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더 장난을 칠 생각은 없다는 듯 우연재는 문서윤을 반쯤 끌어안다시피 한 자세로 앨범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끌어안긴 문서윤만 그를 따라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렇게 쉽게 움직일 일인가.’
익숙한 자세라 어색하지는 않았으나 뒤늦게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우연재가 고작 허리를 좀 끌어당겼다고 손쉽게 딸려 간 스스로의 몸뚱어리에 대한 감상이었다. 심지어 끌어당기는 힘이 아플 정도로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밀어내도 꼼짝도 하지 않던 허벅지가 떠오르자 한층 더 허탈해졌다.
내가 그렇게 힘이 없나. 남태은에게 운동 좀 하라는 잔소리를 듣기는 했어도 아무렴 성인 남자였다. 문서윤은 앨범에 가려지지 않은 우연재의 허벅지를 힐금거렸다. 확실히 육안으로도 차이가 나기는 했다. 역시 운동을 해야 하나. 저도 남자인지라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여기 있네, 너희 어머님 사진.”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쓸데없는 생각을 잠재웠다. 문서윤은 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햇살처럼 웃고 있는 환한 얼굴이 네모난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그렇네…….”
생기 넘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본가에도 분명 사진이 있을 텐데, 이상하게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아 여태 앨범을 꺼내 본 기억이 없었다.
“예쁘다.”
활짝 웃고 있는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셨다.
“이날 우리 봉숭아 물 들인 날 같은데.”
우연재가 가까이에서 보라는 듯 허리를 휘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뭐야. 그런 것까지 기억해?”
“설마. 옷 똑같잖아. 같은 날이네.”
다음 사진으로 시선을 내리자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는 저와 우연재가 보였다. 어린애 둘이서 조그만 손톱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우연재는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저는 잔뜩 신이 나 헤헤 웃고 있었다.
“우연재 넌 왜 사진마다 표정이 이래? 어린애가 세상 다 산 표정이네.”
차라리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말 그대로 세상만사에 무관심한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문서윤은 농담을 던지듯 픽 웃으며 우연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하리란 예상과 달리 우연재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왜.”
언뜻 곤란한 기색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상해?”
찌푸려지나 싶던 눈가가 슬쩍 내려가는 눈썹꼬리를 따라 아래로 처졌다. 우연재가 입술을 삐죽이듯이 물었다. 대놓고 약한 척을 할 때 짓고는 하던 표정이었다. 문서윤은 또다시 치대려는 소꿉친구를 슬며시 밀어냈다.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잘 웃잖아. 신기해서.”
“네가 좀 웃고 다니라며.”
“내가?”
“응. 나 문서윤 말 존나 잘 듣잖아.”
그랬나.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떠오르는 장면도 많았지만, 구체적인 대화까지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특출 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확실히 어릴 때에 비하면 지금이 잘 웃는 편이기는 했다.
“넌 인상이 잘 웃는 게 나아.”
문서윤은 우연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혹시라도 제 마음을 들킬까 무서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텐데, 객관적인 평을 내린다고 생각하니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안 웃으면 좀…….”
뭐라고 해야 하지. 문서윤은 말을 골랐다.
“무섭잖아.”
우연재는 싸늘한 얼굴로 서 있으면 말도 걸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외모 위로 무표정이 주는 서늘한 분위기까지 덧대어지다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나마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웃는 편이라 약간 사람 같은 분위기가 났다.
“무섭다는 말 처음 듣는데.”
“그거야 지금은 잘 웃으니까 그런 거고. 너 가만히 있으면 성격 더러워 보여.”
“면전에서 막말하네?”
우연재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픽,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는 딱히 불쾌한 기색이 섞여 있지 않았다.
“김현승도 그렇게 말할걸. 나야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상관없는데 만약 지금 너 처음 봤으면 말 걸 생각도 못 했을 것 같은데. 특히 무표정이면.”
“……어릴 때 만나서 알은척했다는 소리네, 그럼.”
문서윤은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앨범을 한 장 넘겼다. 다른 사진에서도 우연재는 지루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원래 어린애들은 남 눈치 잘 안 보잖아. 그래서 아무하고나 쉽게 친해지는 거고.”
“아무하고나? 내가 아무나야?”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실리더니 또다시 어깨 위로 부드러운 감각이 닿았다. 혼자 앨범을 구경하던 문서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우연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응석을 부리듯 치근덕거렸다. 또 장난을 치는 게 뻔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어떻게 아무나야.”
평생을 가도 우연재를 아무나의 영역에 집어넣는 일은 없을 테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눈동자만 위쪽으로 굴려 빤히 쳐다보던 우연재가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응. 그래야지.”
대단한 말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를 살피게 됐다.
“그런데 서윤아.”
미묘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문서윤은 대답 대신 눈만 깜박거렸다.
“넌 웃지 마.”
“뭐?”
“이상한 새끼들 꼬이기 딱 좋으니까.”
그런가, 하는 생각이 스쳐 문서윤은 괜히 뺨을 만지작거렸다. 제 인상이 어떤지는 그 스스로가 잘 알았다. 쉽게 말해 만만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학교에서 동아리 홍보 활동이니 뭐니를 핑계로 무작정 붙들리는 것도, 눈앞에 훤히 보이는 목적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는 것도 그래서였다.
“오죽하면 사이비 새끼들이 들러붙고 지랄이겠어.”
그 이야기를 들은 우연재는 ‘사이비 꼬였나 보네. 무시해.’ 하고 일갈하고는 했다. 김현승 역시 툭하면 ‘문, 너는 생긴 게 꼭 이상한 새끼한테 붙들려서 인생 꼬일 팔자 같아.’라는 악담 아닌 악담을 말버릇처럼 늘어놓고는 했으니 우연재가 하는 말이 영 틀린 소리는 아닌 듯했다.
“그렇게 자주 웃는 편은 아닌데…….”
남자치고는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늘 실실 웃으며 다니는 건 아니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무시할 정도로 강단 있는 성격은 못 되어도, 웃음이 헤픈 편도 아니었고.
“아무튼 조심해. 괜히 좆같은 상황 휘말리지 말고.”
“나한테 그럴 일이 뭐가 있다고……. 알았어.”
이러나저러나 무서운 세상이니 뭐든 조심해 나쁠 건 없었다. 문서윤은 대충 대답하며 다시금 앨범으로 시선을 내렸다.
우연재의 어머니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앨범에는 제 어머니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들 옆에는 늘 부모님이 붙어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가져갈래?”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우연재가 가볍게 물었다.
“아냐. 여기 있는 게 더 좋아.”
가져가도 보관할 만한 곳이 여의치 않았다. 앨범이야 사면 그만이지만, 본가에 자주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텅 빈 방에 어머니 사진을 가져가 뭐 할까 싶었다. 차라리 우연재의 집에 있는 게 나았다. 적어도 이모께서 가끔 들여다보실 테니까.
“가끔 보러 오지, 뭐.”
그게 나았다.
* * *
우연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꾸벅꾸벅 졸던 문서윤은 이제는 완전히 제게 머리를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어릴 때도 꼭 점심을 먹으면 낮잠을 자더니,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고 그 버릇이 도진 모양이었다.
아니, 이제 와서 도진 게 아니라 남아 있는 버릇인가. 고등학교 때도 점심을 먹고 나면 수업 시작 10분 전에 쪽잠을 자곤 했으니 아직 남아 있는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대학 진학 후에는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졸고 있는 상황에서도 문서윤은 앨범을 꼬옥 쥐고 있었다. 손에 잡힌 게 앨범이 아닌 제 손이었다면 마찬가지로 꼭 쥐고 있을 터였다. 우연재는 소꿉친구의 사소한 잠버릇을 모를 정도로 문서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다.
“…….”
문서윤을 기숙사에서 나오게 만드는 건 쉬웠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 하신다는 그럴싸한 핑곗거리면 충분했다. 그 이후에는 주말을 제 오피스텔에서 보내겠다는 약속까지 얻어 냈으나, 문서윤이 주말을 매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매주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는 눈치던데.’
그렇다고 무작정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놀라 도망가게 만드는 것보다는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끌어들이는 편이 나았다.
설마하니 기숙사에서 그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좁고 좁은 공간에 문서윤을 다른 남자와 함께 두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자꾸 초조함이 치미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문서윤이 제 품에서 벗어나 군대로, 기숙사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으니까.
한 번 싹트기 시작한 위기의식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음험하면 음험해졌지 도통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우연재는 평화롭게 잠든 소꿉친구를 내려다보며 온 신경에 날을 세웠다. 시선이 오밀조밀한 얼굴을 따라 내려가더니 마침내 가느다란 허리에 걸렸다.
갑작스레 끌어안아도 아무렇잖게 굴던 문서윤이 평소답지 않게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여섯 살 때부터 툭하면 끌어안고는 하던 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 적이 몇 번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제대 후 다시 만나고 난 이후부터.
우연재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나지막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쩌다가 다른 새끼한테 손을 탔지…….”
초조함과 위기의식에 덧대어 불쑥 불쾌한 짜증이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