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84)화 (84/139)

84화

“……진짜 미안.”

“아무튼 고민해 봐. 너 불편해 보여서 한 말은 맞으니까. 교수님도 허락하실 것 같던데.”

“……알았어. 고민해 볼게.”

문서윤은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같은 침실을 쓰자는 것도 아니고, 다른 방을 쓰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방학에도 아르바이트를 할 예정이니 같이 살아도 막상 마주치는 시간은 길지 않을 테다.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 게 언젠데.’

그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오려는 실소를 꾸역꾸역 삼켰다. 이토록 쉽게 바뀌는 마음이 하찮기만 했다.

이런 마음은 쉽게만 뒤바뀌는데 다른 한편에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게 우스웠다. 짝사랑에 흔들리는 인간은 이렇듯 구차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지 우연재가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내더니 픽 웃었다. 눈꼬리에 장난이 스몄다.

“진짜 미안하니까 그렇지.”

도리어 문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연재가 툭 내뱉은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미처 잊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미안한데, 그간 혼자서 기다리던 약속이라고 생각하자 죄책감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성인 남자 두 명으로 꽉 찬 기숙사와 텅 빈 오피스텔이 함께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면 피아노 쳐 줘.”

“갑자기?”

뜻밖의 말에 문서윤은 눈을 깜박였다.

“나 놀러 올 때마다 쳐 줬잖아. 오랜만에 너네 집 오니까 생각나는데. 치웠어?”

“아니. 있긴 있는데…… 나 손 굳었을 텐데.”

“틀려도 어차피 몰라.”

문서윤은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집에 계신 게 마음에 걸렸지만, 피아노를 친다고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았다.

“조율 안 됐을 것 같은데.”

방에서 나와 피아노가 있는 방문을 열자 익숙한 악기가 나타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가 주기적으로 사람을 불러 조율하던 피아노였다. 지금은 어떻게 관리가 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결혼을 하셨으니 제가 자리를 비운 2년 동안 방치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집안일을 봐 주시는 아주머니께서 빼놓지 않고 청소를 해 주시는지 피아노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문서윤은 창문부터 열었다. 초여름의 바람이 햇살처럼 들어차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깐 머뭇거린 그는 발걸음에 망설임을 매단 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굳게 닫힌 덮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자 익숙한 건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서윤은 괜히 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레 건반을 눌렀다. 청명한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부드럽게 울렸다. 조율이 안 된 것 같기는 했으나 못 들어 줄 정도는 아니었다.

“뭐 쳐 줄 거야?”

우연재가 활짝 열린 창가에 기대서며 물었다.

“그냥,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손부터 풀어야 했다. 문서윤은 손가락을 풀듯 건반을 누르며 습관처럼 익은 악보들을 떠올렸다. 피아노를 그만둔 지 7년이나 지난 데다, 그마저도 2년은 건반조차 건드리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곡이 나올지 의문이었다.

짧게 망설이던 그는 페달 위로 발을 올리며 왼손 검지는 검은 건반 위로, 오른손 엄지는 흰 건반 위로 올려 두었다.

“틀려도 웃지 마.”

오랜만에 치려니 긴장이 몰려왔다. 힐금 우연재를 쳐다보며 경고 아닌 경고를 늘어놓자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입꼬리를 따라 뺨이 올라가며 긴 눈매가 달싹였다.

“틀려도 모른다니까.”

“뭘 몰라. 건반 하나만 잘못 눌러도 소리 이상해지는데.”

게다가 기교가 꽤 들어가는 곡이라 한 번 삐끗하면 잘못 쳤다는 게 티가 났다.

“하…….”

문서윤은 한숨과 함께 긴장을 몰아냈다. 콩쿠르도 아니고, 친구 앞에서 치는 피아노였다. 비웃음을 살 일도, 지적을 당할 일도, 혼날 일도 없을 테다.

왼손으로 첫 음을 잡음과 동시에 연주가 시작됐다. 뒤이어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동시에 각기 다른 건반을 누르자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선율이 되살아났다. 머릿속으로 계산할 틈도 없이 손가락이 본능처럼 건반을 밟아 댔다.

리스트의 곡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며 고요한 공기 안으로 찬찬히 내려앉았다.

왜 갑자기 이 곡이 떠올랐는지 의문이었다. 리스트의 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데다 나른하고 조용한 선율이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듯한 오후와 잘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차가운 건반을 누를 때마다 느릿하고 보드라운 느낌의 곡조가 이어졌다. 녹턴 3번에 속하는 곡은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에 붙인 가곡을 편곡한 곡이었다. 리스트가 두 번째 사랑을 위해 작곡한 곡이기도 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금기시된 사랑을 하던 중이었으니 어떤 의미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가곡을 편곡했는지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선율이 끊어질 듯 점차 느려지더니 왼손에서만 나오던 음에 오른손이 더해지자 순식간에 그 속도가 빨라졌다. * 카덴차가 등장하는 부분이었다.

리스트와 그가 곡을 바친 여인은 불륜 관계였다. 이혼이 금기시되던 가톨릭의 벽을 넘지 못해 결국은 실패로 끝난 관계이기도 했다.

문득 우연재에게 이 곡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대단한 사랑이라고 빈정거리지 않을까. 본래도 사랑을 번식 욕구로 취급하고 있으니 그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제 마음이 우연재에게는 불륜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실패한 사랑으로 기억되리라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괜한 의미 부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건반 위를 종횡하는 손가락처럼 감정이 이성적 통제를 벗어나 이리저리 흘러가는 순간은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카덴차가 끝나며 점차 잦아든 선율이 처음과 비슷한 부드러운 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가볍게 튀는 듯한 음은 약간 무겁게 느껴지는 소리에 섞여 들었다. 동시에 부지런히 움직인 왼손이 오른손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선율에 힘을 실었다. 톡톡 튀어 다니던 피아노 소리 뒤로 화음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다시금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두 번째 카덴차가 등장했다. 삐끗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럴싸한 음이 흘러나왔다. 거듭 평화를 찾은 피아노 선율이 느릿하게 이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분 남짓 되는 곡을 끝까지 연주할 생각은 없었는데, 오랜만에 치는 피아노에 애정이 녹아들었다.

느려지는 속도와 함께 왼손이 몇 번이고 오른손을 타고 넘어갔다. 동시에 화음이 언뜻 무거워지더니 잠시 끊어질 듯하던 소리가 다시금 천천히 이어졌다. 곡의 후반부였다.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지자 오롯이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별생각 없이 선택한 곡이지만 제법 괜찮은 선곡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재에게 피아노를 쳐 줄 수 있다는 것도, 이렇게나마 금기시된 마음을 들키지 않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전부 좋았다.

결국 실패로 끝날 감정이라 해도 짧게 흘러가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피아노에 애정이 녹아든 게 아니었다. 감춰 둔 마음이 피아노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것에 가까웠다.

왼쪽 손가락이 연이어 검은 건반을 눌렀다. 오른손 엄지가 음의 태초에 속하는 흰 건반을 밟고 몇 초가 지난 뒤에야 약지가 4음계 위의 검은 건반을 눌렀다. 곡의 끝자락이었다.

“…….”

문서윤이 건반에서 손을 떼어 낸 건 연주가 끝나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2년 만에 피아노를 치는 흥분 때문인지 곡에 동화된 것처럼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호흡을 골라야만 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새어 나갈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우연재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도, 다소 흥분한 호흡도 피아노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오랜만에 치려니까 민망하네.”

뺨으로 열이 올랐다. 문서윤은 손을 내리며 우연재가 선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엇비슷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눈매가 살짝 찡그려졌지만, 입꼬리에 흠뻑 걸리는 미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처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우연재가 엄지와 검지로 제 뺨을 누르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느슨하게 웃는 낯과 달리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에서 이채가 아른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카덴차, 피아니스트가 기교를 보여 주기 위해 연주하는 화려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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