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우연재가 깨어나 당황한 건 둘째 치고 상스러운 단어에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따먹는다는 단어를 먼저 지적해야 하는지 버린다는 말을 먼저 지적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문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거니 우연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짧은 침묵이 오갔다. 뭐라도 대꾸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허리를 휘감은 팔에 힘이 실렸다.
“읏.”
가뜩이나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데다 맥없이 앉아 있던 자세라 약간의 끌어당김에도 몸은 금세 침대 위로 쓰러졌다. 풀썩이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연재 옆에 눕다시피 한 자세였다.
“……왜.”
밤새 운 것치고는 그럭저럭 들어 줄 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서윤은 꼼지락거리듯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아무리 섹스를 했다고 해서 침대에서 우연재를 마주 보는 상황이 의식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래를 세울 만한 체력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거리를 벌리는 건 몸에 익은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섹스 이후라 더 의식됐을지도 모르고.
“더 자.”
우연재가 예상외의 말을 내뱉었다.
“나 졸려.”
조심스레 눈을 맞추자 또렷한 눈동자가 들여다보였다. 졸립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잠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골적인 헛소리에 설핏 미간을 찌푸리자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우연재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졸린 척한 거 들켰어?”
“내가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놔, 일어나게.”
아무렇지 않게 구는 우연재 덕분에 문서윤 역시 어색하지 않게 굴 수 있었다. 괜히 도망갈 생각까지 하며 혼자 의식한 기분이라 멋쩍음이 몰려오는 한편, 안도감이 마음 한구석을 덮쳐 왔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문서윤은 허리를 감싼 팔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우연재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애초에 힘이 있을 때도 떼어 낸 적이 없으니 밀어내지 못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문서윤 존나 매정하네…….”
“뭐가.”
“친구 아다 따먹고 입 닦게?”
아침부터 흘러나오는 노골적인 단어에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첫날밤 보내고 소박맞네, 나.”
첫날밤에 이어 소박이라는 단어까지 튀어나오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섹스가 처음이라고 했으니 첫날밤이라는 단어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소박까지 나올 일인가 싶어졌다.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해 우연재가 일어나기 전에 자리를 피하려던 것뿐이었다.
‘겉보기엔 소박도 틀린 말은 아니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장난스레 흘러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문서윤은 간신히 대답할 만한 말을 찾아냈다.
“소박은 무슨 소박이야. 일어났으니까 가는 거지.”
나름 합당한 인과 관계를 거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재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도대체 어디서 이따위 버릇을 들여왔지?”
싸늘한 낯에 당황해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표정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섹스 끝나면 그냥 갔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섹스 후 처음 맞는 아침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 섹파가 없노라 고백하기가 어려웠다.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기회는 몸을 섞으며 날아간 지 오래였다.
‘이미 섹스까지 했는데 처음이었다고 하면 어이없어하겠지. ……화낼지도 모르겠다.’
섹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제 감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봤을 테고, 설사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몸을 섞겠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 진실을 고하면 모든 게 어그러질 테다. 저와 섹스하고 싶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그때는 친구 관계조차 끝날 게 분명했다.
단순히 욕심을 부린 것뿐인데 이제야 몸집을 불린 거짓말의 크기가 실감 났다.
간질간질한 이름이 붙은 감정을 고작 찰나 간의 욕망으로 더럽혔다는 사실이 자각되자 잠시나마 희석된 자괴감이 불쑥 쏟아졌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를 우연재의 착각을 이용한 사람은 문서윤 저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 자괴감도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옹졸한 방식으로 처음을 탐낸 대가란 이런 것이었다.
“다른 새끼한테 들여온 버릇을 나한테 티 내네?”
“……알았어. 미안해.”
그가 건넬 수 있는 말은 사과뿐이었다. 함께 밤을 보낸 상대가 말없이 침대를 빠져나가려던 상황이었으니 우연재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런 거에 별로 의미 안 둘 줄 알았는데.’
아무리 오래 본 사이라 해도 연인은 아니었으니, 섹스에 대한 로망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지금 이 상황을 로망이라는 간지러운 단어에 빗대어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미안해?”
우연재가 확언을 바라는 어조로 물었다. 언제 싸늘한 기색이 묻어 나왔냐는 듯 긴 눈매가 누그러졌다. 문서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여전히 두꺼운 팔이 허리에 달라붙어 있었으나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나쁘지 않게 표정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미안하면 주말에는 나랑 있어.”
“뭐?”
“해 봤자 이틀이잖아. 어차피 알바는 평일에만 가고.”
어째 주말마다 같이 있자는 소리로 들렸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문서윤 이대로 가면 나는 존나 쓸쓸하겠다.”
몸을 구긴 우연재가 슬쩍 어깨에 고개를 기대 왔다.
“학교도 안 가는데 주말에 혼자 뭐 하지.”
“…….”
“같이 뒹군 침대에서 자위라도 할까?”
“아, 좀.”
이상한 말 좀 그만하라는 뜻으로 어깨 근처에 달라붙은 얼굴을 밀어내자 우연재가 샐쭉이 웃었다. 보이는 건 휘어지는 눈꼬리가 전부였지만, 입술이 손바닥에 닿은 상태라 웃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기분 괜찮은 거 맞나? 문서윤은 슬쩍 손을 떼어 내며 티 나지 않게 우연재의 얼굴을 살폈다. 따먹고 버리냐고 운운한 것도 그렇고, 다른 새끼한테 들여온 버릇 운운한 것도 그렇고, 침대를 빠져나가려던 제 행동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괜찮아 보여 판단을 내리기가 모호했다.
“학교에서도 보는데 주말까지 봐서 뭐 하려고.”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봤는데…….”
야트막하게 휘어지던 눈꼬리가 제자리를 찾으며 가늘게 접혔다.
“일주일에 고작 이틀을 나한테 못 줘?”
아침 햇빛에 잠긴 눈동자에 언뜻 짜증이 스쳤다. 그 기색을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슬쩍 찌푸려진 눈썹은 언뜻 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공 수업 때 보잖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문서윤은 차분하게 말을 골랐다.
“고작 몇 시간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데.”
“뭐가.”
“문서윤 단도리하려고 아다까지 바쳤는데 다른 새끼랑 씹질 하면 기분 더러울 것 같아서.”
우연재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입꼬리에 미소를 매단 채였다. 얼굴은 농담을 던지는 표정인데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어 절로 주눅이 들었다. 문서윤은 그대로 시선을 내리까는 대신 살며시 우연재의 얼굴을 살폈다. 짜증 난 기색을 보면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입술은 실실 웃음을 흘려 대고 있어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파악할 수 있는 건 우연재가 전과 달리 노골적인 단어를 서슴없이 입에 담는다는 것뿐이었다. 아다 운운한 순간부터 놀라서인지 씹질이니 뭐니 하는 단어에도 어제처럼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당황스럽긴 지금도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처음이 아니라 그런지 나름대로 태연한 척 넘어갈 수 있었다.
우연재와 몸을 섞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연재의 말투가 직설적으로 변한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러나저러나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문서윤은 한숨처럼 대꾸했다.
“안 잔다니까…….”
“그럼 내 첫날밤만 날름 먹고 튀게? 진짜 소박맞힐 생각인가 보네.”
“뭘 또 자꾸 소박이래. 알았어. 월요일에 갈게, 그럼.”
애초에 우연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끌어 올렸다. 미소를 매단 입꼬리가 한층 더 깊게 패며 습한 기운을 머금었다.
문서윤은 습관적으로 우연재의 표정을 살폈다. 짜증과 서운한 기색이 서서히 스러지는 듯했다. 다행이라는 미약한 안도감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서윤아.”
“왜.”
“딜도 필요하면 말해.”
언제 태연하게 넘어갔냐는 듯, 문서윤은 또다시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섹스 끝나자마자 쫓아내는 좆같은 매너 가진 새끼들보다는 내가 낫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