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문서윤은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중간고사 기간에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기말고사 시즌이 되자 확실히 컨디션이 버겁다는 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 그만둬야 하나.’
시험 기간 전부터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평일을 통째로 아르바이트에 쏟아부으려니 시간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제대 후에 곧바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라 익숙해 별다른 어려움이 없겠거니, 하고 만만하게 생각한 제 잘못이었다.
‘하긴. 그때는 다른 거 안 하고 알바만 했지.’
제대 후 공부를 할까 고민한 적도 있으나 당시에는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버지와의 어색함과 우연재에 대한 감정 때문에 통 집중하지 못하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에 비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2학기도 기숙사에서 살 테고 우연재와의 관계는 전과 다를 바 없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으니 아르바이트는 이번 방학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갈등이 때때로 마음을 스쳤다.
용돈이 부족해 시작한 일이 아닌 데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든 원인들이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니 공부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졌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문득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연재도 이이 따라서 미국 갈 테니까 그때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졸업하고 나서라도.’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을 드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깊게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진작 결론을 내린 문제였다.
‘따라가서 뭐 하려고. 취준 계획이나 세우자.’
2학기 역시 훌쩍 지나갈 테고, 반년 뒤면 3학년이었으니 슬슬 취업과 관련된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학점 관리부터 해야 했다.
피곤함을 떨쳐 내기 위해 재차 손에 힘을 실었을 때였다. 손등 위로 차가운 물기가 닿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남태은이 아메리카노가 든 테이크아웃 잔을 흔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뭐예요?”
“뭐긴. 금요일에야 종강하는 불쌍한 똥강아지를 위한 너그러운 나의 마음.”
“시험 끝났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문서윤은 커피를 받아 들며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아직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저와 달리 남태은은 바로 어제 종강한 참이었다. 잠깐 쉴까 싶어 의자를 돌려 맞은편을 살피자 잔뜩 어질러진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어제부터 짐을 싼 것 같은데, 어째 널브러진 짐들이 그대로였다.
“형 언제 가요?”
“나? 오늘 가지.”
문서윤은 시간을 가늠했다.
“저 시험 끝나면 얼굴 못 보겠네요.”
“그래서 지금 보는 거잖아. 아, 똥강아지. 나 부탁 하나 있는데.”
“뭔데요?”
남태은이 그답지 않게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기숙사에 누구 좀 데려와도 되냐? 저거 정리 좀 하게.”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이리저리 어질러진 짐 더미가 한가득이었다.
“난 또 뭐라고. 괜찮아요.”
“너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렇지.”
“저 마지막 시험 세 시간짜리라 어차피 30분 있다 나가야 돼요.”
“쯧쯧. 불쌍한 새끼.”
남태은이 혀를 찬 뒤 짓궂게 머리를 짓눌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낯선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웬 향수?”
문서윤은 코를 킁킁거리듯 콧잔등을 찌푸리며 물었다. 향수 잘 안 뿌렸던 것 같은데.
“선물받은 건데…….”
남태은은 무언가 탐탁지 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더니 곧 건너편 책상으로 손을 뻗어 향수를 잡아챘다. 방향제를 난사하듯 향수를 방 여기저기에 뿌린 그는 마지막에는 얌전히 앉아 있는 이의 정수리 위로 칙, 포말을 날려 보냈다.
“뭐 해요?”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머리카락을 더듬으며 물었다. 독한 냄새는 아니라 상관없었지만 뜬금없는 행태에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방에 뿌리는 건 그렇다 쳐도 뭐 하러 제 머리에까지 뿌리는지 모르겠다.
휘둥그렇게 변한 얼굴이 웃겼는지 남태은이 씨익 웃었다. 표정을 보니 제 머리카락에 향수를 끼얹은 건 장난이 확실했다.
“이거 선물해 준 새끼가 이따 올라올 새끼인데……. 성격이 좀 개 같아서. 별로 안 쓴 거 알면 지랄 떨걸.”
선물로 준 향수를 안 썼다고 지랄까지 떤다고?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말을 대충 뭉개는 걸 보니 자세히 말하기 곤란한 듯했다. 순간 애인인가, 하는 직감이 찾아왔다. 학기 초 애인이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튼 알았어요.”
문서윤은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궁금한 바만 물었다.
“그나저나 형 고향 내려가는 거예요?”
“아니. 서울에 있을 듯.”
“본가 서울 아니지 않아요? 애인 집?”
“어어, 그렇지, 뭐.”
힐금 시간을 확인한 남태은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캐리어에 마구잡이로 옷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문서윤은 그가 사다 준 커피를 홀짝거리며 하기 싫은 기색이 뚝뚝 떨어지는 등을 응시했다. 그마저도 귀찮았는지 남태은은 금세 질린 기색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넌 본가 들어가지?”
“그렇죠.”
“짐은 언제 빼게?”
“수요일까지 있어도 되니까……. 차 가져와서 내일이나 모레에 빼려고요.”
오늘 본가에 들르니 간 김에 차를 가지고 올 생각이었다.
방학까지 했는데 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오늘 바로 본가에 가는 건 내키지 않아 일요일쯤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마침 아버지와의 식사 약속 때문에 아르바이트 스케줄을 내일로 바꿔 둔 참이었다. 귀가를 며칠 늦추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핑계였다.
“가을에야 얼굴 보겠네. 아, 아니다. 나 어차피 서울에 있지. 보고 싶으면 연락해라?”
“형 애인이 화내는 거 아니에요?”
성격이 지랄 같다는 말이 떠올라 묻자 남태은이 어깨를 으쓱였다.
“직장인이라 뭐……. 평일에 연락해.”
“아무튼 알았어요. 형은 빨리 짐이나 싸요.”
“에휴, 모르겠다. 난 그냥 누워 있을란다.”
문서윤은 픽 웃으며 다시 책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낯선 향수 냄새가 공기를 떠돌아다녔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왔을 때는 시험 종료까지 20분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매 시험마다 시간을 꽉 채워 꼼꼼히 보려고 하는 편이긴 해도 이번에는 고민되는 문제가 있어 생각보다 답안 제출이 오래 걸렸다.
“평소보다 늦게 나오네.”
강의실 문을 닫자마자 먼저 나간 우연재가 어슬렁거리듯 다가오며 알은체를 해 왔다.
“중간에 헤맸어.”
“어떤 거?”
“마지막 문제.”
“아, 그거.”
시험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느 순간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문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에서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우연재는 뭔가 심기에 거슬리는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왜 저러지. 문서윤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나 우연재는 대답하기는커녕 말도 없이 모자를 벗기더니 둥그런 정수리에 코를 박듯 고개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접촉도 접촉이지만 학교라는 공간이 문서윤을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는 황급히 우연재의 손에 들린 모자를 뺏어 들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뭐야.”
“문서윤 머리 안 감았나 해서.”
“뭔 소리야. 감았어.”
문서윤은 머리카락을 대충 넘긴 뒤 모자를 눌러썼다. 남태은이 향수 떡칠을 한 바람에 남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썼을 뿐이지, 머리는 일어나자마자 감은 상태였다. 아침에 씻는 버릇을 모르지 않을 텐데 뜬금없이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또 장난을 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쩐지.”
운전석으로 다가간 우연재가 문을 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존나 좋은 냄새 나네.”
좋은 냄새라고 말하는 것치고는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영 수상했다. 평소처럼 장난이겠지. 문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익숙한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데 문득 희미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제 머리카락에서 폴폴 풍겨 나오는 인공적인 냄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연적인 향기였다.
웬 꽃냄새지. 뒤를 돌아보자 보라색과 하얀색이 섞인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
“웬 꽃다발? 특이하게 생겼네.”
“아네모네라는데.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렇잖아. 집에 그 여자도 있다며.”
그 여자라면 아버지와 결혼한 분을 지칭하는 말일 테다. 문서윤은 멋쩍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여자가 뭐야.”
“그럼 뭐라고 불러?”
우연재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어투였다.
“너는 뭐라고 부르는데. 네가 부르는 대로 부를게.”
“……딱히 불러 본 적 없는데.”
성인이 된 후에 가족으로 묶여서인지 어떤 호칭어를 붙이든 어색한 사이였다. 드물게 마주쳐도 겸연쩍게 웃으며 지나치거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정 교수님?”
문서윤은 간신히 그럴싸한 호칭어를 끄집어냈다.
“그 여자도 교수야?”
우연재의 물음 뒤로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문서윤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걸. 아버지랑 같은 학교 다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가지가지 하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으나 귓가에 닿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지가지. 우연재가 별 뜻 없이 내뱉은 단어가 혀끝을 맴돌았다. 예의가 없을 정도로 솔직한 발언이었으나 문서윤은 어른들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핀잔을 날리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아버지와 그 사람의 관계를 정의 내리기에는 가지가지라는 말보다 적합한 단어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머리를 스쳐서였다. 배울 거 다 배운 인간들이 왜 그랬을까.
그러잖아도 숨 막히는 자리에 가는데 우울한 생각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서윤은 천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 같은 잡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네모네는 꽃말이 뭘까, 같은 싱거운 생각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