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남태은이었다.
[언제 와?]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문서윤은 답신을 보냈다.
[친구 지금 일어나서 약 먹이고 가려고요. 필요한 거 있어요?]
[담배 같이 피울 사람 구함]
담배라는 단어에 문서윤은 입꼬리를 매만졌다. 우연재에게 들킨 이후 언제 또 담배를 피웠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끊은 것도 아니고 계속 피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다.
형 혼자 피워요, 하고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핸드폰을 내려 두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나왔는지 우연재가 멀뚱히 서 있었다. 다행히 챙겨 준 옷을 모두 입은 채였다.
“괜찮아?”
다시 찬물로 씻은 건 아니겠지. 곧장 다가간 문서윤은 조심스레 뺨을 건드렸다. 긴 옷을 입고 있어 건드릴 만한 피부가 얼굴밖에 없었다. 손바닥으로 뜨끈뜨끈한 열이 올랐다.
“따뜻한 물로 씻은 거 맞지?”
“응. ……손 시원해.”
우연재가 뺨을 비벼 왔다. 몽롱한 눈을 보니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내 손이 시원한 게 아니라 너 열난다니까?”
“응.”
“죽 사 왔어. 먹고 약 먹어.”
“알았어.”
고분고분하게 굴 생각인지 우연재가 식탁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문서윤은 팔을 잡아챘다.
“머리부터 말려.”
“귀찮아.”
“……말려 줘?”
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릿하게 깜박이던 눈꼬리가 흐물흐물한 눈웃음을 흘렸다.
“말려 줄 거야?”
“진짜 여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빨리 와.”
문서윤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우연재를 끌어당겼다. 아픈 사람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을 테다.
우연재는 어젯밤처럼 스스로 발치에 앉았다. 곧이어 젖은 머리카락이 허벅지 근처에서 뭉그러졌다.
“기대지 마. 빨리 말리게.”
“응……. 졸려.”
정신없는 사람에게 과한 요구였던 모양이다. 문서윤은 하는 수 없이 우연재가 제 다리에 머리를 기대게 내버려 둔 채 드라이어를 들었다. 자주 치대긴 해도 이렇게까지 정신이 없는 상태로 치대는 일은 드물어 귀찮기보다 신기했다.
‘나한테 맨날 아버지 자리 뺏을까, 얘기하는 게 이런 맥락인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우연재가 저를 가족과 엇비슷한 범주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친구보다 조금 더 가까운 관계였으나 한편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고백할 생각은 없어도 우연재가 저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자각될 때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힘들어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마음대로 접을 수 없는 것처럼, 별것 아닌 일에 혼자 상처를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사이 물기가 걷혔다. 문서윤은 괜스레 발로 우연재의 등을 밀었다.
“빨리 가서 죽부터 먹어.”
귀찮다는 듯 느릿하게 일어난 우연재가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문서윤은 뒷정리를 한 뒤에야 그를 따라갔다. 열이 펄펄 끓는 상황에서도 움직일 정신이 있는지 우연재는 죽을 그릇에 나눠 담고 있었다.
“이거 사러 갔다 왔어?”
“응. 약 찾았는데 안 보이던데. 약국 가는 김에 같이 사 왔어.”
“아……. 마지막으로 남은 거 어제 먹었어. 쓰레기 버렸을걸.”
욕실에서보다는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져 다행이었다. 우연재가 옆에 앉으라는 듯 까딱, 턱짓했다. 같이 먹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문서윤은 그 옆에 앉았다. 앞에 놓인 그릇에는 딱 제가 아침에 먹는 양만큼의 죽이 담겨 있었다.
“잘 먹을게.”
말은 잘 먹는다고 하지만 입맛이 없는지 숟가락질이 느렸다.
욕실에서의 대화를 묻고 싶었으나 문서윤은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 물어봐서 뭘 할까 싶었다. 기억도 못 할 테고 약부터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더 먹어.”
“응. 아픈데 옆에 있어서 좋네……? 나는 문서윤 아플 때 거절당했는데.”
“내가 언제?”
우연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느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직도 열이 안 내려서 그런가. 거절당했다는 말이 퍽 신경 쓰였으나 저를 버리느냐 묻던 때처럼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일 것이다.
죽을 몇 숟가락 더 먹은 우연재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문서윤은 슬쩍 물컵과 약을 내밀었다.
“약 먹기 싫은데.”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노려보자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약을 삼켰다. 물을 마실 때마다 톡 튀어나온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문서윤은 시선을 돌렸다.
“더 잘 거야?”
우연재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를 따라가며 묻자 칫솔에 치약을 짜던 우연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나 자면 가게?”
“자는 건 보고.”
“더 아프면 어떡하지. 친구 없어서 부를 사람도 없는데.”
“뭔 친구가 없어.”
“오피스텔 비밀번호 아는 사람은 너뿐인데.”
양치질을 시작한 우연재가 칫솔을 건넸다. 문서윤은 그제야 지난번에 제가 사용한 칫솔이 그대로 꽂혀 있음을 깨달았다. 칫솔까지 건네줄 정도면 조금 더 있다 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문서윤은 치약을 짜내며 고민했다. 지금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더 아프면 큰일이기는 했다. 우연재 성격에 먼저 나서서 병원에 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시간을 가늠했다. 아직 주말 오전이었다. 다시 잔다고 해도 한두 시간 정도 있으면 일어날 테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그럼.”
결국 문서윤은 우연재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우연재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문서윤은 이마에 슬쩍 손을 대 체온을 확인했다. 아침처럼 펄펄 끓는 열기는 아니어도 여전히 뜨거웠다. 응급실을 가기에는 애매하고 그냥 두고 가기에는 찝찝한 정도였다.
문서윤은 가만히 앉아 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아픈 우연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시간이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던 속눈썹이 야트막하게 올라섰다. 열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천천히 드러나는 눈동자는 전보다 선명했다.
“왜 거기 앉아 있어?”
침대 아래에 있는 게 이상했는지 곧게 뻗은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너 더 아프면 깨워서 병원 데려가려고. 아침에 찬물 틀어 놓고 서 있어서 깜짝 놀랐잖아.”
“찬물?”
“기억 안 나나 보네.”
설핏 찡그려지는 얼굴에 문서윤은 옅게 웃었다. 보기 드문 표정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꿈인 줄 알았는데.”
“뭐야. 기억나? 그래서 내가 따뜻한 물 틀었잖아. 열 더 심해질까 봐.”
“그랬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우연재가 다리를 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나 정확히 뭐 했어?”
“뭐가?”
“찬물로 씻고 있었다며?”
문서윤은 당황스러운 순간을 떠올렸다. 고작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1년 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이성이 날아가다시피 한 우연재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또 버리느니 마느니 했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꿈 꿨어? 그러고 보니까 아침부터 꿈 얘기하던데.”
눈이 마주쳤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우연재가 미간을 찌푸리자 눈썹 위로 홈이 파였다.
“꿈꾸긴 했지. 우리 어릴 때. 네가 나 버리고 가는 꿈 꿔서 그런 말 했나…….”
“내가 널 언제 버렸다고 자꾸 버렸대.”
문서윤은 또다시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럭저럭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으니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플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길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연재라면 성가시게 느낄 테다.
“그런 건 상처받은 사람만 기억한다니까.”
“뭐래. 아, 혹시 몰라서 죽 남은 거 냉장고에 넣어 뒀어. 안 먹을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배고프면 이따 먹어.”
“갈 거야?”
목소리에 가지 말라는 기색이 뚝뚝 흘러넘쳤다. 잡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터라 문서윤은 조금 당황했다.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우연재가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 이제 질려?”
“뭐?”
“내가 버리니, 어쩌니 했다며. 그래서 질리냐고.”
평소처럼 던지는 애교 섞인 농담인가 싶었는데 찡그려진 뺨을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묻는 기색에 문서윤은 또다시 당황했다.
질리냐니. 욕실에서의 대화를 들춰낸 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게는 열에 취한 우연재가 아무 소리나 내뱉은 단순 해프닝에 불과했다.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을 꺼낸 것도 그래서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혀끝만 깨무는데 우연재가 툭 머리를 기대 왔다. 배에 닿은 머리카락이 올려다보는 고갯짓을 따라 새까맣게 흐드러졌다.
“나 질려 하지 마.”
서늘한 얼굴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