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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79)화 (79/139)

79화

문서윤은 샷을 내리며 힐금 창가 쪽을 살폈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우연재가 보였다. 과제 때문에 들렀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리포트를 쓰는 듯했다.

“오빠 친구분 자주 오시네요.”

그럭저럭 한가한 시간대였다. 마지막 주문 음료를 카운터에 내려 둔 송주아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을 걸어왔다. 확실히 그녀가 눈치챌 정도로 최근에 카페에 오는 시간이 늘긴 했다.

“과제 많아서 그런가 봐.”

“여자 친구랑 완전히 헤어진 거예요? 혼자 오시네요?”

송주아가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완전히. 문서윤은 속으로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잠깐 헤어진 건가 했는데 진짜 헤어졌구나. 왜, 싸웠다가 다시 붙는 커플들 많잖아요. 카페 오실 때마다 사이좋아 보여서 다시 사귈 줄 알았는데.”

“그러게.”

문서윤은 애써 웃는 얼굴을 포장했다.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심심한 건지 우연재는 종종 카페에 들르고는 했다. 지금처럼 혼자 과제를 할 때도 있었고, 김현승이나 다른 친구들을 끼고 올 때도 있었다. 매일 오는 건 아니었지만, 카페 외에도 겹치는 강의가 꽤 많다 보니 요즘은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 했다.

‘주말에도 그렇고.’

어영부영 주말마다 오피스텔에 가기 시작한 것도 어느덧 2주째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우연재의 꾐에 넘어가 주말에는 오피스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 그의 본가에 다녀온 날부터였다.

태은 형이 알면 한 소리 할 것 같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사실상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남태은은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까지 내리 기숙사를 비우는 편이었다. 학기 초부터 이어진 루틴이 갑자기 바뀔 리는 없으니 제가 그처럼 주말에 기숙사를 비운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눈치챌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우연재의 오피스텔에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라면 욕이 아닌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았다.

매 주말을 소꿉친구의, 그것도 짝사랑 상대의 오피스텔에서 보낸다는 소리를 들으면 대부분은 비슷한 반응을 보일 테다. 저거 멍청한 새끼 아냐, 뭐 이런 반응들.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어쩌면 그새 적응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미묘한 공기가 흐르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됐지만, 그것 외에는 정말 괜찮았다. 간혹 학창 시절로 돌아간 즐거운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문서윤은 이런 상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사실상 자기 위안에 가까웠다.

평생 우연재를 외면하며 살아가기란 이미 글러 먹은 상태였다. 그러니 익숙해지는 게 최선이었다. 예전처럼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단둘이 있는 시간도 적응될 테고, 그 순간순간이 낯익어지다 보면 마찬가지로 마음을 가리는 것도 쉬워질 터였다.

몇 년 만에 찾은 그의 본가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접촉에 지레 놀라 파드득거린 것처럼 꼴사나운 행동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단 한번 습관이 들면 참는 것도 몸에 익을 테니까.

평생 얼굴을 봐야 한다면 차라리 익숙해지는 쪽이 좋았다.

남태은에게 이런 한심한 합리화를 털어놓는다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욕을 얻어먹을 게 분명했지만, 매번 긴장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능숙해져 마음을 티 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싸운 이후로 잘 지내고 있기도 하고. 이렇게 안 됐으면 더 어색해졌을 것 같은데.’

차에서 벌인 설전을 싸웠다고 표현하는 게 옳은가 싶었으나, 한두 달 사이에 우연재와 저를 서먹하게 만든 주제는 그와 잔 이후 완전히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이게 맞는 길이었다.

“저런 타입이 꼭 새 애인 사귀면 친구 만나 주지도 않던데. 아, 연재 선배 말한 건 아니에요.”

불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송주아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문서윤은 그녀 몫으로 만들던 라테를 내밀며 픽 웃고 말았다.

“별생각 안 했어.”

“오빠 친구 욕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제 친구 생각나서 한 말이에요.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애인 생기면 친구 팽하는 애들 많다니까요. 그러다 진짜 친구들한테도 손절 당하지.”

“남자들도 그런 사람 많을걸.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잘 알지 못하는 문제라 문서윤은 그럴싸한 답만 내놓았다. 두루두루 친한 사람들이 많긴 해도 자주 만날 만큼 친한 사람은 우연재와 김현승 정도가 전부라 두 사람으로 일반화를 내리기가 어려웠다.

김현승은 애인이 있을 때도 자주 만나는 편이었고, 우연재는 그런 부류인지 확인할 새가 없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로 도망쳤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까 현승이도 나 군대 간 동안 우연재 얼굴 못 봤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연재 역시 송주아가 말한 그런 부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문서윤 제가 간섭할 거리는 아니었다. 언젠가 우연재에게 새 애인이 생기고, 주말마다 오피스텔을 찾을 일이 없어져도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그 전에 익숙해지는 게 좋았다. 우연재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든, 혹은 그가 부재한 시간이든.

힐금 창가를 살핀 순간 우연재가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와 연락 중이었는지 카운터로 다가온 그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운을 뗐다.

“서윤아.”

“왜? 다른 거 주문하게?”

“잠깐 자리 비워도 돼?”

테이블 쪽으로 고갯짓하는 걸 보니 짐을 놓고 자리를 비워도 되냐는 의미인 듯했다.

“어……. 오래 걸려?”

“오래 걸려도 20분쯤?”

“그 정도는 괜찮아. 손님도 별로 없고. 그런데 갑자기 왜?”

“누구 좀 만나고 오려고.”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문서윤은 잠깐 망설였다.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누구?”

“으음…….”

우연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할까 말까 가늠하듯 슬쩍 눈썹 앞머리를 찌푸릴 따름이었다. 다시 여자 친구 만나나. 익숙해져야 한다고 되뇐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별것 아닌 사소한 일에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우습게도 그랬다.

“있어.”

긴 눈매가 스르르 올라가는 입술만큼이나 느릿하게 접혔다.

“네가 몰라도 되는 사람.”

* * *

우연재는 강수하가 일러 준 위치를 곱씹었다. 문서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흡연 구역이었다. 그는 확인차 다시금 메시지창을 끌어 올렸다.

[서윤형 알바하는 카페있잖아요 거기서 학교방향으로 가는길에 술집하나 있는데 골목으로 들어가면 담배피는데 있거든요? 거기서 자주보여요]

[알았어. 고마워.]

[그런데 한철민은 왜요? 형 걍 엮이지마세요ㅡㅡ 병신이랑 엮여서 좋을거x]

[할 말 있어서.]

[형이요??? 걔 지금도 거기있을걸요 저 아까 자취방가면서 봤어요]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한 게 3분 전이었다. 담배 하나를 피우는 데 몇 분이 걸리는지 모르겠으나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 대만 피우고 자리를 뜰 정도로 깔끔한 인상은 아니었다.

우연재는 평소라면 절대 발을 들이지 않을 더러운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예감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는지 한철민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에 힐금 눈동자를 움직이던 그는 우연재를 발견하고는 눈을 끔벅였다. 못생긴 자라 같았다.

“선배님. 오랜만에 뵙네요.”

“어어……. 여, 연재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하하.”

서늘한 동공이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담배로 향했다. 군데군데 버려진 쓰레기 냄새에 담배 냄새까지 섞이자 한순간에 불쾌함이 치솟았다. 우연재는 콧잔등을 찌푸리는 대신 능숙하게 웃는 낯을 만들어 냈다.

“다들 여기서 담배 많이 피우더라고요.”

“너도 담패 피웠었나?”

우연재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선배님 보이시길래 인사할 겸 들렀죠.”

“아, 그래. 그런데 나 거의 다 피워서…….”

손가락 사이에 걸린 허연 물체를 땅으로 떨어트린 남자가 황급히 신발 밑창으로 담배를 눌러 껐다. 그 꼴을 지켜보던 우연재는 천천히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때리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한철민이 지레 놀라 몸을 움츠렸다.

멋모르는 어린애도 아니고, 중학생 때처럼 주먹질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제가 선배님한테 너무 무례하게 군 것 같아서요. 사과드리고 싶었는데 통 안 보이시길래.”

“어어, 그래?”

상황을 파악하듯이 한철민이 또다시 눈을 끔벅였다. 담배를 쥐고 있던 손을 바지에 닦아 내기까지 했다.

“제가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예민했었나 봐요. 그 자리에 계신 다른 선배님들보다 선배님께서 편해서 저도 모르게 화풀이한 것 같더라고요. 죄송해요.”

“아,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비굴하게 웃은 한철민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우연재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런 인간을 잘 알았다. 모멸감에 치를 떨다가도 친근하게 대해 주며 사과를 건네면 금방 비굴하게 굽실댈 부류였다.

“나는 또 네가 그런 말 한 게 네 친구 때문인 줄 알고…….”

“제 친구요?”

우연재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문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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