해서는 성적 결합이 필요했고, 성적 끌림이란 결국 호르몬 간의 상호 작용이었다. 인간들이 짐승과 저들을 분리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만들어 냈을 뿐, 허황에 불과한 감정이었다.

과학적인 증거에 로맨틱한 이유를 가져다 대며 반박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우연재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회의적이었다. 유효 기간이 있는 호르몬의 농간일 뿐이었다.

“이 새끼 또 어려운 말 하네. 아무튼, 예전에 그런 줄 알았다고. 너랑 문서윤이랑 소꿉친구인 거 저도 이제 알아요.”

운동장 계단에서 일어난 김재윤이 툭툭 엉덩이를 털어 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뭘.”

“선배랑 싸우기는 좀 그렇지 않냐? 아니, 같은 학년끼리 싸우는 거야 그냥 애들이 다퉜나 보다, 하는데……. 다른 학년이랑 싸우는 건 좀.”

우연재는 눈가를 찡그렸다. 선배에게 주먹질이라니, 잡음에 휘말리는 일은 사양이었다.

“사고 그만 치겠다고 약속해서 나도 몸 사려야 돼.”

“무슨 애들끼리 주먹질한 걸로 사고야. 네가 술을 마시냐, 담배를 피우냐, 죄 없는 애를 때리냐.”

“우리 엄마 나 조금만 엇나가도 쓰러질걸.”

“아이고, 효자 나셨네요.”

우연재는 믿지 못하는 눈치의 친구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얌전히 지내기로 한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리고 우연재는 문서윤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 * *

소문은 쉬웠다.

제가 벌인 일을 친구에게 고백할 정도로 우연재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이 기회에 나이 많은 예술계 종사자들의 접근까지 함께 차단했다. 문서윤이 곤란해졌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 * *

유순한 눈매가 동그랗게 커졌다. 토끼 같은 표정이었다. 문서윤은 얼떨떨한 얼굴로 열다섯 번째 생일 선물을 받아 들었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신발이었다.

“뭐야. 이번에 미국 갔을 때 샀어?”

“응. 생각나서 겸사겸사.”

“이거 애들이 예쁜데 구하기 힘들다고 한 건데……. 잘 신을게.”

우연재는 턱을 괸 채 문서윤을 빤히 쳐다봤다. 서럽게 운 게 언제였냐는 듯, 저를 둘러싼 헛소문은 새까맣게 잊은 눈치였다. 성정이 순해서인지 쉽게 상처받는 만큼 또 쉽게 잊어서 다행이었다.

“신을 때마다 내 생각 해.”

“알았어.”

가볍게 말하자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서윤이 해사하게 웃으며 신발이 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신어 봐도 돼?”

“응.”

순순한 대답에 문서윤은 곧장 운동화를 신었다. 옅게 달아오른 뺨에서 들뜬 기색이 잔뜩 묻어 나왔다. 우연재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문서윤에게 직접 언질을 들은 적은 없어도 발 사이즈를 가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상대로 운동화는 딱 맞았다.

쏙 들어간 발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문득 하얀 발목이 시선을 잡아챘다. 톡 튀어나온 아킬레스건을 손에 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운동화 하나일 뿐인데도 직접 골라 사 온 물건을 신기자 기묘한 만족감이 일었다. 문득 치미는 충동 역시 문서윤이 제가 선물한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워서일 테다.

하얀 운동화는 그만큼 문서윤과 잘 어울렸다.

“문서윤.”

이름을 부르자 문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왜?”

우연재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느긋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냥.”

별 같잖은 것들은 치워 줄 테니까…….

“생일 축하해.”

내 옆에서 편하게 살아.

* * *

우연재는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문서윤 어머니의 장례식날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교복을 입어도 됐지만, 문서윤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을 테니 저라도 맞춰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기껏해야 옷 하나 때문에 혼자 어딘가로 동떨어진 느낌을 받으면 힘들 테니까.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만큼 그는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연재는 절을 올리고 향을 피운 뒤에야 제 가장 오래된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펑펑 울고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문서윤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우연재는 말없이 친구를 품에 안았다.

“……안 울었어.”

오열까지는 아니어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주제에 안 운다는 말을 잘도 했다.

귓가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닿아 왔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뒤섞인 음성은 너무나도 가냘파서 곧 스러질 것만 같았다.

우연재는 한참 동안 품을 내준 뒤에야 문서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고작 눈물만으로도 깊고 깊은 슬픔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는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 * *

기척을 내면 침대로 숨어들 게 뻔했다. 그럼 이번에도 얼굴 보긴 그르겠지.

우연재는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소꿉친구가 보였다.

“울었어?”

그답지 않게 외출복을 입은 채 침대에 걸터앉자 문서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안 울었어.”

“얼굴 좀 봐.”

“안 울었다니까.”

우연재는 아래로 떨어진 고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뺨이 조금 축축했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는지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뺨과 달리 만져 볼 수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울었네.”

우연재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슬그머니 깔리는 눈꺼풀을 응시하던 그는 손바닥을 뻗어 잔뜩 부은 눈두덩이를 덮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손이 미지근한 체온으로 물들어 갔다.

“차가워.”

“시원한 거겠지.”

그대로 힘을 싣자 문서윤이 종이 인형처럼 딸려 갔다. 우연재는 그가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댈 때까지 팔을 뻗었다. 밀리는 무게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문서윤 때문에 손에 얼음찜질하고 왔잖아, 나.”

“……진짜야?”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 목소리에 우연재는 얄팍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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