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잘 모르겠는데.”
취기가 오르는지 머릿속이 약간 몽롱해졌다. 문서윤은 습관처럼 와인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잠시 침묵했다.
피아노를 그만뒀다고 해서 아예 손을 뗀 건 아니었다. 갑자기 진로를 공부로 틀었더니 학업을 따라가기 벅차 계속해서 칠 만한 여유가 없었을 뿐, 그래도 가끔은 건반에 손을 대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피처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힘들 때 피아노를 치면 그 순간만큼은 제가 만들어 내는 선율에 몰입할 수 있었다.
스무 살에도 아주 가끔, 피아노를 치고는 했다.
“생각해 보니까 안 친 지 꽤 오래되긴 했네. 군대 갔을 때는 당연히 못 쳤고……. 본가도 잘 안 들어가니까.”
건반에 손을 대지 않은 지 2년이 조금 넘은 셈이었다. 우연재의 얼굴을 보지 않은 시간과 피아노를 치지 않은 시간이 엇비슷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우스웠다.
“계속 치고 싶다거나, 그만둬서 후회된다거나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됐고.”
우연재의 시선이 다시 영화를 향해 비껴갔다. 문서윤 역시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손 굳어서 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한창 피아노를 치던 때와 비교할 생각은 없었다. 피아노를 그만둔 지도 벌써 7년이나 지났으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7년…….’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감정이 닳고 닳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기도 했다.
마음이 손처럼 굳을 수 있는 종류였다면, 제 홑마음 역시 지금쯤 석화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조금씩이라도 닳아 없어지는 게 가능했을 테다.
“건반 건드리기만 해도 알아서 움직일걸.”
혼잣말에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연재의 목소리가 영화 속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졌다.
“하긴.”
결국 마음도 피아노와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우연재의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 조그마한 행동 하나에 다시금 풀어져 외사랑을 이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짝사랑 역시 습관 같은 거였다.
몸에 배서 본능적으로 이어 갈 수밖에 없는.
* * *
우연재는 제 침대에서 잠든 이를 내려다보다 거실로 나왔다. 제법 도수가 센 와인이라 취해 잠들지 않을까, 한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서윤의 핸드폰이었다. 잠금이 걸려 있었으나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형.’
어제 아침, 잠결에 들은 목소리가 여태 귓가를 찔러 댔다.
‘형도 주말에 잘 안 들어오면서 무슨 소리예요.’
그 뒤를 따라온 건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우연재는 잇새로 지그시 혀를 깨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통화 기록을 확인하자 낯선 이름이 보였다.
태은이형
문서윤의 전화번호에 저장된 이름들 중 제가 유일하게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연상 좋아해서.’
우연재는 아무렇지 않게 메시지창을 열었다. 내용을 확인하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삐딱하게 선 자세로 글자 덩어리들을 읽어 내리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왔다.
[똥강아지. 언제 오냐? 형 외롭다.]
붉은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우연재는 싸늘한 눈길로 비죽이 웃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 * *
문서윤은 푹신한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비운 채 영화를 보며 와인을 마시다가 비몽사몽 하던 상태로 침대로 기어들어 간 덕분에 지난밤에는 푹 잔 것 같았다. 그래도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었는지 약간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운전석을 힐금거리자 습관처럼 핸들을 두드리고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이쪽으로 향하려던 눈동자가 친절한 목소리에 반대편으로 향했다.
“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두 잔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서윤은 우연재가 건네는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차가 부드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잘 마실게.”
그는 제 몫의 바닐라 라테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우연재가 가볍게 웃었다.
“하여튼 착해.”
“뭐가.”
“다른 애들은 그냥 마시니까.”
“……김현승이랑 비교하는 건 좀.”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꾸하자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런데 웬 커피야. 너 커피 잘 안 마시잖아.”
“그냥 오늘따라 단거 마시고 싶어서. 초콜릿 들어가는 음료는 너무 달고.”
캐리어에 담긴 음료는 우연재 몫의 아메리카노와 제 몫의 바닐라 라테였다. 사실 문서윤은 커피를 자주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간혹 마시더라도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라테는 선호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단 음료가 당겼다.
“카페 알바하더니 입맛 변했나.”
“입맛 바뀐 건 아닌데……. 안 마시던 거 마시는 건 그래서일 수도 있겠다.”
문서윤은 짧은 침묵 끝에 뒷말을 이어 나갔다.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문서윤은 후자였다.
어릴 때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아 낯선 것들도 손쉽게 도전하곤 했었는데, 어머니의 병색이 짙어지면서부터는 이상하게 익숙한 것들만 좋아하게 됐다. 익숙할수록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 그 버릇이 취향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음료처럼 매우 사소한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서윤은 마셔 본 차만, 마셔 본 커피만 선택하고는 했다.
‘안 먹어 봤던 거 먹는 건 보통 우연재 때문이었고.’
처음 와인을 마시던 날도 그랬다. 다른 사람이 맥주도 아닌 와인을 마시자고 하면 거절했겠지만, 우연재의 제안은 쉽게 수락할 수 있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믿을 수 있는 존재였을 뿐이다.
문서윤에게는 공고한 믿음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우연재가 제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다는, 다소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알바는 언제까지 할 거야?”
갑작스레 던져진 물음에도 문서윤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답했다.
“올해는 계속할 것 같은데.”
“같은데?”
“내년엔 3학년이니까 취준 해야지.”
핸들이 부드럽게 차를 돌렸다. 혹시나 음료가 쏟아질까 봐 문서윤은 캐리어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기숙사는 어쩌게.”
“올해 말하는 거야? 2학기에도 기숙사에서 살아야지. 1년 단위야.”
새까만 시선이 힐긋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아니, 내년에. 취준 한다며. 본가는 불편할 거 아냐.”
아직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지금 룸메이트는 남태은이라 괜찮지만, 내년에는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지 몰랐다. 사람에 대한 거부감은 없으나 송주아가 툭하면 룸메이트 괴담을 속삭이는 통에 걱정이 되기는 했다.
문서윤은 잠깐 말을 골랐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내년에 생각하게.”
“내년?”
기다란 손가락이 느지막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뭐, 천천히 생각해서 나쁠 거 없지.”
이어지는 말과 함께 차가 멈춰 섰다.
강의실은 언제나 그렇듯 활기찼다. 우연재와 안면이 있는 후배들이 다가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어, 형! 안녕하세요.”
“안녕.”
“금요일에 왜 수업 빠지셨어요? 형 찾는 사람들 많던데.”
문서윤은 우연재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 특유의 북적이는 공기에 둘러싸이자 지난 주말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동떨어진 공간에 내동댕이쳐졌다가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자체 휴강.”
우연재가 전혀 상관없는 이유를 들먹였다. 뻔뻔한 거짓말이었으나 문서윤은 그러려니 했다. 어릴 때부터 약한 모습 내보이길 죽어도 싫어했다.
‘그때는 병원 가기 싫어서 안 아프다고 고집부리는 줄 알았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타인에게 약한 모습을 내비치고 싶지 않아 그랬던 게 아닐까 싶었다.
“하여튼…….”
그게 우연재다워 문서윤은 픽 웃고 말았다.
“왜?”
“아냐. 교수님 들어오신다. 앞에 봐.”
빤히 닿아 오던 시선이 고분고분하게 앞을 향했다.
재미있는 전공 강의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의문이 들었다. 학점 관리는 열심히 하는 편이고 또 수업도 열심히 듣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교수의 실없는 농담에 자세를 약간 흐트러트리는데 우연재가 태블릿 위로 글자를 끄적였다.
〈점심 뭐 먹을까〉
필기체처럼 단정하고 유려한 글씨체였다. 교수의 농담이 은근슬쩍 과거 이야기로 넘어갔다. 문서윤은 그 아래에 글자를 적었다.
〈나랑 먹게?〉
물음표 하나가 그 밑으로 이어졌다.
〈?〉
〈?〉
〈나 친구 없는 거 알잖아〉
〈니가 무슨 친구가 없어.. 이 강의실에 나보다 아는 사람 많으면서〉
〈그건 후배들이고〉
선이라는 글자를 쓰고 나서야 우연재가 김선주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같이 밥 먹자고 했구나. 저나 우연재나 4교시는 공강이었으니 딱 적당한 상대이기는 했다.
〈선... 학식..?〉
문서윤은 선이라는 글자 위로 빗금을 그리고는 그 옆으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정문에 널린 게 식당이긴 해도 점심시간이라 공강 한 시간은 애매했다.
〈알았어〉
짧은 필담이 끊겼다. 교수가 강의 내용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문서윤은 바닐라 라테를 마시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단게 마시고 싶어 주문한 음료였으나, 막상 마셔 보니 생각 이상으로 달아 몇 모금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혀를 녹일 듯한 단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미지근한 온도는 아직 따뜻했다.
강의 내용 필기를 위해 손을 움직이는데 태블릿 구석의 글자들이 시선을 잡아챘다. 불현듯 학창 시절이 겹쳐졌다. 교과서는 모두 버렸으니 이런 자잘한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자료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냥, 왠지 지우기가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