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친구 사이에 누가 섹스를 해?”
“아, 문서윤한테는 내가 다른 새끼들이랑 똑같나 봐. 난 아닌데.”
결코 똑같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감정을 내려놓고서라도.
유일하게 남은 가족보다 더 의지가 되는 존재가 바로 우연재였다. 그래서 더욱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연재를 잘 아는 만큼 머리로는 그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으로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연재가 처음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하…….”
입술이 비틀리며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뜻 헛웃음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씹, 걸레같이 굴러먹다 온 새끼들이랑 붙어먹다가 좆같은 일 당할 거 알면서도 방치할까, 그럼?”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 사이로 익숙한 뼈대가 느껴졌다.
“다른 새끼들보다는 내가 안전하잖아.”
찌푸려진 눈썹 아래로 눈매가 얄팍하게 찡그려졌다.
“애인도 없고.”
“…….”
“성병도 없고.”
섹스에 이어 성병이라는 단어까지 튀어나오자 숨이 막혔다.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그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섹파가 없다 정정하면 이야기가 도돌이표를 그려 댈 게 뻔했다.
결국 우연재에게는 영영 이해받지 못할 감정이었다.
“우연재. 너 진짜 미쳤어?”
“응. 네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은데.”
“하…….”
“왜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지?”
제가 내뱉어야 할 말을 우연재가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소리도 꺼낼 수 없었다. 서운하다는 듯 찌푸려지는 얼굴에 깃든 감정은 티끌 하나 없는 걱정이었다. 완연하게 드러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우연재를 모르지는 않았다.
“고작 성욕 하나 때문에 남자 새끼 만나는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우연재가 소파 아래로 내려간 다리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회색 트레이닝복 위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문서윤은 그제야 부드러운 천이 제 발꿈치를 덮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발바닥을 감싼 러그처럼.
우연재 옷이었구나. 입을 때도, 거실까지 걸어올 때도 자각하지 못한 사실을 느닷없이 깨닫게 됐다. 동시에 텁텁하게 마른 입 안으로 열이 올랐다. 우연재의 오해 때문인지, 그 오해에서 파생된 제 감정에 대한 곡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이 상황 때문인지 스스로도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열이었다.
“문서윤.”
저를 부르는 단어에 문서윤은 간신히 목소리를 꺼냈다.
“왜.”
“차라리 나를 좋아해.”
톡 튀어나온 말에 절로 호흡이 멎었다. 동시에 깊숙이 파고든 손가락이 손가락 골을 짓눌렀다.
“편하잖아, 그럼.”
문서윤은 습관처럼 부어오른 속살을 짓씹었다. 우연재가 내뱉은 좋아하라는 단어가 제 감정과는 다른 궤도의 결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꼭꼭 품고 있는 마음처럼 초라하지만, 의미 있는 뜻은 아니었다. 단순히 저를 도구로 성욕을 배출하라는 의미였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퇴색시키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는데, 짝사랑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연재야. 이건 좀 아닌 것 같…….”
“왜.”
우연재가 눈꼬리를 접었다. 기다란 눈매가 가느다랗게 그어지며 마찬가지로 끄트머리만 올라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 아다 주겠다잖아, 서윤아.”
노골적인 단어에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씹어 대던 이가 삐끗했다. 아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도 문서윤은 멍청하게 눈만 깜박거렸다.
“너 지금 뭐라고…….”
“아다 주겠다고.”
소꿉 친구에게, 그것도 같은 남자에게 아다 운운하는 것치고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표정이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길에도 문서윤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파도 아래로 내비치는 노랫소리에 홀려 저도 모르게 죽음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뱃사공처럼 나긋한 목소리에 현혹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연재가 입술을 벌릴 때마다 하염없이 함락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든, 감정이든, 혹은 제 자아든.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새끼들 말고…….”
손가락 골 사이사이를 침범한 뼈대가 부드럽게 손등을 쓸어내렸다. 문서윤은 움찔거리며 제게 처음을 주겠다는 친구를 응시했다.
“나랑 해.”
당연히 경험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늦된 편이긴 해도, 남녀가 사귀면서 손만 잡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성인이 된 후 우연재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망쳤던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멋모르는 어린애들의 연애와는 많은 게 달라질 텐데, 그 현실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새삼스럽게 저와 소꿉친구가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시기였다. 현실을 자각할 시간이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더는 미성년자 때처럼 붙어 다닐 수 없다는, 우연재에게는 친구보다 더 관심을 쏟는 관계가 생길 거라는, 그런 현실이었다.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해 와서일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쉽잖아.”
우연재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속삭였다. 미세한 움직임이 허벅지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쉽다니, 이미 좋아하는 사람인데.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칠 달싹였다. 혀끝이 여린 속살을 스쳤는지 안쪽으로 뭉근한 통증이 스며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미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되뇔 수 있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라 우연재를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훤한 빛이 화려한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채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릴 때마다 눈매 아래로 짙은 음영이 고이며 그러잖아도 새까만 눈동자를 한층 짙게 만들었다. 허벅지 위로 뒤엉킨 손가락들은 크기와 굵기가 달라 조화롭기는커녕 어지럽게만 느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문서윤은 달싹이던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7년간 품어 온 감정이 고작 성욕으로 취급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마음이 끝 갈 데를 모르고 무너진 것과는 별개로 꽉 눌러 둔 욕심이 분수도 모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응?”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우연재가 허벅지에 뺨을 비비듯 고개를 내리며 답을 재촉했다.
문득 그런 욕심이 들었다. 제가 우연재에게서 오롯이 갈취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지도 모르겠다고.
키스도, 마음도 다른 사람이 먼저 가져갔으니 남은 것은 섹스뿐이었다. 연인의 처음에 집착하는 것만큼 찌질한 짓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재와 저는 연인이 아니었다. 그저 제가 그를 짝사랑하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놓치겠지.
앞으로도 평생을 우연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 이 정도 욕심은 내도 괜찮지 않을까, 자기 합리화가 솟구쳤다. 어쩌면 욕심이 아닌 오기일지도 몰랐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마음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그런 오기.
“진심이야?”
문서윤은 한참의 침묵 끝에야 목소리를 내놓았다.
심각한 그와 달리 우연재는 별일 아니라는 듯 픽,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찡그려진 눈매가 야트막하게 솟아나자 눈웃음을 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너한테 못 해 줄 거 없다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우연재의 처음이었다. 그걸 온전히 제 것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우연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행위일지라도 제게 의미가 있으면 괜찮았다.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이 순간을 기억할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너……. 어떻게 할 건데.”
말을 짓뭉개자 무슨 소리냐는 듯 우연재가 눈썹을 끌어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떼어 냈다. 허벅지 위에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뭘 어떻게 해.”
“세울 수…… 있냐고.”
소꿉친구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문서윤은 불쑥 치밀어오르는 자괴감을 상처받은 마음과 함께 눌러 삼켰다.
지금은 그냥, 욕심을 내고 싶었다. 어차피 이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자괴감과 상처가 비구름처럼 밀려들 테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고작 몇 시간만이라도 그동안 눌러 둔 욕심과 욕망, 갈망과 갈증을 온전히 느끼고 해소하고 싶었다.
“세우면. 할 거야?”
“……해.”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던지 우연재가 눈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언뜻 사나워 보이는 미소였다.
“자위해서라도 세울게.”
먼저 몸을 일으킨 그가 위협적이지 않은 속도로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입술을 짓누르자 또다시 뭉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문서윤이 하겠다는데 못 할 것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