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언제 말했지? 직접 말했다면 오늘일 텐데, 시기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점심시간 때 연락 왔던데.”
그제야 짚이는 부분이 생겨났다. 본관에서 핸드폰 들여다보던 게 현승이한테 연락한 거였구나.
“그러니까 알았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그리고 진정한 친구란 친한 친구가 실연당했을 때 술을 마셔 줘야지. 크, 이게 사나이들의 우정 아니겠냐?”
“그런 것치고는 우연재 차여서 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너.”
김현승이 낄낄거렸다.
“덕분에 오랜만에 셋이서 술도 마시고 좋지, 뭐. 우리 존나 오랜만에 만났잖아.”
“그건 그렇지.”
“아무리 동기들이랑 친해도 고딩 때 친구들은 뭔가 다르다니까. 그리고 같은 과 사람들 씹으려면 너네 만나야 함.”
어쩐지, 하소연이 과하게 길더라니 그동안 꾹 쌓아 둔 게 분명했다. 새삼스럽지만 기숙사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와 다행이었다. 그냥 돌아갔다면 김현승 성격상 섭섭해 삐졌을 것이다.
“아, 맞다. 문. 너 내 자취방 처음 오지?”
“응.”
“원래 더 넓은 데 가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미뤘더니 방 구하기 진짜 어렵더라. 우연재 처음 왔을 때 질색했는데. 너 그 표정 봤어야 돼.”
우연재가 여기 왔었다고? 문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연재도 오늘 처음 아냐?”
“아냐. 저 새끼 가끔 와.”
“그래?”
“엉. 저번에도 밤에 왔었는데.”
의외의 말에 문서윤은 ‘아…….’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우연재는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가지 않는 편이었다. 자취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새내기 시절에도 자고 가라는 동기들의 말을 에둘러 거절하며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덕분에 나도 껴서 빠져나오긴 했었는데.’
특히 김현승의 생활 방식은 우연재가 질색하는 부류라 더 의외였다.
문득 지난 2년간 우연재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대리를 불러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대신 김현승의 자취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으니, 못 본 새에 결벽적인 성향을 많이 덜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면 관계의 공백이 실감 나고는 했다.
“너 지금 의외라고 생각했지?”
“솔직히 말하면.”
“하여튼, 우연재 친구 아니랄까 봐 존나 깔끔 떤다니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네 은근 비슷하다니까? 가끔 우 새끼 습관 너한테 보이면 존나 신기할 때도 있는데.”
우연재의 습관이 제게 보이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가 우연재랑 똑같은 습관이 있다고?”
“엉. 뭐가 있더라……. 씁, 잠깐. 기억 좀 해 보고. 아, 그…….”
“그게 아니라 김현승이 더러운 거겠지.”
우연재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 안에서 말리고 나왔는지 물기 한 방울 찾아볼 수 없었다.
“어, 다 씻었냐. 결벽증.”
“넌 씻기나 해.”
“다른 애들이랑 있으면 안 씻고 그냥 자는데 우연재 때문에 씻는다, 내가.”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며 일어난 김현승이 투덜투덜 불만을 내뱉으며 욕실로 향했다.
“너 진짜 여기서 자게?”
문서윤은 확인하듯이 물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질문은 아니었는지 우연재가 찡그리듯이 눈매를 접었다.
“못 잘 건 또 뭔데.”
“아니……. 솔직히 현승이가 집 깨끗하게 쓰는 편은 아니잖아.”
욕실에서 ‘문서윤!’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여기 너랑 현승이만 두고 나 혼자 집에 가? 나 빼놓고 둘만 놀게?”
우연재가 눈썹 끝을 떨어트리더니 입술을 삐죽이듯 뺨에 힘을 실었다.
“뭘 또 널 빼놓고 놀아.”
“나 없으면 김현승이랑 내 얘기 하면서 씹을 거잖아. 둘이서.”
또다시 ‘어, 맞아! 그러니까 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우리가 너를 왜 씹어?”
우연재가 옆으로 비키라는 듯 고갯짓했다.
“군대 가기 전에 둘이 자주 만났다며. 그러려고 나 빼고 만난 거 아니야? 이제부터라도 감시하게.”
우연재 없이 김현승과 만난 날이 꽤 있긴 하지만, 시끄러운 곳은 질색하는 우연재의 성격 때문이었지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 둘만 만난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일부러 저런 말을 늘어놓는 게 분명했다.
문서윤은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옆으로 살짝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누운 우연재가 팔을 뻗어 제 옆을 툭툭 건드렸다. 누우라는 의미 같았다.
문서윤은 곧바로 눕는 대신 멀뚱히 앉아 있기만 했다. 아무리 어제도 함께 잤다지만 커다란 침대와 자취방 구석을 동일하게 취급하기는 어려웠다. 매트가 깔린 자리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우면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부딪칠 만큼 비좁았다. 옆에서 못 잘 것 같은데.
“도련님. 쇤네가 아래에서 잘 테니 위에서 자시죠.”
양치질에 얼굴만 대충 씻고 나온 김현승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며 한쪽 팔을 침대 쪽으로 뻗었다. 왼손은 가슴 위에 올린 채였다. 우연재를 향한 도련님 호칭에 문서윤은 얕게 웃음을 터뜨렸다.
“샤워도 안 하는 김현승 침대에서 자기 싫은데.”
“이 새끼가 사람이 친절을 베풀어도 걷어차네? 문. 너 위에서 잘래?”
“나랑 잘 거야.”
차라리 김현승 옆에 낑겨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우연재가 팔을 끌어당겼다.
“뭐래. 침대에서 자고 싶어 하는 눈치구먼.”
“문서윤. 위에서 자게?”
갑작스러운 줄다리기에 당황해 문서윤은 눈만 끔벅거렸다.
“나 위로해 주려고 만난 자리인데 둘이 왕따시키네……? 나는 바닥에서 혼자 자고 둘은 사이좋게 침대에서 자고?”
“우연재 저 새끼 또 저러네.”
김현승은 귀찮다는 듯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제일 늦게 누운 사람이 불 끄기.”
하는 짓이 아직도 고등학생 같았다.
“내가 끌게.”
어정쩡하게 서 있던 문서윤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팔을 잡은 손이 부드럽게 떨어져 나갔다.
일반 원룸을 두 개 정도 합친 크기의 자취방은 불을 끄기 위해서는 몇 걸음을 걸어야 했다. 문서윤은 등 뒤로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결정에 대한 유예 시간은 고작 몇 초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불을 껐으나 등을 찌르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문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돌아섰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아래쪽에서 난 걸 보니 우연재가 들어오라는 의미로 이불을 걷은 듯했다.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은데…….’
문서윤은 뺨 안쪽을 깨물면서도 이불이 들춰진 바닥에 누웠다. 우연재 성격상 옆으로 올 때까지 끈질기게 굴 게 뻔해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제 옆에 누울 줄 알았는지 우연재는 피식, 소리 없이 웃었다.
“야,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고딩 때 생각나지 않냐? 수학여행 갔을 때.”
오랜만의 만남에 김현승은 말문이 터진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끌어 올려진 과거에 문서윤은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말을 받은 건 그가 아닌 우연재였다.
“수학여행 때는 각자 침대에서 잤겠지.”
“하여튼 우연재 저 새끼는 산통 깨는 데 뭐 있다니까? 문, 너는 공감해 줘라.”
“어. 그러게. 옛날 생각나네.”
“고딩 때도 재미있었는데.”
“응. 재밌었지.”
문서윤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입시에 허덕이긴 했어도 나름 재미있는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그리고 우리 체육대회 때…….”
김현승과 한참을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 어깨로 딱딱한 체온이 닿았다. 어두워 확신할 수는 없으나 우연재의 이마인 것 같았다. 이어 느릿한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자나 보네. 문서윤은 제게 기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건드리려다 천천히 손을 물렸다. 건드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현승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지다 흐릿하게 끊길 즈음 그는 눈을 감았다.
불면의 밤이 느릿한 숨소리만큼이나 굼뜨게 찾아왔다.
* * *
나흘 만에 돌아오는 기숙사는 며칠 전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남태은이 씻고 있는지 욕실 방향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 둔 채 곧장 침대 위로 쓰러졌다. 외출복을 입은 상태로는 침대에 그대로 눕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남태은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씻고 눕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그래도 어제는 현승이네 집에서 자서 다행이다.’
맨바닥에 매트만 깔고 잔 게 아니라 또다시 우연재의 침대에서 잤다면 기숙사 침대가 불편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사흘 동안 다른 침대를 썼을 뿐인데도, 벌써 그 순간이 익숙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는 밤을 꼴딱 새웠다. 덕분에 우연재가 잠결에 몸을 치대 와도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다.
문서윤은 침대에 쓰러진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이 지난밤을 곱씹었다.
짙게 내리깔린 어둠, 고요한 공간을 침범하는 밖의 소음들, 몸의 뒤척임, 그리고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숨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