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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75)화 (75/139)

75화

걱정과 달리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우연재 덕분이었다. 변함없는 태도에 문서윤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굴 수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산책 겸 근처를 걷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그런 하루였다.

다시금 침대에 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오늘 아침 머릿속을 흐트러뜨리던 꿈이 떠올랐다. 어렴풋한 기억이라 확신할 수는 없으나 꿈속에서도 우연재와 딱 이 정도 거리를 유지했던 것 같다.

“우연재.”

침대에 누운 지도 족히 30분은 넘은 시간이었다. 문서윤은 숨결처럼 가만히 제 침대를 내준 이의 이름을 불렀다. 뒤척이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나지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응.”

아직 안 잤구나.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우연재처럼 모로 돌아눕는 대신 고개만 돌렸다. 어둠이 아닌 햇빛이 들어찬 공간이었다면 서로의 눈동자를 또렷이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시선이 뒤엉켰을 것 같았다.

“그냥.”

“잠 안 와?”

잘 수 있을까. 짝사랑을 깨달은 이후에는 우연재와 한 침대에서 자는 날이면 대부분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는 했다.

‘어제는……. 거의 기절한 거고.’

문득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루 종일 아닌 척 곤두세운 신경이 이제야 경계심을 푸는 모양이었다. 단둘이 있는 상황이라 혹시나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갈까 봐 저도 모르게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상대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혼자 너무 의식했나 싶어 약간 민망해졌다.

‘그냥 호기심이었겠지.’

아니면 동정심 내지 희생정신이든가. 문서윤은 우연재의 제안에 원인이 되었을 감정을 그런 이름들로 결론 내렸다. 중요한 건 제가 또다시 그와 몸을 섞을 일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아냐.”

문서윤은 혼몽하게 처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자라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니었기에 문서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함이 먹구름처럼 몰아닥쳤다.

* * *

우연재가 진심으로 기숙사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월요일이 되어서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기숙사로 가겠다는 당연한 이야기에 그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오피스텔로 올 것을 강권하지는 않았으나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말에는 시간 비워.”

설마 하긴 했으나, 주말에는 나랑 있으라는 소리가 정말로 매주를 뜻하는 줄은 몰랐다. 진짜 매주였나? 물어보기도 뭣해 문서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안 하네.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해?”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이 웃겼는지 픽 웃은 우연재가 본론을 꺼냈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제야 두 분을 뵙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아, 맞다. 한번 뵙기로 했었지. 주말에 두 분 다 본가에 계시는 거야?”

“응. 왜, 시간 안 돼?”

기다란 눈매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얄팍하게 그어졌다. 문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기말고사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은 데다, 아르바이트 역시 평일에만 하고 있으니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아냐. 몇 시에 가?”

“오후에는 두 분 다 나가시지 않을까 싶은데. 점심?”

“알았어. 11시쯤에 가면 되겠다.”

“그래, 그럼.”

뭐 사 가야 하지. 사소한 고민을 하느라 우연재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 * *

택시에서 내려선 문서윤은 제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높은 담장과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우연재의 본가를 찾은 것도 자그마치 2년 만이었다. 여섯 살부터 드나들던 곳인데도 고작 2년 동안 발걸음 하지 않았다고 이 순간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좋아하시면 좋겠는데.”

그는 품에 안긴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신경 써서 예약해 둔 꽃다발은 화사함을 자랑했다.

평소 같았다면 우연재와 왔겠지만, 금요일부터 본가에 있을 거라는 말에 혼자 택시를 타고 온 참이었다. 함께 왔다면 뭐 이런 걸 사 오느냐며 남이냐고 한 소리 들을 게 뻔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뭔가 드리고 싶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꽃다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냘프게 움직이는 꽃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두 분께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연재는 문서윤의 아버지에게 선을 긋는 편이었지만, 문서윤은 아니었다. 우연재의 아버지에게는 살짝 어색함을 느낄 때가 있어도 그의 어머니는 정말 친이모처럼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뵈려니 손끝으로 긴장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심호흡을 한 뒤에야 초인종을 눌렀다. 문은 곧바로 열리지 않았다.

간혹 우연재가 직접 문을 열기 위해 정원을 지나쳐 올 때가 있어 문서윤은 다시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가만히 기다리기를 택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예상대로 반대편에서 직접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열리는 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왔네.”

검은색 동공이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꽃다발을 훑어 내렸다.

“웬 꽃다발?”

“이모 꽃 좋아하시잖아. 빈손으로는 오기는 좀 그래서. 혹시 취향 바뀌셨어?”

“여전하시지.”

우연재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서자 등 뒤로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난, 또.”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얄팍하게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꽃다발 들고 인사 온 줄 알았네.”

“뭔 소리야. 인사 온 거 맞지. 두 분 다 오랜만에 뵙잖아.”

“다른 인사 말한 건데.”

인사에도 종류가 있나? 문서윤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인사?”

그 의미를 되묻자 꽃다발만큼이나 화려한 얼굴이 장난기를 머금었다. 우연재가 샐샐 눈웃음을 치며 살랑이듯 대답했다.

“결혼 허락 인사.”

“또 이상한 소리 하네.”

문서윤은 꽃다발로 우연재의 가슴을 툭 치며 핀잔을 던졌다. 지난번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에서 상견례 운운한 것과 비슷한 말장난이었다. 어머니들 간의 약속 아닌 약속을 이런 식으로 끌어오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상견례 소리를 듣고 사레가 들린 것도 아버지가 앞에 있어서였지, 둘만 있었다면 눈을 흘기고 말았을 테다.

물론 익숙해진 말버릇을 장난으로 넘겨 버리는 것과 마음이 흔들리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나도 참 나다.’

단순한 농담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벼운 한마디에 가슴이 쿵 떨어지는 제 마음이 가장 우스웠다.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우연재 때문에 놀란 건지, 아니면 불가능한 미래를 잠깐이나마 그려 보며 설렌 건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전자였으면 했다. 후자는 너무 비참할 테니까.

“꽃다발 들고 긴장한 얼굴로 서 있길래.”

긴장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 아니라고 대꾸하기도 뭣했다. 슬쩍 찌푸린 얼굴이 웃겼는지 우연재가 픽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한 게 언제였냐는 듯 익숙한 분위기가 반겨 왔다. 돌이켜 보면 자그마치 15년이나 드나든 집이었다. 고작 2년의 부재가 그 세월을 이길 리 만무했다.

“서윤아.”

신발을 벗자마자 우연재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2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뻣뻣하게 굴면 어쩌지 지레 속을 태운 게 무색하게도 입술에 저절로 얕은 웃음이 걸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모.”

우연재의 친모인 서연희는 문서윤이 내민 꽃다발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사한 꽃다발을 받아 든 그녀는 곧바로 넓게 팔을 벌려 제게 꽃다발을 선물한 이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움찔 어깨를 떤 문서윤은 이내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꽃다발과 함께 안기다시피 한 덕에 향기롭고 포근한 냄새가 났다.

“얘는 섭섭하게 군대 갔다고 말도 안 하고.”

“죄송해요. 잘 지내셨어요?”

“아들 둘 다 없으니까 심심하더라. 친아들은 서윤이 너 군대 갔다고 홀랑 여행이나 가질 않나. 어떻게 1년 동안이나 안 들어왔는지 몰라.”

서연희가 우연재를 흘겨보더니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하나도 안 변하셨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와 행동에 어색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안온한 분위기에 딱딱하게 긴장한 몸이 풀리는 것 같아 문서윤은 어깨에 힘을 빼며 거실로 향했다. 막 일어서려던 우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서윤아. 오랜만이구나.”

허허 웃으며 다가온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 우연재가 손을 낚아챘다.

“처음 보는 사이야? 악수하게?”

“하여튼, 이놈이 성질머리하고는……. 군대는 편하게 갔다 왔고?”

아들을 향해 혀를 찬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문서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문서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편하게 갔다 왔어요.”

“하하. 그래, 이왕 다녀오는 거 빨리 다녀오면 좋지. 그래도 편하게 갔다 왔다니 신경 쓴 보람이…….”

“애 세워 두고 뭐 하러 군대 얘기 해요. 서윤아, 이리 와.”

서연희가 자연스레 팔을 잡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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