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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81)화 (81/139)

81화

남태은만큼 마음이 편한 상대도 없지만, 이상하게 그가 짝사랑을 해 봤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내놓는 해답들이 하나같이 칼로 베어 내듯 명쾌하게 떨어져서라기보다는 어투에서 오는 느낌이란 게 있었다.

“휴, 난 죄 많은 남자였지.”

남태은이 콧대를 높이며 거들먹거렸다. 능청스러운 태도에 문서윤은 옅게 웃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던져둔 직후였다.

“아무튼 갔다 올게요. 형 오늘 기숙사에서 안 잘 거죠?”

마음 같아서는 도서관에 오면 연락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오지 않을 게 뻔했다. 그 성격을 알면서도 빈말을 하지 않는 건 우연재가 남태은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두 사람이 마주치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우연재는 빈정거릴 거고……. 태은 형도 만만치 않겠지.’

그 사이에 끼어 안절부절못하고 싶지는 않으니 괜한 말은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엉. 아, 서윤아.”

“네?”

문서윤은 가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너 이번에 퇴실 언제 하게?”

“아…….”

그제야 종강 이후에는 기숙사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본가에 들어갈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모르겠어요.”

당장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그뿐이었다.

“중도 처음 와?”

“응.”

건물에 들어선 순간부터 적막이 깔렸다. 우연재가 학생증을 꺼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처음 아냐?”

“중간고사 때 왔었다니까.”

“아. 중간고사. 그랬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매가 야트막하게 찌푸려졌다. 문서윤은 그제야 중간고사 기간 내내 우연재를 피해 다니던 과거를 떠올렸다. 약간 민망해졌으나 이제 와 쏟아 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 괜히 빈자리를 확인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시험 기간이라서인지 아침 일찍 나왔는데도 자리가 대부분 차 있었다.

“오픈형 앉을까……. 어떻게 할래?”

“너 편한 데 앉아.”

문서윤은 잠깐 고민하다 오픈형 자리를 예약했다. 칸막이가 있어야 같이 있는 사람이 덜 신경 쓰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개방된 자리에 앉아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픈된 공간 특유의 탁 트인 느낌이 긴장을 덜어 줄 테다.

“점심 언제 먹게.”

우연재가 핸드폰을 확인하며 물었다.

“12시 30분?”

“알았어. 그럼 그때 나오는 걸로.”

학생증을 찍고 위층으로 올라가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문서윤은 예약된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 두었다. 우연재가 맞은편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옆자리 예약한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으나 차라리 앞에 앉는 게 덜 신경 쓰일 듯했다. 옆에 앉으면 오히려 지나치게 의식될지도 몰랐다.

문서윤은 머릿속으로 공부할 과목들을 정리하며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환기를 위해 반쯤 열어 둔 창문,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과 바깥의 뭉개진 소음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종이를 넘기는 팔랑거림 같은 것들.

문서윤은 집중하느라 무너진 자세를 바로 하며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뻗었다. 생수병을 잡아 아직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신 순간 건너편에 앉은 우연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경 쓴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시력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 공부를 할 때면 안경을 쓰고는 했는데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보니 미처 잊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있어 고개가 비스듬히 꺾인 자세였다. 안경테 위로 고인 햇빛이 그 곡선을 따라 흘러내리더니 마침내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 위로 톡 떨어졌다. 자연스레 높은 콧대와 붉은색 입술로 시선이 이동했다. 펜을 까딱거리느라 힘줄이 돋은 손등은 그다음이었다.

제게 닿은 눈길을 눈치챘는지 순간 우연재가 느릿하게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긴 속눈썹이 그 움직임을 따라 하늘하늘 나풀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왜?”

입술만 움직여 묻는데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용한 물음에 문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싱거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우연재가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문서윤은 그를 따라 고개를 내렸다.

“…….”

백색 소음처럼 들리던 자잘한 소리들이 지나치게 의식됐다. 정확히 말하면 맞은편에 앉은 우연재가 지나치게 의식됐다. 수업 자료에 집중해야 하는데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층 편의점이라도 갔다 올까. 차라리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윤은 힐긋 우연재의 눈치를 본 뒤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문서윤은 망설이다 생수 두 병만 집어 들었다. 커피를 살까 했으나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마시는 게 나을 테다. 계산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자 문득 매대에 걸린 젤리가 눈에 띄었다. 우연재가 질투 운운하며 수거해 간, 김선주가 준 젤리와 같은 브랜드였다.

‘버렸으려나.’

좋아하지 않으니 먹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렸을 것 같지도 않았다. 고작 젤리 하나에 질투 어쩌고 하던 말이 떠올라서인지 아무렇잖게 버리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헤어졌으니까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만나고 온 사람은 누구지.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

막을 새도 없이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지난 일을 복기하며 우연재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스스로가 피곤했다.

“계산해 드릴까요?”

친절한 물음이 상념을 일깨웠다.

“아, 네.”

문서윤은 생수와 함께 카드를 내밀었다. 지금처럼 잡념에 빠질 바에야 얼른 가서 공부에 집중하는 게 나을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우연재가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툭 튀는 남자가 한산한 복도에 서 있으니 단번에 눈에 띄었다. 언뜻 보니 손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저거 안 마시지 않나,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쳤다. 조금 전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지 않은 이유에는 우연재의 까다로운 취향도 한몫했다.

무언가를 읽어 내리듯 커피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이내 손에 들린 물건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걸 왜 거기 버려?”

갑자기 나타날 줄 몰랐는지 천천히 뒤를 돌아본 우연재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안경을 쓰고 있는데도 표정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쓰레기야.”

“새거 아냐? 안에 음료 들어 있는데 버리면 어떡해.”

문서윤은 쓰레기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포스트잇에 뭐라 글자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싶어 살피려는데 우연재가 더럽다는 듯 옷을 잡아끌었다.

“내용물 진작 버렸어. 어디 갔다 와?”

“편의점. 이건 네 거.”

“자판기 여기 있잖아. 뭐 하러 1층까지 갔어?”

“그냥 바람 좀 쐴 겸. 집중 안 돼서.”

문서윤은 생수 하나를 우연재의 품에 넘겨주며 에둘러 대답했다. 여기서 떠들 생각은 없던 터라 들어가자고 하려는데 손에 들린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내용부터 확인했다.

[기말고사 끝나고 밥 먹어야지.]

아버지였다.

방학이 시작되면 본가로 돌아가야 하는 마당에 거절할 핑곗거리도 없었다. 뭐라고 답장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자 어깨에 딱딱한 느낌이 닿았다. 슬쩍 고개를 내리자 우연재가 장난치듯 턱을 걸친 채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교수님이네?”

“응.”

“나도 같이 가.”

“우리 집?”

“응.”

볼일은 거기서 끝났다는 듯 우연재가 느릿하게 몸을 떼어 냈다. 문서윤은 어깨 너머로 멀어져 가는 얼굴 대신 안경테 끄트머리를 짧게 쳐다보다 물었다.

“너 간다고 하면 아버지야 당연히 환영하실 것 같긴 한데……. 갑자기 왜?”

“그냥. 너네 본가 가 본 지도 오래됐고.”

괜찮으려나. 문서윤으로서는 우연재가 같이 가는 게 편했다. 지난번 식사 자리처럼 아버지의 관심이 제가 아닌 옆에 앉은 이를 향할 테니까.

“오랜만에 네 방 구경도 하고?”

“구경할 게 뭐가 있다고.”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평범한 방이었다.

오겠다는 친구를 오지 말라고 꾸역꾸역 밀어내는 것도 이상해 문서윤은 짧은 고민 끝에 메시지를 작성했다.

[연재랑 같이 갈게요.]

이건 너무 통보인가. 말을 어떻게 고칠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뻗어져 나온 팔이 내용을 채 수정하기도 전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우연재가 키득거렸다.

“교수님한테 드릴 말씀도 있고.”

아저씨랑 같이 식사하자는 말이겠지. 문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한숨만 내쉬었다.

곧바로 열람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순간, 우연재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켜려던 문서윤은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갈 생각이었다면 들어오기 전에 말했을 텐데, 언질도 없이 갑자기 짐을 싸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연재는 열람실을 나서는 대신 곧장 옆으로 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편의점에 간 사이 좌석을 바꾼 모양이었다.

“왜 여기 와?”

문서윤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물었다.

“오랜만에 문서윤이랑 짝꿍 기분 좀 내게.”

우연재가 별것 아니라는 양 샐쭉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짝꿍이라니.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단어였다.

그래도 교복을 입던 기억이 떠올라 입술 사이로 픽,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서윤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제 짐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가장 아래쪽에 남은 전공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책상 위로 손을 댔을 때였다. 예상치도 못하게 손날에 차가운 감촉이 닿아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떼 책상을 확인했다. 미세하게 물기가 고여 있었다. 음료병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고인 듯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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