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 어둑한 공간에서 우연재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온 감각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고작 몇 센티 앞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뒤덮인 어둠 역시 한몫했을 것이다.
그나마 바닥이 불편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불편한 잠자리를 핑계로 문서윤은 날을 지새웠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면 곤란한 상황이 펼쳐졌을지도 모르니 다행이란 말이 틀리지는 않을 테다. 아무리 아침 발기가 남자의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옆에 친구가 있는데 좆을 세우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다.
걱정 속에서 불편한 잠자리를 핑계로 밤을 꼬박 새웠더니 눈꺼풀이 피곤함을 호소했다.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다섯 시간 눈을 붙이는 게 고작이기는 했다. 무조건 해장을 하고 학교에 가야 한다는 김현승의 주장에 따라 세 사람은 아침 8시부터 순댓국집을 찾았다. 우연재는 질색하는 눈치였으나,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는지 몇 숟가락을 함께 먹었다.
‘문. 너 오늘 첫 수업 몇 교시야?’
‘2교시긴 한데……. 기숙사 들러서 옷 갈아입고 양치질하고 가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순댓국을 퍼먹는 김현승과 달리 우연재는 숟가락을 든 채 빤히 쳐다보는 시선만 보내왔다. 그가 느지막이 입을 연 건 그러고도 몇 초 정도가 흐른 이후였다.
‘기숙사 들어갈 거야?’
‘씻고 수업 가야 하니까.’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꾸하자 곧게 뻗은 눈썹이 설핏 찌푸려졌다.
그게 전부였다. 우연재는 다시 시선을 내려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헤어진 게 어느덧 여덟 시간 전이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데다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수업을 들으려니 체력이 쭉쭉 떨어졌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운 건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졸음은 쏟아지지 않았다.
천장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데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어? 이게 누구야. 자그마치 금요일부터 안 들어온 내 룸메 아냐?”
“형 되게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요.”
문서윤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태은이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고 있었다.
“맛있는 거 사 오기로 했는데 죄송해요.”
“됐어. 나도 오랜만에 혼자 자서 편했지, 뭐. 아, 너 있어서 불편했다는 소리 아니다.”
“알아요.”
얕게 웃으며 대꾸하자 남태은이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놓으며 다가왔다.
“친구는 괜찮아졌고?”
“네. 죽도 생각보다 잘 먹고……. 아무튼 형 덕분이에요. 저 예전에 아팠을 때 형이 죽 사다 준 거 생각나서 연락한 거거든요.”
“거기 맛집이라니까? 아무튼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책상에서 의자를 뺀 그가 그 위로 걸터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문서윤에 대한 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10초 줄 테니까 형 문자 쌩 깐 이유 말해라.”
“……문자요?”
문서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피스텔에서 자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진작 남태은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냈었다. 기숙사를 비우는 게 미안할 일은 아니어도 맛있는 걸 사 가기로 한 약속이 미뤄졌으니 사과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다는 답이 도착한 이후로는 별다른 연락을 주고받은 기억이 없었다.
“저녁? 아니다. 밤인가. 아무튼 저녁 먹을 시간 한참 지나서 언제 올 거냐고 물어봤는데 답장 없던데.”
“저한테 그런 문자 보냈다고요?”
“엉. 너 일요일 오전에 온다고 하면 같이 점심 먹을까 했지.”
문서윤은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저 문자 받은 기억 없는데.”
메시지 함을 뒤졌으나 남태은이 말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안 왔어요.”
“그래?”
남태은이 제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화면을 보여 주었다.
[똥강아지. 언제 오냐? 형 외롭다.]
딱 남태은이 보낼 만한 내용이었다.
“어……. 근데 진짜 안 왔어요.”
“오류 났나 보네.”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었으나 어쩐지 미안함이 찾아왔다.
“형 한가할 때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오, 나 그런 제안 거절 안 한다. 알지? 비싼 거 먹어야지.”
남태은이 얄궂게 웃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저렇게 말해 놓고도 근처에서 먹을 게 뻔해 문서윤은 픽 웃고 말았다.
“흠. 똥강아지가 사 준다는데 얻어먹어야지. 언제 먹지? ……금요일은 좀 그렇고.”
“금요일은 저도 안 돼요.”
“또 친구 집 가게?”
남태은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껄렁한 자세로 물었다. 슬슬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아 문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후배들이랑 밥 먹기로 했어요.”
* * *
“애들? 무슨 애들.”
우연재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그가 쳐다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화면을 보니 메시지창인 듯했다.
“후배들. 조별 과제 끝났잖아. 겸사겸사 밥 먹기로 했어. 내가 사려고.”
어느덧 금요일이었다. 우연재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제 전화를 받은 게 일주일 전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차를 돌려준 일마저 없었다면 고작 일주일 전이 먼 과거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어디서 먹을 건데?”
“아직 안 정했어. 고기 먹지 않을까? 학교 근처에서 먹을 것 같은데.”
원래대로라면 아르바이트에 가야 할 시간이었으나 미리 사장님께 양해를 구한 참이었다. 월요일이 달에 두 번 있는 정기 휴무일이었던 터라 멋쩍었으나, 그녀는 괜찮다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하면 마주치겠네.”
“……누구 만나?”
여자 친구 다시 만나나. 덜컥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선배들이 얼굴 좀 보자고 해서.”
“아…….”
“원래 갈 생각 없었는데……. 뭐, 할 일도 있을 것 같고.”
가벼운 대답이었다. 헤어진 여자 친구와 다시 만나나 싶어 지레 덜컥거린 마음과는 사뭇 대비되는 무게였다.
“아무튼 나도 근처에 있을 것 같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군필자한테 일은 무슨 일이야.”
“왜, 만취할지도 모르는데. 서지은네 만나는 거 아냐? 걔 말술이야. 박예은도.”
“만취하면 네가 어쩌게.”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과한 걱정이었다. 웃음기를 섞어 묻자 우연재가 샐샐 눈꼬리를 접으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어떡하긴.”
가느다랗게 접히는 눈꼬리에 장난기가 매달렸다.
“문서윤 건사해야지.”
밥자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문서윤은 끊임없이 차오르는 술잔을 경이로운 눈길로 관찰했다. 말술이라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서지은은 끝도 없이 술을 마셨다. 저나 강수하보다 배는 더 잘 마시는 것 같았다.
“참. 형. 그거 사실이에요?”
치킨을 먹던 강수하가 목소리를 죽였다. 조심스러운 물음은 옆자리라 그런지 선명하게 들렸다.
“뭐?”
“그으, 그러니까……. 연재 형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는 거요.”
“야. 그걸 왜 서윤 오빠한테 물어봐?”
맞은편에 앉은 서지은이 발을 찼는지 강수하가 ‘악!’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굽혔다. 딱 소리가 들린 것 같더라니, 정강이를 제대로 맞은 듯했다. 제가 다 아픈 기분에 문서윤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쓰럽게 웃었다.
“그니까. 쟤는 다른 선배들이랑 다녔으면 몇 대 맞았을걸.”
“아니, 궁금하니까 그렇지.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더 눈치 없는 거 아니냐?”
벌써 소문이 났구나. 문서윤은 후배들의 대화 소리를 배경 삼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강수하가 소문에 빠른 편이기는 해도 그가 알고 있을 정도면 발 넓은 학과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연애사 관련된 소문은 빨리 날 수밖에 없긴 하지.’
우연재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얘기를 하는 게 편하지는 않았으나 막상 소문의 당사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문서윤은 강수하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내 얘기 아니라서 자세히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헤어진 건 맞는 걸로 알아.”
“헐. 진짜였구나. 뜬소문인가 했는데.”
“연재 오빠 워낙 이상한 소문 많이 몰고 다니니까.”
서지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맥주잔에 맥주를 콸콸 쏟아부었다.
“너무 잘나서 그래. 원래 잘나면 헛소문도 많이 붙잖아.”
그 옆에 앉은 박예은이 말을 받았다.
“그건 인정.”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여태 무릎을 문지르고 있던 강수하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뭔데?”
서지은이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철민 지나가는 거 보여서. 아, 씨발. 이쪽 봤다.”
“한철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때 복학생 테이블에서 진상 떤 선배 있잖아요.”
“아…….”
기억이 흐릿해 이목구비는 떠오르지 않았으나,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강수하가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존나 열받은 표정이던데……. 설마 여기 들어와서 저희한테 화풀이하지는 않겠죠? 이쪽으로 오는 거 같았는데, 제 착각이겠죠? 집부라 제 얼굴 안단 말이에요. 딱 눈도 마주쳤고. 아씨, 바로 일어나서 인사할 걸 그랬나.”
“설마.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마셔.”
설마하니 후배들이 노는 자리에 낄까 싶어 문서윤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술을 건넸다.
“우리 후배님께서 후배한테는 술 잘 따라 주시네.”
그 순간 옆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인 이죽임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리자 언제 왔는지 양손을 테이블에 짚은 채 허리를 굽힌 한철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