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기운과 함께 음식이 한가득 올라온 식탁이 나타났다. 11시에 가겠다는 걸 한 시간 뒤에 오라고 하시더니, 일부러 점심시간에 딱 맞춰 부르신 모양이었다.
“아직도 갈비찜 좋아하니? 너 좋아하는 음식 부탁드렸는데.”
“아, 네.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일찍 와서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뭘 도와줘.”
어슬렁거리듯 다가온 우연재가 말을 잘랐다.
“아저씨는 옆에 사람 있는 거 더 번거로워하실걸. 우리 어릴 때부터 그러셨잖아.”
앉으라는 듯 식탁을 향해 떨어지는 고갯짓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건 그런데……. 그나저나 아저씨는 오늘 안 계신가 봐요.”
어른 두 분이 식탁에 앉기 전인데 먼저 앉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따라 곧장 의자에 앉는 대신 흐릿하게 떠오르는 얼굴을 찾듯 서연희를 보며 물었다. 우연재의 부모님만큼이나 익숙한 분이셨다.
“오늘부터 여행 가셨거든. 네 얼굴 못 본다고 아쉬워하시더라.”
“아……. 저도 뵙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러니까 자주 와. 올 때 연재도 데리고 오고. 얘는 나가 살더니 본가에 통 안 온다니까.”
“네에. 가끔 올게요.”
맞은편으로 향하는 서연희를 보며 대답하자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내리자 턱을 괸 채 올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안 끌고 와도 올 거야?”
어른들 앞에서 자주 오겠다고 약속드린 주제에 금세 말을 바꾸는 것도 이상했다. 문서윤은 두 분이 모두 앉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제 자리에 앉으며 우연재의 허벅지를 툭 치듯이 건드렸다.
“온다니까.”
“여기로 부르길 잘했네.”
입술을 씰룩이듯 가늘게 웃은 우연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서윤아. 이것 좀 먹어 봐.”
의아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서연희가 따끈따끈한 밥 위로 반찬을 올려 주며 우연재를 향한 시선을 앗아 갔다. 문서윤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는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이상하게도 반찬이 자꾸 제 앞쪽으로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챙겨 주실 필요는 없는데. 문서윤은 맛있게 먹으라는 서연희와 우 회장의 말에 대답하며 서연희가 챙겨 준 갈비찜을 입에 넣었다. 2년 만에 먹는 갈비찜은 익숙한 맛이 났다. 촉촉하고 달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참, 꽃 정말 고마워. 너무 예쁘더라.”
“마음에 드세요? 이모 꽃 좋아하시는 건 아는데 선물로 드려도 괜찮은지 고민했거든요.”
“얘는 당연한 걸 묻니. 손질해서 화병에 꽂아 둬야겠어.”
맛있는 식사와 함께 단란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이었다.
“나 문서윤이 결혼 허락받으러 오는 줄 알았잖아. 꽃다발 들고 있어서.”
국을 먹던 문서윤은 풉, 하고 터져 나오려는 사레를 간신히 삼켰다. 식탁 아래로 발을 차며 노려보는데도 우연재는 뻔뻔하게 눈을 휘며 실실거렸다.
“어머, 그래? 서윤아. 우리 집으로 장가올래?”
“우리가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어야 하는데.”
서연희도 우 회장도 아들의 발언에 질색하는 대신 능청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도리어 문서윤만 민망함에 뺨을 붉혔다. 그는 우연재가 동성 친구인 저를 두고 상견례니, 결혼 허락이니 같은 단어를 가감 없이 내뱉는 데는 이런 집안 분위기가 한몫하리라 여겼다.
“그럼 딸로 낳지 그러셨어요. 그럼 엄마 아빠 바람대로 문서윤 우리 집 사람 됐을 텐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니. 그러길래 왜 아들로 태어났어?”
“아, 이건 아빠 탓인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대화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우연재가 제 아버지 앞에서 상견례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아버지 역시 맞은편의 두 분처럼 우연재의 뜬금없는 발언을 익숙하게 여기셨지만, 그래도 어색한 사이 때문인지 저절로 눈치를 보게 되고는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 식사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 분 다 미국에 오래 계셨어서 그런가.’
물론 우연재와 저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시거나 혹은 동성 간의 관계에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어 평온한 반응을 보이시는 건 아닐 테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님들끼리 장난처럼 미래를 약속한 데다 어린 나이부터 봐 왔으니, 여섯 살부터 시작된 소꿉놀이가 지금까지 실없는 장난으로 이어지는 중이라 여기시는 게 분명했다.
이걸 편견이라고 해야 하나. 안도감과 씁쓸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실상 우연재 역시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일 테다.
혼자 깊게 파고들며 생각하는 게 우스워져 문서윤은 머릿속을 털어 냈다.
“허어, 잘생기게 낳아 줬더니 이놈이 이제 내 탓을 해?”
“낳아 준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 아닌가.”
“어휴, 우리 집 남자들은 왜 이렇게 유치한지 몰라. 서윤아,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부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연희가 생긋 웃으며 눈을 맞춰 왔다.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웃었다.
“네. 많이 먹을게요.”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두 분 모두 이 농담 같은 대화에 끼어들며 웃지 않으셨을까, 하는 아쉬움이 찾아왔다.
그만 생각하자. 문서윤은 숟가락을 움직이며 티 나지 않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 때문인지, 아니면 화기애애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2년 만에 만나는 아들의 친구를 여전히 가족처럼 대해 주는 두 분 때문인지 코가 찡했다.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서윤이는 지금 2학년이지?”
우 회장이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문서윤은 과일을 먹던 포크를 내려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로는 정해 둔 거 있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내년부터 고민해 볼까 하는데.”
진로가 확실한 우연재와 달리 생각해 둔 방향이 없어 약간 멋쩍어졌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졸업 후의 진로를 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문서윤은 솔직하게 답했다.
“유학 생각은 없니?”
“유학이요?”
서연희가 차를 마시며 넌지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연재도 이이 따라서 미국 갈 테니까 그때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졸업하고 나서라도.”
“아…….”
아버지든, 외가댁이든 유학을 가겠다고 하면 보내 주시긴 할 것 같았다. 더더군다나 우연재의 아버지가 직접 꺼낸 말이라면 아버지는 무조건 보내 주겠다고 하실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문서윤은 곧바로 긍정의 답을 내놓지 못했다. 생각해 보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지만, 우연재가 걸린 문제라 더 그랬다. 미국에 가면 정말 제게는 우연재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언젠가 찾아올 그의 부재를 홀로 견뎌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이모는 서윤이 네가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그래, 꼭 아저씨 회사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도 갔다 오면 도움은 될 거다.”
문서윤은 어물쩍하게 웃으며 힐긋 우연재의 눈치를 살폈다. 머그잔을 입술에 대고 있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눈동자를 굴렸다. 뭐라 말을 얹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우연재는 한마디도 얹지 않았다.
도움 요청은 그렇게 쉽게 끝이 났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어 문서윤은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서요.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천천히라도 좋으니까 꼭 말해 줘. 알았지?”
“네.”
강권할 생각은 없으셨는지 대화는 금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문서윤은 또다시 우연재를 힐금거렸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여기도 진짜 오랜만이다.”
“2년 만에 오니까 그렇지. 자주 와.”
“네가 할 소리야? 이모 말씀 들어 보니까 너도 본가 잘 안 오는 거 같던데.”
우연재의 방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물건을 쌓아 두는 편이 아니니 크게 바뀔 만한 게 없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깔끔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방은 꼭 필요한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거야 네가 안 오니까 그런 거고.”
어쩐지 말이 이상했다.
“네 집이지, 내 집이야? 무슨 말이 그래.”
“나 본가에서 통학하면 더 안 올 거잖아. 학교 근처에 사는데도 존나 애원해야 와 주면서.”
“애원은 또 무슨 애원이야…….”
확실히 오피스텔이 아닌 본가에 살았다면 학교 밖에서는 만날 일이 없을 듯해 문서윤은 말꼬리를 흐렸다.
“왜, 주말에 같이 있어 달라는 것도 싫다며.”
“싫다는 게 아니라……. 그건 뭐야?”
때마침 대화를 돌릴 만한 주제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재의 손에 들린 네모난 박스를 보며 묻자 슬쩍 인상을 찌푸린 그가 느지막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대로 한 번 넘어가 준다는 표정이었다.
“앨범. 저번에 사진 얘기한 거 생각나서.”
“아, 그랬지.”
“너희 어머님 사진도 있을걸.”
“그러게. 있을 것 같다.”
문서윤은 우연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연재의 손에 들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앨범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무거웠다. 책 잡듯이 잡길래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는데. 문서윤은 싱거운 생각을 하며 앨범 첫 장을 넘겼다. 곧바로 꼬꼬마 시절 사진이 나타났다.
“너 진짜…….”
사진을 확인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어릴 때 표정 진짜 시큰둥하다. 나한테 화났어?”
앨범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채 넘기자 잘 보이지 않는지 우연재가 어깨에 턱을 기대 왔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려는 몸을 간신히 붙들었다. 염색 한 번 하지 않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턱을 간질이자 고개가 뻣뻣하게 굳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