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어어, 음, 이름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서윤이랑 무슨 일 있으셨나 봐요.”
부러 가볍게 묻자 한철민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일은 무슨. 그으, 뭐냐, 후배들이랑 술 마시는 것 같더라고. 하하.”
모르는 척하자 정말 모른다고 넘겨짚었는지 거짓말을 내뱉는 꼴이 같잖았다.
“서윤이가 후배들도 잘 챙기고 성격이 좋기는 하죠.”
우연재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나저나 선배님 담당 교수님 박승민 교수님이시라면서요.”
“어, 어떻게 알았어?”
“저희 아버지랑 친하시잖아요.”
갑작스레 등장한 담당 교수의 존재에 뭔가 얻어 낼 게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철민이 입술을 핥았다. 우연재는 미세하게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바로 했다. 아직도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담배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에 가득 찬 쓰레기 냄새 때문인지 기분이 더러웠다.
“이번에 상담하시겠네요.”
“나도 올해 졸업이니까……. 하하.”
“교수님이 제자들 잘 꽂아 주는 거 아시죠?”
“어어, 알지. 그, 크흠, 상담하고 싹 보이는 제자들 밀어주신다며. 타율도 좋고.”
한철민이 또다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구부정해지는 어깨에서 원하는 바가 빤히 보였다.
“교수님은 솔직한 사람 좋아하시는데.”
“그래?”
“네. 요즘 애들은 빙빙 돌려 말해서 패기가 안 느껴진다고 아쉬워하시더라고요. 대놓고 가고 싶다, 밀어 달라 하는 제자들이 패기 넘쳐 보여서 보기 좋다고.”
한철민이 꿀꺽 침을 삼켰다. 얻어먹을 게 있을까 싶어 하이에나처럼 벌게진 눈동자가 제법 볼만했다.
“선배님께 실수한 것도 있고 죄송해서 말씀드리는 거니까 다른 선배님들한테는 공유하지 말아 주세요.”
“당연하지!”
“아, 그리고…….”
우연재는 괜히 무언가를 고민하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더러운 운동화에 짓이겨진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교수님 단 디저트 좋아하시거든요.”
“디저트?”
“네.”
쓰레기는 쓰레기에 파묻혀 있을 때가 제일 잘 어울렸다.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하셨을 것 같은데…….”
“어어. 그래, 그래. 알았어.”
바지에 스윽 손을 닦은 한철민이 어색하게 팔을 뻗어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 우연재는 발걸음을 옮기는 척 티 나지 않게 몸을 돌렸다. 머쓱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손이 공중에서 멎었다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고맙다, 연재야!”
“뭘요. 그나저나 저 약속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멀리서 선배님 보이길래 혹시나 해서 잠깐 온 거라.”
“그래, 그래. 얼른 가 봐.”
우연재는 까딱, 고개를 숙이고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여태 공기를 떠돌아다니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나마 깨끗한 공기가 느껴졌다.
바로 들어가면 담배 냄새 날 것 같은데. 우연재는 곧장 카페로 들어가는 대신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유리창 너머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문서윤이 보였다.
“요즘은 담배 안 피우는 것 같았지…….”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평일의 문서윤은 제 시야를 벗어났고, 그날처럼 다른 새끼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매캐한 연기 내음이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아 순식간에 기분이 나락으로 처박혔다. 미미하게 올라오려는 짜증에 우연재는 혀끝을 깨물었다. 근래에 자주 깨물어 잔뜩 헌 살덩어리에서 미미한 피 맛이 느껴졌다.
슬슬 표정을 갈무리하고 들어갈까 생각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우연재는 박승민 교수님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 연재야. 메시지 남겼던데.
박승민은 교수보다는 옆집 아저씨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잡음이 생길까 봐 그가 가르치는 수업은 전부 피하고 있지만, 교류가 잦다 보니 친밀하다면 제법 친밀한 사이였다.
“이번 학기에 한 번도 못 뵌 것 같아서요.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 나야 똑같지.
“조만간 취업 상담 시작하면 바쁘시겠네요.”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요즘 애들은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쯧쯧, 겸손을 아는 놈들이 없어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오만을 당당함이라고 착각하는 놈들이다. 여자애들은 안 그러는데 남자 새끼들이 아주…….
우연재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모르죠. 이번 학기에는 교수님 마음에 드는 제자가 있을지.”
- 글쎄. 괜히 잘 보이겠답시고 먹을 거나 안 사 왔으면 좋겠구나. 딱 질색이다.
“요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알랑거리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 말도 마라. 표정 관리하는 것도 일이야.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 아무튼 시간 나면 얼굴 한번 보자꾸나.
“종강하고 뵈어야 할 것 같은데. 괜히 말 나오면 보기 안 좋잖아요.”
- 그래. 알았다.
“들어가세요.”
우연재는 화면이 검게 변한 핸드폰 모서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한국대 경영이니 취업 길이 막힐 일은 없겠지만, 담당 교수 눈 밖에 나면 이래저래 고전할 테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엿 먹겠지. 지루한 얼굴로 몸을 튼 순간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마시라는 의미인지 문서윤이 새 음료가 든 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저렇게 착해 빠진 애를 때리려고 했다고…….’
우연재는 눈꼬리만 접어 웃은 뒤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역시, 문서윤은 제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사는 게 나았다.
* * *
“야, 똥강아지.”
문서윤은 가방을 챙기다 말고 돌아섰다.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싶더라니, 편의점에 다녀왔는지 남태은이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다. 비닐봉지를 뒤적인 남자가 먹으라는 듯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굳이 사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거절하기도 뭣해 문서윤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너 그 새끼랑은 어떻게 됐냐?”
“그 새끼요?”
우연재를 말하는 건가 싶어 순간 뜨끔함이 몰려왔다.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이 잇새로 뭉개졌다.
“이 날씨에 과잠 입고 다니는 미친놈 있잖아. 저번에 밤에 마주친 새끼. 그, 왜. 너보다 키 작고.”
“아…….”
뒤늦게야 한철민이 떠올랐다.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4학년이라 마주칠 일도 없고.”
“그래?”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던져 놓은 남태은이 풀썩 소리가 나도록 침대에 주저앉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그런 새끼들 은근 음습해서 시간 한참 지나고 나서 지랄 떨까 봐.”
“그때 술 엄청 취한 것 같던데. 쪽팔려서 그날 얘기 못 꺼낼걸요. 아무튼 마주칠 일 없어서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어디 가냐? 오늘 주말이라 알바 없잖아?”
“중도요. 형 시험공부 안 해요?”
“이게 갑자기 사람을 막 때리네.”
문서윤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으며 픽 웃었다.
“너 따라서 도서관이나 갈까.”
그냥 하는 소리가 뻔했다. 기숙사에 들어올 정도면 성적도 잘 나오는 게 분명한데, 여태 도서관에 가는 모습은 보질 못했다.
“형 말만 그렇게 하고 안 갈 거잖아요. 그리고 저 친구랑 가기로 했어요.”
“친구? 누구?”
심드렁하게 묻던 남태은이 퍼뜩 무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가늘게 눈을 접더니 수상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걔지? 우연…… 지?”
“재라니까…….”
“똥강아지. 난 가끔 네가 진짜 무섭더라.”
“또 뭔 소리예요.”
“군대에 있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애가 무르게 생겨 가지고 독할 때는 존나 독하다니까.”
도통 남태은의 말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우연재 얘기가 왜 내가 독하다는 얘기로 흘러가지? 문서윤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가방을 챙기다 말고 군것질을 하고 있으려니 시간이 촉박했다.
“갑자기 독하다는 얘기는 또 뭐예요. 그런 소리 들어 본 적 없는데.”
“아냐. 너 진짜 독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새끼랑 그렇게 매일같이 붙어 다닐 수가 있냐? 같이 도서관까지 가고?”
“같이 못 다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누구 짝사랑하면 옆에 있고 싶어서라도 갈 것 같은데.”
물론 문서윤이 우연재와 함께 도서관에 가는 건 오로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보다는 몇 년을 내리 이어져 온 습관 때문이었다.
‘중도?’
‘응. 1학년 때 안 가 봐서 몰랐는데 학교 도서관 좋더라.’
‘같이 가, 그럼.’
기억 속 우연재는 도서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 깨끗한 공간이라 해도 사람이 득실거리는 공용 공간인 까닭이었다.
‘학교 도서관 간다고?’
‘너 간다며.’
‘그건 그런데…….’
‘이제 나 막 버리네? 교복 입고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그게 아니라 너 도서관 안 좋아하잖아.’
‘혼자 공부하면 심심해.’
늘 함께 공부를 해 왔던 터라, 새삼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재학생들에게 개방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겠다는데 제가 싫다고 거절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얼떨결에 정해진 약속이었다.
“그런가? 오히려 떨려서 공부 못할 것 같은데.”
진지하게 고민 중인지 남태은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때부터 같이해서 익숙해요.”
오히려 공부할 때가 나았다. 우연재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책에 신경을 기울이느라 되레 집중력이 올라갔다.
“형 짝사랑해 본 적 없죠.”
문서윤은 남태은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