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문서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왔니.”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과 함께 문 교수의 시선이 등 뒤에 선 우연재에게로 향했다.
“지난번에 뵙고 오랜만에 뵙네요, 교수님.”
“하하. 그래. 우리 집 오는 것도 오랜만이지?”
우연재와 함께 가겠다고 했을 때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치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환대였다. 문서윤은 아버지가 우연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옆에 선 정 교수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걸었다. 그녀 역시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는지 웃는 얼굴에서 멋쩍음이 묻어 나왔다.
“이건 정 교수님 드리려고 사 왔어요.”
우연재가 태연하게 그녀를 향해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우연재라고 합니다. 서윤이 소꿉친구예요.”
“고마워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점심시간도 지났는데 다들 들어가서 밥부터 먹자꾸나.”
문서윤은 아버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편해야 하는 집이 조금도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만에 방문했던 우연재의 본가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집에서 밥 먹는 것도 오랜만인데, 많이 먹으렴. 연재 너도.”
“그럼요. 잘 먹겠습니다.”
속이 갑갑한 것과는 별개로 식사는 물 흐르듯이 시작되었다. 때늦은 점심과 더불어 식탁 위에서는 가벼운 잡담이 오갔다. 우연재가 없었다면 오고 갈 일이 없는 잡담들이었다.
중간중간 끼어든 대화 덕분에 문서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소화제를 먹고 오기는 했어도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보다는 간간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리는 편이 나았다.
“아. 서윤이한테 유학 얘기는 들으셨어요?”
“유학?”
뜬금없는 대화 주제에 문 교수는 미간을 좁히며 손님 옆에 앉은 아들을 응시했다. 의아함이 잔뜩 드러나는 그의 시선에 문서윤은 우연재의 종아리를 걷어차듯 발을 움직였다.
“유학 가고 싶니?”
“아직 못 들으셨나 보네요. 저희 아버지가 제안하셨는데.”
대답할 새도 없이 우연재가 말을 낚아챘다. 문서윤은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우연재를 향해 눈가를 찌푸렸다. 그 의미를 빤히 알아들었을 텐데도 우연재는 눈웃음을 치듯 눈꼬리를 찡그렸을 따름이었다. 설핏 찌푸려지는 눈매는 왜 말을 안 했냐는 의미인지, 말을 안 했을 줄은 몰랐다는 의미인지 그 뜻이 모호했다.
이쯤 되자 엎질러진 물이란 생각과 함께 포기가 밀려왔다. 문서윤은 눈치 주기를 그만두며 한숨을 삼켰다.
“회장님께서?”
그사이에 아버지와 우연재 사이에서는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저 졸업하면 아버지 따라갈 예정이라 혹시 서윤이도 생각 있나 해서요.”
“고민해 보다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문서윤은 아버지의 취조가 이어지기 전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중요한 문제는 나랑 상의를 했어야지. 혼자 결정하면 되겠니.”
“졸업 전까지 시간도 좀 남았고……. 그래서 생각 못 했어요. 죄송해요.”
“저는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교수님이 설득 좀 해 주세요.”
“야.”
능글맞은 우연재의 태도에는 대놓고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 우연재가 눈썹을 끌어 내리며 애교를 부리듯이 웃었다.
“왜애. 같이 가고 싶은데.”
“나한테는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한 적 없잖아. 아저씨 말씀하실 때도 가만히 있더니.”
“교수님 앞에서 말해야 더 잘 먹힐 것 같아서.”
친구끼리 투닥거리며 나눌 법한 대화가 식탁 위를 맴돌았다.
“좋은 기회 같은데. 서윤이 너도 고민 좀 해 봐라.”
“……네.”
문서윤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집에는 언제 들어오려고?”
난처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정 교수가 자연스레 대화에 합류했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색한 이를 대할 때처럼 긴장한 기색이 비쳤다.
“한국대도 오늘 종강한 걸로 알고 있어서.”
“그래. 방학이니 집에 들어와야지.”
아버지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문서윤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벌써 답답함에 숨이 조여드는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나가서 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지난 4개월간 기숙사에서 살았으니 두 달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테다.
“교수님 이 얘기도 못 들으셨나 봐요.”
차 가지고 간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대답하려는 순간, 우연재가 뜬금없이 대답을 가로챘다. 아버지가 또 뭘 못 들으셨지? 의아함이 치밀어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우연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윤이 방학 때 저희 집에서 지내기로 했는데.”
내가 언제? 저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바보처럼 입술만 벌려 쳐다보자 새까만 동공이 느긋하게 굴러왔다. 눈이 마주치자 우연재가 샐샐 눈꼬리를 접었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술이 퍽 장난스러워 보였다.
“아까 뭐야?”
문서윤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우연재의 팔을 낚아챘다.
“뭐가.”
다소 거친 행동에도 우연재는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방을 훑어 내렸다. 입대 전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때와도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는데 뭘 저렇게 구석구석 확인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무슨 너희 집에서 지내.”
“아, 그거.”
이내 집요한 시선이 책상 근처에서 멎었다. 우연재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을 받으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가에서 지내자는 건 아니고.”
역시 그냥 한 말이었구나. 안도감부터 느껴야 하는지 수습 방향을 캐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 평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금 전처럼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가뿐한 어투였다.
“오피스텔에 같이 있자고.”
“뭐?”
우연재의 뒤를 졸졸 쫓아가던 문서윤은 다시금 책상 앞에 멈춰 선 소꿉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생뚱맞은 소리에 미미한 황당함이 번졌다. 그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털어 내기 위해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도대체 뭔 소리야. 내가 왜 네 오피스텔에서 지내.”
“이렇게까지 질색할 일이야? 존나 무안하네?”
“아니, 이런 얘기 한 적 없잖아.”
잔뜩 헝클어트린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 허무함만큼이나 얕은 황당함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깃들었는지 우연재가 슬쩍 눈가를 찡그렸다. 덩달아 콧잔등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너 불편해 보이길래 도와주려고 한 말인데.”
불편해 보였다는 말에는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래도 아버지에게까지는 티가 나지 않았을 테다. 제 불편함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그랬듯 우연재뿐이었다.
“불편해도 어쩔 수 없잖아. 집인데 그냥 참아야지. 그리고 불편하다고 너랑 살아?”
본가에서 지내면 늘 속이 답답할 게 불 보듯 훤했지만, 우연재와 지낸다고 해서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누가, 어떤 의미로, 또 어떤 식으로 불편한지가 다를 뿐 마음이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진짜 까먹었나 보네…….”
“뭘 까먹어?”
“대학 가면 같이 살자고 한 사람은 문서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나 봐.”
깜박, 불이 켜지듯 삽시간에 밀려오는 기억들이 있고는 했다. 정말 새까맣게 잊어버린, 그래서 다른 누군가를 통해 도화선에 불이 붙고 나서야 불현듯이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1학년 때는 안 될 것 같다고 해서 미뤘더니…….”
뒤늦게 떠오른 약속에 문서윤은 입술만 달싹였다.
“2학년 되자마자 군대 가고.”
“야, 그건…….”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갑자기 기숙사 들어갔다고 통보하네?”
말문이 막혔다.
분명 제가 우연재와 한 약속이 맞았다. 중학생 때 생각 없이 내뱉은 약속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일부러 쌩깐 줄 알았는데 지금 반응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새까만 눈동자가 다시 책상을 향했다. 문서윤은 힐금 우연재의 시선이 닿은 곳을 살폈다. 눈에 띄는 물건이라고는 그에게 선물받은 향수 몇 병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거의 쓰지 않아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랬으면 존나 슬펐을 텐데.”
슬프니 어쩌니 운운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오래된 약속을 단순히 옛날얘기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문서윤은 할 말이 없어 입술 안쪽만 깨물었다.
“뭐, 교수님한테 같이 사니 어쩌니 한 건 네가 약속 기억하는 줄 알고 한 말이긴 한데.”
“……미안.”
그제야 오피스텔 구조가 머릿속을 둥실거렸다. 방이 여러 개 딸린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안 쓰는 방이 있길래 관리하기 귀찮아 비워 뒀겠거니 지레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가 왜 기숙사에서 살아, 서윤아.’
처음 기숙사행을 내뱉었을 때 대놓고 구겨지던 표정과 빈정거리던 말투 역시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어쨌든 내가 까먹은 거잖아.”
“그럼 고려해 봐.”
팔을 뻗은 우연재가 향수를 하나 집어 들더니 슬쩍 돌려 그 모양을 살폈다.
“뭘.”
“같이 사는 거. 빈방 너 쓰라고 남겨 둔 거야, 처음부터.”
저를 위했다는 말에 미안한 마음이 한층 커졌다.
문서윤은 한참을 머뭇거리고 나서야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그냥.”
언제 관찰하는 시선을 보냈냐는 듯 눈동자가 앞에 선 이를 향했다. 툭. 가벼운 소리와 함께 향수를 내려 둔 우연재는 장난을 치듯 말꼬리를 높였다.
“네가 언제 얘기할지 궁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