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65)화 (65/139)

65화

문서윤은 삽시간에 치민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을 뿐, 남자가 테이블 옆으로 다가온 것도, 방금 전의 빈정거림이 제게 하는 말이라는 것도 이제야 깨달은 차였다.

“야. 너 우연재한테 무슨 소리 했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문서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물끄러미 한철민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무시라고 생각했는지 상대가 바짝 약이 오른 얼굴로 인상을 구겼다.

“저, 선배님. 저 아시죠? 강수하입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 많이 취하신 것 같…….”

어정쩡하게 일어난 강수하가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 새끼가 건방지게 선배들 대화에 끼어들어?”

예의 바른 말투에도 돌아온 건 선배 운운하는 소리였다.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문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랑 나가서 얘기하시죠.”

급작스럽게 피곤이 몰려왔다.

대학가 근처의 술집들이 으레 그러하듯, 주변에는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여럿이었다. 문서윤은 가장 가까운 골목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보는 눈이 많아 여기까지 끌고 오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철민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말을 섞은 건 개강 총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마저도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문서윤은 짧게 숨을 고른 뒤 한철민을 마주했다.

“갑자기 선배님께서 화를 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몰라? 모른다고?”

한철민이 검지를 세워 어깨를 툭툭 밀어냈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술 취했구나. 하긴,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대뜸 후배들의 술자리에 끼어들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추태를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잔뜩 취한 사람의 심기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기에 문서윤은 뒷짐을 쥔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씨발, 그때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쪽 당했는지 알아?”

“…….”

“그깟 술 한 잔 따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것도 복학한 후배들 모여 있는 자리에서 말이야.”

문서윤은 그제야 한철민이 말하는 그때가 개강 총회임을 눈치챘다. 접점이 그때밖에 없기는 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5월도 반쯤 지나가는 시점에서 그때의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때문에 쪽 당할 만한 일이 있던가, 의문이 들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굳은 얼굴이나마 술을 따르려고 했고, 중간에 우연재가 끼어들어 바람을 쐬고 돌아온 게 전부였다.

내가 만만해서 그런가. 순간 떠오른 깨달음을 면전에 대고 말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결국 문서윤은 이번에도 침묵을 지키기를 택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자극해 봤자 저만 손해였다.

“그리고 너 우연재 그 새끼한테 무슨 소리 했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 못 했습니다.”

어깨를 미는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너네 불알친구라며?”

“……네.”

“어쩐지 개총 때 우연재가 존나 싸고돌더라. 씨발, 너네 그 짓 하냐?”

모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마음에 금이 갔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같은 남자끼리 빠구리 뜬다고 하니까 기분 존나 더럽나 보다?”

“선배님.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상대를 깔아뭉개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 분명했다. 동성 간의 관계가 터부시되는 사회에서, 남자 둘을 한 번에 모욕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챙겨 줄 수 있는 일을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는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마다의 통념을 기준으로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우연재가 저를 짓뭉개기 위한 발언에 한데 묶여 이따위의 저급한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취해? 내가? 왜, 지금 헛소리하는 걸로 보이냐? 엉?”

한철민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 맞다. 우연재 그 새끼 계속 여친 있었지.”

“…….”

“너도 아까 여자 둘 끼고 잘 놀고 있더라?”

강수하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말투였다. 대화에 불필요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끌려 나오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후배들 밥 사 준 것뿐입니다.”

“지랄하네.”

문서윤은 아직도 한철민이 왜 저를 몰아세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애먼 데서 뺨 맞고 나한테 분풀이하는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너 우연재한테 무슨 소리 했냐고.”

취한 사람답게 한철민은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씨발,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다른 사람들 있는 앞에서 그 새끼가 나한테 꼽 주냐고! 어?”

문서윤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우연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꼽을 줬다는 사실도 이제야 안 데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한철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자,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한철민이 위협하듯 팔을 들어 올렸다. 번쩍 치켜든 팔에 문서윤은 순간적으로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금방이라도 날아올 듯한 손길이 과거의 어떤 날과 겹쳐 보인 탓이었다.

“씹네? 너도 내가 우습냐?”

이 의미 없는 대화에 질질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한 대 맞아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깨물며 뒤이어질 폭력을 기다리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문서윤 아냐?”

뒤이어 찰칵, 사진을 찍는 작위적인 기계음 소리가 터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슬리퍼 차림의 남태은이 배를 긁으며 서 있었다.

“경영대는 선배가 후배를 막 때리나 보네. 그것도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뭐, 뭐야?”

“뭐긴 뭐야. 아는 형이지.”

남태은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다가왔다. 씩씩거리던 한철민은 저보다 훌쩍 큰 남자의 덩치를 확인하고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사진 커뮤니티에 올려도 상관없죠? 사회 1면에 기사도 날 것 같은데. 한국대 타이틀 재밌잖아. 응?”

“네가 뭔데, 씨발, 얘랑 나 얘기하는 거에 끼어드냐고.”

“그러는 너는 뭔데 내 동생을 건드시냐고.”

남태은이 손가락을 세워 한철민의 어깨를 밀었다.

“한국대 폭력남 타이틀 붙는 순간 신상 털리는 거 알지?”

“씨발…….”

상황이 불리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한철민은 문서윤과 남태은을 번갈아 힐금거리다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악!”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콰당, 무릎이 갈리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길을 울렸다. 남태은이 슬쩍 뻗은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어이쿠, 술에 많이 취하셨네. 혼자 넘어지시고.”

“너, 너……. 두, 두고 봐!”

“한 번만 더 이 짓 하면 신상 박제해 줄게.”

무서울 것 없는 협박에 남태은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흔들었다. 화면에는 누가 봐도 폭력을 가하려는 가해자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한철민은 욕설을 지껄이며 허겁지겁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야. 똥강아지. 너는 그냥 맞으려고 작정했냐?”

얼떨떨하게 서 있던 문서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왜 가만히 있어? 너보다 키도 작더만.”

손을 뻗은 남태은이 팔을 쥐더니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물었다. 문서윤은 뒤늦게야 숨을 내뱉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는지 속살이 다 얼얼했다.

“형, 여기는 어쩌다……. 아니, 그 전에 저희 과 선배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뭘 어떻게 알아. 이 날씨에 경영대 과잠 입고 있던데.”

과잠 입고 있었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옷차림을 살필 겨를이 없어 미처 몰랐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멍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태은이 충고 아닌 충고를 던졌다.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지 마라. 엉? 그러니까 더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넌 생긴 것도 순해서 물로 보이면 손해다?”

문서윤은 픽 웃고 말았다.

“술 취한 사람한테 일일이 반응해 봤자 뭐 해요. 한 대 맞고 끝내 주는 게 낫죠.”

“흠, 생각해 보니까 합의금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근데 너 왜 떨어?”

“네?”

남태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문서윤은 그제야 제가 손을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아무래도 옛날 기억이 떠올라 몸이 반응하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푹 한숨을 내쉰 남태은이 넓게 팔을 벌리더니 포옹을 해 왔다.

“오구오구, 우리 똥강아지. 무서웠어요?”

“놀리지 마세요.”

“내가 전에 학교 폭력 물어봤을 때는 그렇게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진짜 아니라니까…….”

문서윤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미처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이 놀란 것 같았다.

* * *

우연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아픈 게 낫자마자 홀랑 기숙사로 들어가 버린 문서윤 때문에 미미한 짜증이 쌓이고 쌓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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