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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62)화 (62/139)

62화

발권기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선 채였다. 문서윤은 메뉴를 훑어보다 옆에 선 이를 건드렸다.

“우연재. 뭐 먹을 건데.”

“아…….”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지 우연재가 느릿하게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너는?”

“나는 그냥 정식.”

“나도.”

“알았어.”

줄은 금세 빠졌다. 익숙하게 식권을 뽑은 문서윤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우연재가 졸졸 쫓아왔다.

“너 학식 마지막으로 먹은 거 언제야?”

“처음 먹는데.”

“뭐?”

“뭘 놀라. 1학년 때 나랑 계속 밖에서 밥 먹은 사람은 문서윤 아닌가 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설마하니 한 번도 안 먹어 봤을 줄은 몰랐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금세 순서가 다가왔다. 문서윤은 밥을 받아 든 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우연재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거 먹을 걸 그랬네.”

“왜.”

“너 입맛 까다로운 거 이제야 생각나서.”

“내가 도련님이야?”

낮게 웃은 우연재가 아무렇지 않게 밥을 떠 입에 넣었다. 도련님 맞으면서, 문서윤은 싱거운 대답을 하는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딱 학식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이었다.

“괜찮은데. 1학년 때 자주 먹을 걸 그랬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입맛 아닌데.”

“그냥.”

우연재가 길게 입술을 늘렸다.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생각나잖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월요일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을 때였다.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찰나 전화가 걸려 왔다. 김현승이었다.

- 야, 문!

입술을 채 떼어 내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 우연재 그 새끼 여친이랑 깨졌다며?

어떻게 알았지? 문서윤은 힐금 우연재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표가 달라 이 시간까지 같이 있을 만한 일이 여태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우연재가 옆에 서 있었다. 다행히 통화음을 크게 하는 편은 아니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어…….”

문서윤은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 술 마시자.

“갑자기?”

- 우연재 그 새끼 놀려야지. 그리고 실연의 아픔은 원래 술로 달래는 거야. 너네 지금 경영대 앞이지?

“지금부터 마시자고?”

- 당연한 거 아님? 나 그쪽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라. 다 왔음!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문서윤은 새까맣게 변한 화면만 멀거니 들여다봤다.

“왜. 김현승 아냐?”

“맞아. 맞는데…….”

우연재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이런 말 해도 되나. 문서윤은 괜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미간을 좁혔다.

“너 헤어진 거 얘한테 말했어? 같이 술 마시자는데.”

“지금?”

“응. 경영대 앞으로 온대.”

순간 새까만 시선이 어깨 너머로 비껴갔다.

“야! 문서윤! 우연재!”

안 봐도 김현승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했다. 우연재를 놀리고 싶은 장난기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을 테다.

“저기 오네, 우리 현승이.”

우연재가 얄팍하게 웃었다.

술집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대학가 근처라 더 그런 것 같았다. 문서윤은 맥주를 홀짝이며 가만히 김현승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도저히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오, 그 씨발 놈들 진짜.”

우연재 실연 경축을 외치던 김현승은 술기운이 돌 때부터 학과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욕을 쏟아 내고 있었다. 집행부 일을 하며 볼꼴 못 볼 꼴을 많이 본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 나한테만 지랄이라니까. 후……. 나이 많은 게 존나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소맥을 마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잔이 빌 새도 없이 채워졌다.

“야, 문. 너는 절대 집부 하지 마라. 알았냐?”

“내년이면 3학년인데 무슨 집부야. 군대 갔다 오자마자 과 활동하는 네가 더 신기해.”

“나도 하기 싫었는데 땜빵으로 들어간 거라니까? 아니, 근데 어떻게 정상적인 인간이 하나도 없냐? 땜빵인 거 알았을 때 튀었어야 하는데.”

문서윤은 새삼스레 제가 지독한 인간을 겪어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불쾌한 인간관계야 살다 보면 생기는 게 당연했지만, 치를 떨 정도로 이상한 사람과 얽힌 적은 없는 듯했다. 카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상 손님이 있긴 해도 대학가 근처라 그런지 심각하게 질 나쁜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우. 너라면 어쩔 거냐.”

“뭐가.”

우연재가 맥주를 마시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너 뒤에서 사람 조지는 거 존나 잘하잖아. 사람 충동질해서 엿 먹이는 거 우연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할걸?”

“우리 현승이가 친구를 이상한 새끼로 몰아가네?”

“지랄하지 마시고요. 내가 널 모르냐? 나 진짜 그 새끼들 때문에 개빡친다니까?”

“음…….”

문서윤은 잔뜩 흥분한 김현승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봐 온 덕에 서로를 잘 알았다.

술을 마시며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는데 음악 소리가 한층 커지더니 주변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우연재가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김현승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문서윤은 그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어디가? 너도 나 버리냐?”

귀신같이 눈치챈 김현승이 눈을 번뜩이며 우는 체를 했다.

“뭘 버려. 우연재 말버릇 닮아 가네. 잠깐 화장실. 손 씻고 올게.”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냐. 내가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를 닮아 간다고?”

문서윤은 못 들은 척하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김현승의 페이스에 맞춰 주다 보니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차가운 물이 닿고 나서야 그나마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취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현실적인 문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연재 차는 언제 돌려주지. 그리고 기숙사 통금 있는데. 남태은은 오늘 기숙사에 없다고 했으니 안에서 문을 열어 줄 사람도 없었다.

문서윤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뒤늦게야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우선 시간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손을 마저 씻고 테이블로 돌아온 그는 핸드폰을 켜 시간부터 확인했다. 지금 나가도 빠듯했다.

“아……. 야, 나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왜!”

김현승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치며 울먹거렸다.

“기숙사 통금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내 자취방에서 자고 가면 되잖아. 존나 섭섭하네, 이 새끼.”

김현승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젓더니 반 정도 남은 맥주잔 위로 알코올을 콸콸 쏟아부었다.

“그러게. 문서윤 존나 섭섭하게 구네.”

우연재가 느슨한 어조로 말을 받으며 턱을 괴었다.

“나랑 현승이 두고 그냥 가게?”

찌푸려지는 눈썹을 따라 속눈썹이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아니, 너네한테 재워 달라고 하기 좀 그렇잖아.”

김현승이 사나이의 우정은 그런 게 아니라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 뒤로 우연재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뭐가 그런데.”

“불편하잖아.”

“나는 너 오는 거 하나도 안 불편한데.”

주변이 온통 시끄러웠으나 우연재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이 뱀이 기어가듯 스르르 올라가며 그 안에 감춘 홍채를 드러냈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

권태로운 제안에 뺨으로 열이 올랐다.

목적지는 김현승의 자취방이었다. 내 소중한 친구들이 제 주변인들의 만행을 알아야 한다며 박박 우긴 김현승 덕분이었다. 그렇게 자취방에서 시작된 3차는 새벽 2시가 넘어갈 즈음에야 끝이 났다.

씻고 나오자 자취방의 주인이 아닌 우연재가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김현승은 침대에 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우연재. 씻어. 나머지는 내가 치울게.”

“김현승 시켜.”

“저는 지금 제 방이 전혀 더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치워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연재가 누워 있는 김현승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대학생 자취방치고는 공간이 제법 넓은 편이었으나 대학가 근처의 건물들이 으레 그러하듯 벽이 얇아 샤워기를 트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머지는 내가 치우겠다고 말한 게 무색할 정도로 뒷정리할 만한 것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문서윤은 우연재가 분류해 둔 재활용 봉투들을 신발장 구석에 가져다 두고는 방을 한 번 훑어 내렸다. 김현승이 꾸물꾸물 일어나더니 침대 아래에 매트를 깔았다. 뒤이어 옷장 안에서 잔뜩 구겨진 채 방치된 이불까지 꺼내 들었다.

“뭐야. 이불도 있어?”

“난 우 새끼와 달리 친구들 자주 부르는 마음 넓은 남자잖아.”

김현승이 앉으라는 듯 매트 위를 손으로 팡팡 쳐 댔다. 문서윤은 더 치울 게 없나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씻기 귀찮다고 투덜거린 김현승이 다시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김현승.”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밖으로 빼냈다. 뒤집어진 시야가 어지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너 우연재 헤어진 거 어떻게 알았어?”

술을 마시면서도 내심 궁금했던 의문이었다. 친한 친구니, 김현승이 알게 되는 것도 당연했지만 벌써 소문이 퍼졌나 싶어 약간은 걱정스러웠다. 이런 종류의 가십은 빨리 도는 편이라 더 그랬다.

‘사실 우연재는 소문나도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긴 한데.’

당사자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을 괜히 저 혼자 신경 쓰는 꼴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쓰였다.

“뭘 어떻게 알아.”

머리에 피가 쏠렸는지 김현승이 제대로 엎드리며 툭 내뱉었다.

“우가 말해 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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