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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66)화 (66/139)

66화

‘헤어진 것도 일부러 말했더니…….’

김선주와 헤어진 걸 김현승에게 말한 것 역시, 그가 알게 되면 술을 진탕 마시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숙사 통금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제 오피스텔로 갈까 싶었고. 설마하니 김현승 자취방에서 자겠다고 할 줄은 몰랐지만.

문서윤을 기숙사로 보내기 싫은 이유는 명료했다.

우연재는 기숙사라는 공간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가족도 아닌, 20년이 넘도록 모르고 지내던 인간들과 생활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런 장소에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뿐더러 무엇보다 문서윤이 제 시야를 벗어나는 일이 끔찍하도록 싫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세 번은 쉬운데.’

오피스텔로 불러들이는 횟수를 늘려 아예 눌러앉힐 계획이었다. 문 교수 역시 자취는 허락하지 않아도 저와의 동거는 허락할 테다.

“오늘 알바 9시에 끝나지?”

우연재는 빤히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차 물었다.

“아, 나 오늘 알바 안 가. 애들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

“애들?”

쓸데없는 잡담이 길게 늘어진 메시지창을 빠져나오려던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우연재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애들.”

누구를 만나길래 애들이라고 하지.

“후배들. 조별 과제 끝났잖아. 겸사겸사 밥 먹기로 했어. 내가 사려고.”

우연재는 그제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을 억눌렀다. 조별 과제라면 서지은 무리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어디서 먹을 건데?”

“아직 안 정했어. 고기 먹지 않을까? 학교 근처에서 먹을 것 같은데.”

학교 근처. 메시지창에 떠 있던 장소가 언뜻 떠올랐다. 제 이별을 위로해 주느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이며 불러낸 자리였다.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얼굴을 비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래? 잘하면 마주치겠네.”

“누구 만나?”

“선배들이 얼굴 좀 보자고 해서.”

“아…….”

“갈 생각 없었는데……. 뭐, 할 일도 있을 것 같고.”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든 사람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우연재는 순진한 척 무해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나도 근처에 있을 것 같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군필자한테 일은 무슨 일이야.”

문서윤이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몰라도, 군대에 가기 전이나 후나 제 눈에는 여전히 물가에 내둔 어린애였다.

“왜, 만취할지도 모르는데. 서지은네 만나는 거 아냐? 걔 말술이야. 박예은도.”

“만취하면 네가 어쩌게.”

문서윤이 또다시 웃었다. 우연재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유순하게 눈꼬리만 접었다.

“어떡하긴.”

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 매끄럽게 감춰지도록.

“문서윤 건사해야지.”

늘 그렇듯 술자리는 지루했다. 우연재는 제 눈치를 보며 던져지는 농담들을 적당히 받아 주고, 웃고, 대화가 끊길 즈음 떠들었다. 저를 불러낸 이들에게 원하는 이야기를 흘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통은 취업 시장에 대한, 그리 쓸모 있지 않으나 취준생이라면 궁금해할 법한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선배님들께서 저 위로해 준다고 불러 주신 자리니까 오늘은 제가 살게요.”

“와, 우연재 이 새끼. 어깨만큼이나 마음도 넓은 남자야? 잘 얻어먹는다?”

“뭘요.”

괜찮은 척 거절하는 것보단 오히려 이렇게 넙죽 받아먹는 편이 나았다. 우연재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술잔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술잔을 쥐지 않은 손은 턱을 괸 채였다.

“그런데 철민 선배도 계신 줄은 몰랐네요.”

“어엉? 철민이 왜?”

무리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남자가 과장된 어조로 한철민을 찾았다. 우연재는 구석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며 상냥한 눈웃음을 흘려 댔다.

“지난번 개총 때 제 잔 거절하시길래, 저 꼴 보기 싫어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엥? 야. 철민아. 너 연재 잔 거절했냐? 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자 뺨이 손가락에 짓눌리며 눈매가 야트막하게 솟아났다.

“저는 안 예뻐서 그러셨나 봐요. 예쁜 애들 잔만 받겠다고 하시더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한철민의 발언 때문이 아닌, 우연재의 말투에 담긴 빈정거림 때문이었다.

“아.”

우연재는 자세를 바로 하며 미간을 좁혔다. 화려한 외모 위로 곤란함이 서렸다.

“일부러 이 자리에 저 부르신 건 아니죠? 그럼 선배님들한테 좀 섭섭할 것 같은데…….”

“야, 야. 연재야. 우리 사이에 뭐가 섭섭해. 아냐, 아냐.”

“그래, 그런 거 아니다? 아, 한철민 저 새끼 이상한 버릇 못 버리더니 또 실수했네.”

무리에서 한 사람을 쫓아내기란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었다. 상대가 간신히 무리에 끼어 있는 경우라면 더 그랬다.

민망하다는 듯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하는 남자를, 우연재는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우연재는 손목만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쓸데없는 사람들과 오래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주말에 몸이 좀 안 좋았는데 아직도 컨디션이 안 돌아오네요.”

“수업 빠졌다더니 아팠어?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래서 술 안 마셨구나.”

“선배님들이 불러 주시는데 빠지면 안 되죠. 한 잔이라도 마셨어야 하는데, 차 끌고 와서요. 죄송해요.”

남자들이 한결같이 괜찮다는 말을 쏟아 냈다. 우연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면서 결제할 테니까 드시고 싶은 거 더 드시다 가세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고맙다.”

“뭘요. 또 들려오는 얘기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다음에 봬요.”

그린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는 어렵지 않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우연재는 계단을 내려가며 강수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술 마신다며. 어디야?]

[형도 오시게요? 저희 여기 꼬꼬파닭이요.]

[알았어.]

문서윤의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개강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후배들과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주변 인물을 통해서였다. 물론 이보다 훨씬 손쉬운 방법이 있기는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과하지.’

그는 늘 그래 왔듯이 언뜻 치미는 욕구를 통제했다.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라지만, 친구 사이에 지나친 간섭은 이상해 보일 테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보통의 기준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항상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갈수록 어렵네.”

우연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가능하다면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낚아챌 생각이었다.

차는 금세 주차장에 멈춰 섰다. 우연재는 지루한 손길로 핸들을 몇 번 두드리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집 사이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골목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익숙한 인영이 눈길을 잡아챘다.

몇 년을 봐 왔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문서윤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것부터가 직감이었을 테다.

“…….”

가느다란 시선이 집요하게 골목길 안을 훑어 내렸다.

문서윤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였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우연재는 문서윤을 끌어안은 남자가 남태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짜증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문서윤을 가만히 지켜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단순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더러운 먼지 덩어리를 통째로 뒤집어쓴 것처럼 온 신경이 불쾌함에 잠식됐다.

“누가 남자를 저렇게 안지.”

우연재가 신랄하게 비꼬는 대상은 문서윤이 아니었다. 제 소꿉친구를 끌어안은 남자였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임을 감지한 것과 동시에 머릿속이 새빨갛게 점멸했다.

그것은 일종의 위험 신호였다.

제 통제를 벗어난.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멎었다. 지금 나가면 어쩔 건데. 우연재는 느릿하게 잇새로 혀를 씹었다. 마찬가지로 시커먼 동공이 스르르 움직였다. 문서윤이 품에서 떨어져 나오는 모습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홍채에 담겼다.

안겨 있던 순간도, 떨어져 나가는 순간도 익숙해 보인다는 게 더 신경을 갉작였다. 핸들을 쥔 손등 위로 힘줄이 돋으며 동시에 날카로운 이가 살덩어리를 짓눌렀다.

몸을 휘감은 질긴 직물을 풀고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명했다. 잘 감춰 둔 폭력성을 고스란히 내보일 터였다.

‘야, 씨발. 너 절대 밖에서 사람 치지 마라. 빵 간다. 이 새끼는 갈수록 주먹이 매워지냐.’

아버지의 명령 아닌 명령을 따라 복싱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8년째였다.

뒷일은 조금도 겁나지 않았으나, 문서윤이 겁을 낼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만하라고 하겠지.

“하…….”

난데없이 나타나 주먹을 갈기면 제가 아닌 저쪽의 편을 들 게 불 보듯 훤했다. 만약 문서윤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넘어진 남자를 부축해 등을 보이면 저는 끝끝내 참지 못할 테고.

우연재는 또다시 혀를 잇새로 물었다. 지금껏 잘 참아 왔는데, 제 결함을 이렇게 손쉽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문서윤에게.

스스로 정한 선을 넘어선 순간, 돌이킬 수 없음을 그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연재에게는 인내가 아닌, 자신을 향한 통제가 필요했다. 미약한 압력만 가해도 벗어날 수 있는 안전벨트에 자의로 꽁꽁 묶여 있는 것처럼.

“아, 기분 좆같네…….”

다른 누군가가 잘못 건드리기만 해도 끌러질 선이었으나 우연재는 스스로 그어 둔 통제선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한 번만 엇나가더라도 문서윤은 겁을 먹을 테다.

17년간 견고하게 쌓아 온 관계를 그런 식으로 무너트리면 언젠가 후회할 게 분명했다.

골목에서 빠져나온 문서윤이 근처 건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분노의 대상은 어느덧 사라진 뒤였다.

우연재는 고요하게 숨을 골랐다. 핸들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건 메시지가 도착하고도 몇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형 언제 오세요? 저희 이제 일어설 것 같은데]

금요일 밤에 만난 것치고는 헤어지는 시간이 제법 빨랐다. 눈동자만 굴려 문서윤이 들어간 건물을 쳐다본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안전벨트가 툭, 소리를 내며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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