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아침 일찍 일어난 사람은 없었다. 우연재는 다시금 오른 열에 약을 먹고 잔 탓에, 그리고 문서윤은 저 혼자 조마조마해하다 새벽녘에야 잠든 탓이었다.
“문서윤. 만져 봐.”
“뭘……?”
문서윤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간신히 눈꺼풀만 들어 올렸다. 날짜로만 따지면 사흘째 우연재의 오피스텔에서 머무르는 중인데, 왜 공간에 밴 체향은 옅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익숙한 체향에 연신 잠이 쏟아졌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자 몸을 숙인 우연재가 보였다. 불쑥 이불 아래로 들어온 손이 손목을 낚아챘다. 닿는 체온이 차가워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움찔 팔을 떨었다. 곧 손바닥에 딱딱한 피부가 닿았다.
“뭐야…….”
“열 내린 것 같은데.”
“어디, 봐 봐.”
순식간에 졸음이 반 정도 달아났다.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자 우연재와 눈이 마주쳤다. 침대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문서윤은 붙잡히지 않은 손을 제 이마에 올려 체온을 비교했다.
“내가 너보다 더 뜨거운 것 같은데.”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라 그런지 오히려 제가 더 뜨끈뜨끈하게 느껴졌다.
“나한테 감기 옮긴 거 아냐?”
장난삼아 농담을 던지자 우연재가 불쑥 손을 뻗었다. 이마가 아닌 목덜미였다. 차가운 체온이 맨살을 건드리자 문서윤은 기겁하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잠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자다 일어나서 뜨거운 거네.”
손가락이 장난치듯 목과 이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다 떨어져 나갔다.
“나와. 점심 먹게.”
갑자기 왜 목을 만지냐고 타박할 새도 없이 우연재가 등을 돌렸다. 문서윤은 괜히 서늘한 체온이 닿았다 떨어져 나간 피부를 긁었다. 정말 감기 기운이 옮았는지 뺨으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
잠이 달아나고 나서야 이틀째 우연재의 오피스텔에서 잤다는 자각이 몰려왔다. 옷은 그렇다 쳐도, 속옷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엄밀히 말해 새 속옷이었으니, 제 속옷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구차한 핑계를 댄 상황에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결국 문서윤은 또다시 뻣뻣한 자세로 우연재 옆에 누웠다.
‘같이 있어서 다행이긴 했는데…….’
우연재는 언제 괜찮아졌냐는 듯, 밤사이 또다시 열이 올랐다. 성인 남자가 응급실을 찾을 정도로 심한 열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플 때 옆에 있어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픈 사람이 외로움에 잠식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테다.
“…….”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울한 생각이 이어질 것 같아 문서윤은 고개를 털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우연재가 장난치듯 건드려 댄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뭐야. 네가 하게?”
주방으로 가자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 김치볶음밥 먹고 싶다며.”
“해 주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알아. 간단한 거니까 해 줄게.”
문서윤은 우연재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요리에는 취미가 없는 데다 관심도 없어 도와주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능숙하게 재료들을 볶고 있는 옆모습을 보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풀거렸다.
“옛날 생각난다.”
“언제?”
우연재가 힐금 눈동자만 굴려 쳐다봤다.
“우리 아홉 살 때였나. 아무튼 어릴 때. 나 너네 집 놀러 갔을 때 김치볶음밥 먹고 싶다고 해서 네가 해 줬잖아.”
“다 태워 먹었지.”
“나중에 아저씨한테 혼나고.”
지금 생각해 보면 프라이팬을 태워서가 아니라, 어린애 둘이 불을 써서 혼을 내신 듯했다. 하필 아저씨께서 자리를 비운 시간이었다.
“지금은 안 태워 먹잖아.”
“그렇게 말 안 해도 잘하는 거 알아.”
“아, 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해 달라 소리 안 하길래.”
“너랑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이 있어야 해 달라고 하지.”
“그러니까 자주 와.”
이렇게 얘기할 줄은 몰랐는데. 문서윤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알았어.”
“계란 프라이 먹을 거지?”
우연재가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어쩐지 누그러진 눈매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린 것만 같았다.
“응.”
“앉아. 금방 해.”
도와줄 능력이 없긴 했다.
문서윤은 식탁에 앉아 능숙하게 움직이는 등을 응시했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덕에 팔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꿈틀거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쩐지 민망함이 몰려와 시선을 내리깐 채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릇 하나가 불쑥 시야를 밀며 들어왔다. 완벽한 써니사이드업을 자랑하는 김치볶음밥이었다.
“잘 먹을게.”
우연재가 맞은편에 앉았다. 까치집인 머리카락을 보자 저도 모르게 픽 웃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왜.”
“머리 까치집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은데.”
문서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김치볶음밥 위에 예쁘게 올려진 계란 노른자를 톡 터뜨렸다. 몽글몽글한 노란색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시간의 흐름 같은 것들.
기숙사와 달리 편한 소파와 커다란 TV가 있는 게 문제였다. 문서윤은 해가 저문 뒤에야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깨달았다.
“뭐야. 몇 시야?”
“8시 좀 넘었네.”
저녁까지 먹고 영화를 보다 보니 벌써 이 시간이었다.
“가게?”
우연재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바닥에 앉은 그와 달리 소파에 앉아 있던 터라 고개를 내리자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주말 내내 있는 건 좀…….”
“주말 다 지나갔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어차피 내일 1교시 전공이잖아. 같이 듣는데 여기서 자고 나랑 같이 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주말이 다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이제 와 기숙사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수상해 보일 것 같아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지 뭐.”
이쯤 되자 될 대로 되라 싶어졌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우연재가 몸을 일으켰다. 문서윤은 힐금 그의 움직임을 좇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새로운 영화가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빨리 감기를 하는 대신 가만히 오프닝을 보고 있자 우연재가 돌아왔다. 손에는 와인병과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웬 와인?”
눈을 크게 뜨며 묻자 그가 늘씬하게 뻗은 와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 영화랑 잘 어울려.”
“봤어?”
“응.”
“다른 거 볼까? 또 보면 재미없잖아.”
“상관없는데. 너 좋아할걸.”
“그래?”
우연재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제 취향이라는 소리였다. 멀거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소파가 살짝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옆자리를 사람이 꿰찬 탓이었다.
“근데 너 술 마셔도 돼?”
“와인이잖아. 오늘 약 먹은 것도 없고.”
그런가. 양주를 마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와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문서윤은 엉겁결에 잔을 받아 들었다. 투명한 유리잔은 우연재의 체온 때문인지 다소 미지근했다.
“문서윤 존나 비싸니까 옆에 있어 줄 때 마셔야지.”
“내가 언제 비싸게 굴었다고.”
“가지 말라고 안 했으면 나 버리고 갔을 거잖아.”
서운함이 잔뜩 묻어나는 말꼬리와 함께 잔 안으로 붉은 액체가 흘러들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던 터라 할 말이 없어져 문서윤은 괜스레 와인병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제 보니 라벨이 눈에 익었다.
“이거 저번에 마신 와인인가?”
“응. 꽃신 못 받아서 울면서 마셨잖아, 나.”
“울긴 뭘 울어. 나 혼자 다 마셨는데. 그리고 생일 선물 준다니까.”
우연재가 느슨하게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문서윤은 그를 따라 잔에 입술을 댔다. 단내가 혀끝으로 스며들었다.
“맛있다.”
“너 좋아하는 거라니까.”
대화는 자연스럽게 흐릿해졌다. 문서윤은 와인을 홀짝이며 조용히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잔잔한 음악과 와인, 그리고 피아노에 집중된 로맨스 영화였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상미가 여름 햇살처럼 찬란했다.
문서윤은 가만히 피아노의 운율을 따라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에서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피아노를 누가 정원에 두지, 하는 생각이 일순 스쳤으나 아름다운 장면인 것만은 확실했다.
“피아노 다시 치고 싶다는 생각, 안 들어?”
툭 튀어나온 물음에 문서윤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연재의 시선은 제가 아닌 영화 속 그랜드 피아노에 고정된 채였다. 장면이 새벽으로 바뀌며 얼굴 위로 새파란 빛이 쏟아졌다.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검은색 눈동자가 그제야 도르르 굴러왔다. 투명한 잔에 갇힌 붉은 액체가 살짝 벌어진 입술을 타고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