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침부터 왜 자꾸 이상한 소리 해?”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을 질려 하지. 가장 먼저 머릿속을 엄습한 건 누군가를 질려 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었다. 굳이 우연재를 향한 짝사랑이 아니더라도.
연인이 아닌 가족 혹은 친구 사이에도 권태기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문서윤은 지금껏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권태기라기보단 조금 복잡한 감정이고.’
오래 함께한 사람에게 싫증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질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네.”
문서윤은 툭 본심을 내뱉으며 우연재의 머리에 약하게 꿀밤을 때렸다. 아프지도 않을 텐데 우연재가 눈을 찡그렸다. 열 오른 뺨 때문인지 제 마음대로 안 돼 뚱한 표정을 짓는 어린애 같았다.
“질리고 말고 할 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다시 자.”
“안 질려?”
“아니, 사람이 왜 질려?”
“그런 거 아니면…….”
우연재가 천천히 머리를 떼어 냈다.
“더 있다 가.”
대놓고 잡자 할 말이 없어졌다.
“어떻게 아픈 친구 두고 매정하게 갈 생각을 하지. 사람 존나 쓸쓸하게.”
이어지는 말은 평소의 우연재다웠다.
“너 아플 때 옆에 사람 있는 거 싫어하잖아.”
문서윤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자주 앓는 편이 아니어서인지 우연재는 아플 때 곁에 사람이 있으면 성가셔하는 편이었다. 17년 동안 봐 왔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제 나이 먹어서 외로움 타나 보지.”
외로움이라는 단어에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게 됐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언뜻 머릿속을 스쳤다. 감정적으로 약해졌을 때 몸까지 아프니 어리광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감정적으로 약해진 상태라 그답지 않게 아픈 걸지도 모르고.
“……알았어.”
그리고 문서윤은 아픈 친구를 홀랑 두고 갈 정도로 마음이 모진 편은 되지 못했다.
알았다는 답이 떨어지자 우연재는 살살 눈꼬리를 접더니 만족한 사람처럼 다시 침대 위로 누웠다. 문서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려 먹을 거 있으면 부려 먹든가.”
“내가 너를 왜 부려 먹어.”
픽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스며들었다.
“얼굴 보려고 잡은 건데?”
“……내 얼굴 봐서 뭐 하게?”
“군대 가 있을 동안 못 본 거 봐야지.”
“이제야?”
헛숨을 흘리며 묻자 우연재가 느슨히 웃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아파? 생각보다 열 심한 것 같던데.”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프레임에 등을 기대자 우연재의 시선이 비스듬히 올라왔다.
“아픈 데를 막 찌르네……? 바람맞았다니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더 안 물어볼게. 미안.”
아프긴 아팠구나. 문서윤은 괜히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친구에게 던지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진 것 같아 속이 불편해졌다. 동시에 또다시 자괴감이 엄습했다.
사실은 아픈 이유보다, 헤어지고 난 뒤 속앓이를 했는지가 궁금해 질문을 던진 것만 같아서.
‘진짜 최악이다, 나.’
구질구질한 마음에는 넌더리가 났다.
“왜, 물어봐도 돼.”
마음을 무겁게 만든 당사자가 별것 아니라는 듯 운을 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물어보는데 대답해 줘야지. 왜 차였는지 궁금해?”
“됐어.”
문서윤은 눈이나 감으라는 의미로 손을 뻗어 열기가 고인 눈꺼풀을 덮었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손바닥을 스치자 간질간질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피부로 스며드는 간지러움과는 별개로, 기분은 진창이었다.
어쩌다 헤어졌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떤 주제이든지 간에 짝사랑 상대의 애인에 관한 이야기는 외면하고 싶었다. 연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게 괴롭긴 했지만, 그렇다고 헤어진 이야기를 들으며 안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만하는 것 같아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상대에게도, 힘들어하는 친구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김현승이었으면 지금쯤 나 놀리느라 정신없을 텐데.”
“너 아픈 거 알면 안 놀릴걸, 아마. ……나중에 놀릴 수는 있겠다.”
말을 덧붙이자 우연재가 키득거렸다. 문서윤은 속눈썹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고 나서야 손을 떼어 냈다.
“우연재.”
이름을 부르자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며 고개가 위쪽을 향했다.
“……넌 아프지 마.”
뜬금없는 말처럼 느껴졌는지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역시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문서윤은 혀를 씹으며 이불을 끌어와 우연재의 얼굴을 덮었다. 보이는 건 새까만 정수리가 전부였다.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곁에 아픈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가까운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났다.
그 대상이 우연재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소꿉친구 혹은 오래된 짝사랑 상대라는 관계의 명명은 중요치 않았다. 그냥 우연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어색하게 헤어진 상황에서도 아프다는 말에 여기까지 온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다녀도 감기에 걸리기는커녕 쌩쌩한 사람이 아프다고 하니 겁부터 났다.
새까만 정수리를 쳐다보고 있자 이불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우연재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무서운가 보네, 나 아픈 거.”
“……알면 아프지나 마.”
“나 그렇게 안 아픈데.”
미미하게 붉어진 뺨이 언뜻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순간 문서윤은 직감했다. 아무래도 우연재는 제 심리를 다 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파서 사라지는 일 없으니까.”
마음이 꿰뚫린 느낌이 들어 그는 숨을 옅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리고 나 문서윤이 지겨워해도 옆에 붙어 있을 건데.”
언뜻 듣기에는 장난스러운 농담이었으나, 위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문서윤은 한숨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이래서였다. 우연재에게서 멀어지고 싶어도 멀어질 수 없는 건. 고작 말 한마디에 제 걱정과 조바심을 읽어 내는 사람은 우연재뿐이었다.
“진심인데.”
“알았어.”
“답답해서 도망가지만 마.”
툭 닿아 오는 손이 뜨거웠다.
별로 한 게 없는데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문서윤은 느지막이 식탁에서 일어섰다. 우연재와 막 저녁을 먹은 직후였다.
“갈 거야?”
“저녁이잖아. 너 열도 다 내린 것 같은데 가야지. 남의 집에서 뭐 해.”
그렇게 안 아프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오후부터 열이 내리더니 지금은 미열 정도만 느껴졌다. 아직도 감기 기운이 남아 있는 탓에 기다란 눈매가 느슨히 풀려 있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남의 집? 자꾸 선 긋네? 기숙사는 문서윤네 집인가 봐.”
“기숙사 사니까 기숙사 들어가는 거지.”
“또 찬물에 샤워할까?”
말도 안 되는 협박 아닌 협박에 문서윤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뭔 소리야, 또.”
“기숙사에 뭐 숨겨 뒀어?”
턱을 괸 우연재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삐뚤게 기울어진 고개가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위로 필요하다고 했잖아, 서윤아.”
“…….”
“혼자 있으면 외롭다니까.”
앓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봐 미처 잊고 있던 말이었다. 너무 매정하게 굴었나 싶어 문서윤은 걸음도 옮기지 못한 채 식탁 근처에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아픈 친구를 보러 온 상황이었다면 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니 이대로 가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재는 단순히 아픈 게 아니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그 여파 때문인지 밤새 꼬박 앓은 상태였다.
‘보통 이럴 때는 어떻게 위로해 주지.’
김현승을 떠올리자 쉽게 답이 나왔다. 친구가 실연을 당하면 보통은 함께 술을 마셔 줄 듯했다. 우연재는 술을 마실 만한 컨디션이 아니니, 같이 있어 달라고 조르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단둘이 있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차에서 벌인 설전 때문은 아니었다. 우연재의 공간에 둘만 있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어도 혹시나 실수를 할까 봐 몸을 사리게 됐다.
결국 문서윤은 구차한 핑곗거리를 댔다.
“나 옷 없어. 지금도 찝찝해.”
“옷 있으면, 자고 갈 거야?”
우연재가 느릿하게 일어서며 물었다.
“나한테 있어.”
“뭐가.”
“내 드레스룸에 옷 있다고.”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드레스룸이었다. 문서윤은 당황해 그 뒤를 쫓아갔다.
“뭔 소리야? 네 옷 입으라고?”
“내 옷 입어도 상관은 없는데. 내 옷 입을래? 그게 편하긴 하겠네.”
“아니……. 진짜 내 옷 있다고?”
드레스룸으로 들어선 우연재가 안쪽을 뒤적이더니 옷을 건넸다. 정말 제가 입던 옷이었다.
“이거 너한테 있었어?”
“본가에 두고 간 거. 같이 세탁 맡겨서 깨끗할걸. 찝찝하면 내 옷 입든가.”
스무 살 때 입던 옷이었다. 반사적으로 냄새를 맡자 찝찝함은 고사하고 산뜻함만 느껴졌다.
“……나 군대 있을 때 키 컸어.”
조금 욱하는 마음에 내뱉자 우연재가 가소롭다는 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1센티? 그래도 아직 나보다 작네? 여섯 살 때도 나보다 작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시선은 느긋하기만 했다.
“아니면 내 옷 입으라니까.”
이러다 또 여기서 자게 생겼다. 문서윤은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속옷 없잖아.”
정말 제 옷을 빌려주려는지 드레스룸을 뒤지던 우연재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문서윤.”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이 비죽이 올라갔다.
“속옷은 없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