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주말이긴 해도 문 연 약국 있을 것 같은데. 거실로 나가 지갑을 챙겨 든 그는 남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번에 먹은 죽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까닭이었다. 입맛 까다로운 우연재가 편의점 죽을 먹을 리 만무하니, 나간 김에 같이 사 오면 좋을 것 같았다.
밖에 나가 전화를 받으려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순간,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외박한 룸메이트 아냐.
“형.”
문서윤은 신발을 마저 신으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 왜. 외박한 룸메이트?
“형도 주말에 잘 안 들어오면서 무슨 소리예요.”
목소리를 죽인 문서윤은 현관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자 아직 쌀쌀한 공기가 뺨을 덮쳐 왔다.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우연재의 체온이 뜨겁긴 했던 모양이다.
- 원래 잘하던 사람이 한 번 못하면 더 잔소리 듣는 거야. 그나저나 친구는? 괜찮고?
“아, 네. 병원 갈 정도는 아닌가 봐요.”
남태은에게는 진작 다른 친구라고 둘러댄 참이었다. 아픈 친구가 우연재인 걸 알면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했다.
- 그런데 왜? 무슨 일 있어?
“저번에 저한테 죽 사다 줬잖아요. 그거 어디서 샀어요?”
- 죽 사게?
“네. 근처에 약국 있죠?”
- 엉. 잠깐만. 찾아서 보내 줄게.
잠깐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메시지창에 주소가 떴다. 거리를 보니 아무래도 택시를 타는 게 나을 듯했다. 아픈 몸으로 일어났는데 아무도 없으면 섭섭할 테니 빨리 다녀올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 오늘 긱사 들어올 거야?
“약만 사다 주고 갈 거예요.”
- 오냐. 고마우면 들어올 때 맛있는 거 사 와라.
“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화해요.”
문서윤은 마침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죽 만드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는구나. 문서윤은 죽과 약 봉투를 한 손에 든 채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잊을 수 없는 숫자였다.
곧장 주방으로 가 죽을 내려놓은 그는 물과 약을 챙긴 뒤 침실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다.
“어디 갔지?”
곤히 자고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흔적이라고는 어질러진 이불이 전부였다. 우연재의 습관대로라면 일어나자마자 정리했을 텐데, 그런 것치고는 침대 위가 엉망이었다.
문서윤은 사이드 테이블에 약을 내려놓은 뒤에야 물소리를 알아챘다.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우연재의 깔끔함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싶었으나, 묘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욕실로 걸음을 옮긴 그는 노크를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뭔가…….’
샤워하고 있는데 왜 따뜻한 기운이 없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우연재. 너 지금 뭐 해?”
우연재가 샤워기 아래에 서 있었다. 수증기는커녕, 욕실은 냉골 수준이었다.
열감기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문서윤은 재빨리 뛰어가 물부터 잠갔다.
“누가 감기 걸렸는데 차가운 물로 샤워해?”
느릿하게 깜박이던 눈동자가 스르르 흘러왔다.
“……문서윤이네?”
“뭔 헛소리야. 그럼 누군데.”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샤워기 아래에 선 탓에 몸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문서윤은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수건을 꺼내 건넸다. 우연재는 보송보송한 수건을 받아 들기는커녕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서윤아.”
“왜?”
“또 나 버리고 갈 거야?”
뜬금없는 소리에 문서윤은 눈썹만 찌푸렸다.
“내가 널 언제 버렸어.”
“일어났는데 안 보이네……?”
“너 약 사러 간…….”
“찾으러 가려는데, 씹……. 몸이 마음대로 안 따라 주잖아.”
우연재가 뺨을 씰룩이더니 젖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열 때문인 것 같아서 열 좀 식히려고 했는데 세수로는 정신이 안 돌아와서.”
“……그래서 이 밑에 서 있었다고?”
“응.”
말투도 그렇고, 생각의 흐름도 그렇고 열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했다. 빨리 약부터 먹이고 재워야 할 것 같았다. 찬물 맞은 건 어떡하지. 뜨거운 물 틀어서 몸 좀 녹여야 하나? 우왕좌왕하며 젖은 머리카락부터 닦기 위해 팔을 올리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너 없는 데서 울 수는 없잖아.”
“뭐?”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우연재가 열에 취해 느슨해진 눈매로 입술을 끌어당겼다. 습한 웃음이었다.
문서윤은 순간적으로 멈춘 호흡을 천천히 내뱉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우연재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인 것 같기도 했다.
“…….”
수증기 하나 없는 차디찬 욕실에서 열기에 젖어 습해진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게 됐다.
제 앞에서만 울겠다는 말이 지나치게 특별하게 들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연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또다시 착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야, 또.”
문서윤은 말을 얼버무리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샤워기 레버 방향부터 바꿨다. 이대로 있으면 열이 더 심하게 오를 텐데 계속해서 대치 상태에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제 손목을 쥐고 있는 우연재의 손이 차게 식어 얼음장 같았다. 그대로 두면 지독하게 앓을 터였다.
“그리고 손 좀 놔.”
아픈 애가 왜 이렇게 힘이 세지. 하긴, 차가운 물 아래에 멀쩡히 서 있을 정도면 어지간한 체력이 아니었다.
“놓으면 다른 새끼한테 갈 거잖아.”
“아니, 뭔 소리야. 다른 새끼는 또 누구야? 어디 안 간다니까.”
도대체 뭐에 꽂혀서 이상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열에 잔뜩 잠긴 눈동자가 흐무러졌다.
“나 안 버릴 거야?”
“내가 널 왜 버려. 약 사러 갔다 왔다니까?”
진실을 가늠하듯 빤히 내려다보던 시선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길 반복했다. 손목을 쥔 악력은 같은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물러났다. 차가운 체온은 떨어져 나갔으나 잡혀 있던 손목은 도리어 홧홧한 기분이 들었다.
“물 튼다?”
문서윤은 물이 떨어지는 방향에서 비스듬히 비켜서도록 우연재를 끌어당긴 뒤 샤워기를 틀었다. 곧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온도를 확인한 뒤에야 우연재를 그 아래 서도록 만들었다. 정신없는 사람을 쏟아지는 물 아래에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어깨만 적시는 정도였다.
“안 아프던 애가 아프니까 더하네. 옷 앞에 갖다 둘 테니까 씻고 나와. 내 말 알아들었어?”
“안 갈 거야?”
“안 간다니까. 계속 이러면 가고. 네가 애야?”
아침에도 이상한 소리 하더니 오늘따라 왜 이러지. 문서윤은 얼핏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졌다.
“알았어.”
우연재가 물에 잔뜩 젖은 티셔츠를 벗으며 대답했다. 뜬금없다면 뜬금없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에 문서윤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맨몸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샤워할 정신 있는 거 맞아? 옷 앞에 가져다 둔다.”
“응.”
욕실이라 목소리가 울렸다. 우연재는 여전히 잠에 취한 듯한 말투였다. 문서윤은 커다란 손이 바지로 향하는 걸 보자마자 어색하게 등을 돌려 욕실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조심스레 문을 닫은 그는 곧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멀거니 멈춰 섰다. 우연재의 맨몸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이었다.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말이 연신 귓가를 울렸다.
“열 때문에 정신없어서 저러나.”
평소 잔병치레가 없는 사람은 한번 아플 때 크게 아프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저러는지도 모르겠다.
문서윤은 한숨을 삼키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우선 옷부터 가져다준 뒤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을 먹일 생각이었다. 재울지 병원에 데려갈지는 우연재의 상태를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드레스룸에 들어선 그는 익숙하게 옷을 챙겼다. 우연재의 오피스텔을 방문하는 건 오늘이 고작 두 번째였지만, 어려서부터 본가에 드나든 덕에 옷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긴 옷 입어야 하나. 반팔을 챙겨야 할지, 긴팔을 챙겨야 할지 고민하던 문서윤은 결국 무난한 후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으니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우선일 듯했다. 트레이닝복 바지까지 꺼내 든 손은 서랍 앞에 가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속옷……. 챙겨야겠지.’
친구에게 속옷을 챙겨 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괜히 목이 꺼끌꺼끌해졌다. 그렇다고 옷만 가져다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문서윤은 조심스레 서랍을 열어 속옷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만지면 안 될 것을 만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재빨리 꺼내 옷으로 감싸고 나서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 뒤로는 환자를 두고 지나치게 의식한 것 같아 자괴감까지 밀려들었다.
“하…….”
문서윤은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헝클이고는 드레스룸을 나섰다. 욕실 앞에 옷을 내려놓으며 귀를 기울이자 미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소리가 바뀌는 걸 보면 샤워기 아래에서 쓰러진 건 아닌 듯했다.
다시 침실로 향한 그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물컵과 약을 챙겨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아파도 침대에서는 무언가를 먹지 않는 우연재의 습관 때문이었다. 죽은 식탁에서 먹을 테니, 약도 그때 함께 먹일 생각이었다.
“죽 식으려나.”
용기에 손을 대자 뜨거운 감각이 전해져 왔다. 우연재가 씻고 나오면 적당히 식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도 뭣해 열감기나 검색해 볼까, 싶어 핸드폰을 켜자 타이밍 좋게 알림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