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꽃다발을 살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꽃은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따로 원하시는 꽃 있으세요?”
“불륜 상대한테 선물할 거라 꽃말이 그런 쪽이었으면 좋겠는데.”
당황한 여자가 눈을 깜박였다. 우연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소품 준비 중이라서요.”
“어머, 그렇구나. 깜짝 놀랐어요. 연극 이런 거 준비하시나 봐요?”
너털웃음을 터뜨린 여자가 잠깐 고민하듯 냉장고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꽃을 한 아름 꺼내 들었다. 보라색과 흰색이 한데 섞여 있는 종류였다. 장미나 튤립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래서 누구나 그 이름을 아는 꽃은 아니었다.
“아네모네인데, 배신이라는 꽃말이 있거든요. 원래 5월쯤에 피는데, 올해는 날씨 때문에 살짝 늦게 피어서요. 마침 저희 꽃집에도 있네요.”
“예쁘네요. 그걸로 만들어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꽃다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그쪽이 꽃말을 알고 있으면 기분 나쁘라고 준비한 선물은 맞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꽃에 큰 관심이 없고, 있더라도 꽃말까지 외우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 테니, 혹 저 커다란 꽃다발에 불쾌함을 느끼더라도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다.
우연재는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건성으로 차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포장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우연재의 감정 곡선은 대개 평행선을 그리고는 했다. 크게 즐거운 일도, 크게 기분 나쁠 일도 없는 직선이었다. 문서윤이 군대에 다녀온 이후로 종종 마이너스를 찍고는 했지만, 근래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문서윤과의 관계가 2년 전처럼 정상 궤도에 오르고 있으니 특별히 기분이 언짢을 만한 사건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꼬박꼬박 기숙사에 들어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는 게 문제였으나 남은 시간을 셈하면 그 문제 역시 어느 정도 인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였다. 문서윤이 기숙사로 들어가며 제 시야 밖을 벗어날 일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다지 나쁘지 않은 하루가 지나가는 듯했다.
“…….”
평온하게 직선을 그리던 선이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혔다. 시커먼 불쾌함이 그 간극을 빼곡하게 채우기까지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낯선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누군가 면전에 지독한 화학 배합물을 뿌려 댄 것처럼 찰나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우연재는 대놓고 역겨운 감상을 표현하는 대신 모자에 짓눌린 갈색 머리카락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런 냄새는 선물한 기억이 없는데. 문서윤이 지닌 향수는 전부 제가 준 것들일 텐데, 미심쩍었다.
‘전부…….’
전처럼 속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또다시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우연재는 더 이상 문서윤에 대해 확언할 수 없었다. 1년 6개월이라는 공백이 존재하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2년 만에 문서윤의 방에 들어섰을 때는 짜증이 스몄다. 방에 밴 체향이 좆같은 향수 냄새에 완전히 가려진 탓이었다.
그러나 문서윤을 몰아세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와 합의하지 않은 이야기를 문 교수에게 꺼낸 터라 문서윤이 제 꾀에 넘어오기 전까지는 살살 기어들어 가는 척을 해야만 했다. 적당히 말랑하게 굴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다.
애써 가장한 평정심은 익숙한 책장을 확인하자마자 파삭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우연재는 제가 잘 모르는 향수 한 병을 집어 들었다. 그 형태를 자세히 살피자 언뜻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곧바로 스치는 순간이 없어 아닌가 했더니, 역시나 제가 선물한 향수였다. 문서윤에게 선물하는 향수는 노트가 지극히 한정적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폴폴 풍겨 대는 낯선 냄새를 맡은 순간, 제가 선물한 향수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한발 물러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분 더러운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하긴.’
본가에 들르지도 않는데 여기서 낯선 향수의 출처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개 같은 기숙사.
“미안하면 피아노 쳐 줘.”
“갑자기?”
익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한 그는 능숙하게 문서윤의 감정을 이용했다. 죄책감을 자극해 피아노를 쳐 달라 조른 건 반쯤은 심술에 가까웠다.
“나 놀러 올 때마다 쳐 줬잖아. 오랜만에 너네 집 오니까 생각나는데. 치웠어?”
“아니. 있긴 있는데…… 나 손 굳었을 텐데.”
“틀려도 어차피 몰라.”
예상대로 문서윤은 거절하지 못했다. 오래된 약속을 운운하며 미안함을 자극한 게 퍽 효과적이었다.
우연재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냄새를 풍겨 대는 친구를 따라 옆방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창문부터 연 문서윤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움직여 피아노 앞에 앉았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완연했으나, 쳐 주겠다고 한 말을 지키려는지 손가락이 사뿐히 건반 위로 올라섰다.
마침내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자 청명한 소리가 차분한 공간을 울렸다. 창으로 들어차는 햇살과 제법 잘 어울리는 음이었다.
“뭐 쳐 줄 거야?”
우연재는 창가에 기대서며 물었다. 머리카락을 적시듯 듬뿍 흘러들어 온 햇살이 어깨를 타고 내려가 따끈따끈하게 몸을 데웠다.
“그냥,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손가락부터 풀 생각인지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문서윤이 양손을 건반 위로 올려 두며 힐긋 쳐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틀려도 웃지 마.”
말간 얼굴과 달리 목소리가 제법 비장했다. 경고하는 어투에 우연재는 소리 없이 웃었다.
“틀려도 모른다니까.”
“뭘 몰라. 건반 하나만 잘못 눌러도 소리 이상해지는데.”
툴툴거리듯 볼멘소리를 내뱉은 문서윤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우연재는 피아노에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나 문서윤이 쳤던 곡들은 모조리 꿰고 있었다. 그러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그래서 문서윤이 치곤 했던 곡을 모를 수가 없었다.
‘리스트네.’
작곡가들의 개인사는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리스트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부드럽게 내려앉는 선율이 그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친 곡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우연재는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곡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리스트의 상대는 첫 번째도 불륜, 두 번째도 불륜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다고.’
로맨틱하게 포장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상대가 하나여야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연인이라니.
‘그 여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금기시되는 사랑을 하는 자기 자신한테 심취한 것 같은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번식 욕구에서 기인된 호르몬의 농간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봐도 리스트가 정말 그 여인을 사랑했는지 의문이었다. 하물며 정상적인 관계도 아닌 불륜이었지 않은가.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 감정에 회의적이라 해서 불륜을 납득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우연재는 그런 부류를 이해하지 못했다.
번식욕을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감정으로 포장해 미래를 약속했다면, 인간이 정립한 관념에 맞춰 한 사람과만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았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짐승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명명한 이상, 인간이 만든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게 정상적인 삶이었다.
그래서 우연재는 리스트가 만든 곡을 로맨틱하다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술성도 개소리고.’
그는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이 주는 예술성, 감정, 혹은 감동 따위를 느껴 본 적도 없었다.
음악에 감정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무형의 물질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떠들어 대는 건 어디까지나 음악을 고급스럽게 향유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나이 많은 음악가의 곡이 더 값어치 있어야 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감정을 실어 연주했을 테니까.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흔히 천재라 불리는 신예들이 꾸준히 등장했고, 그들은 어린 나이부터 단번에 두각을 드러내고는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세상을 20년도 살지 못한 인간이 고작 음악 하나에 감정을 실어 사람들을 울릴 수 있다는 게. 도대체 어떤 환희와 슬픔을 겪어 봤다고.
결국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허상에 불과했다. 연주하는 이가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감정을 도리어 듣는 사람이 느끼다니, 이토록 우스운 역설은 존재하지 않을 테다.
우연재는 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꿉친구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 스스로가 음악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문서윤은 피아노와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 곧게 뻗은 눈썹이 설핏 찡그려졌다.
우연재는 문서윤을 오롯이 홀로 차지했다. 문서윤이 피아노를 버린 덕분에.
다시는 칠 일이 없다는 확답을 받아 냈지만, 문서윤은 여전히 짜증이 날 정도로 피아노와 잘 어울렸다.
혹시라도 저와 문서윤 사이에 다시 저 악기가 끼어들까 불쾌함이 밀려왔다.
어쩌면 문서윤이 들려주는 선율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현듯이. 음악을 통해 감정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매도한 게 우습게도.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게도 감출 수 없는 애정이었다.
“…….”
건반을 누르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길게 이어지는 음과 함께 곡이 천천히 종장에 접어들었다.
우연재는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선율에는 조금도 집중하지 않았다. 새까만 홍채에 고여 든 존재는 오로지 문서윤뿐이었다. 혹시라도 저 하얀 얼굴에 피아노가 깃들지 않았는지 샅샅이 살펴야만 했다. 발그스름한 뺨이 무언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떠는 것만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오랜만에 치려니까 민망하네.”
문서윤이 건반에서 손을 떼어 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눈가가 살짝 찡그려진 채였다. 발갛게 물든 뺨 아래로 애정이 듬뿍 젖어 든 입술이 달싹거렸다.
“…….”
시선이 뒤엉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새까만 시선은 항상 문서윤을 향해 있었으므로.
아.
깨달음이 찾아오는 건 삽시간이었다.
머릿속을 직격하는 지각에 입꼬리가 얄팍하게 올라갔다.
문서윤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이렇게 무해하게, 온순하게, 순진하게 제 속내를 훤히 드러내 놓고선.
그만큼 노골적인 얼굴이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여실히 묻어 나와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 없을 만큼.
초여름의 햇빛이 제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에게로 스며들었다. 그 따스한 기운은 느릿하게 흘러내려 차가운 건반 위로 떨어지더니 종내에는 바닥으로 스러졌다.
녹아드는 햇빛에 바닥의 그림자가 희게 질렸다. 문서윤이 페달을 밟고 있어 오직 우연재만이 오롯이 밟고 선 그림자였다. 흐릿한 색채의 그림자가 점차 환희로 물들며 저를 밟고 선 이의 다리를 타고 게걸스레 올라갔다.
우연재는 웃었다. 서서히 올라간 손이 이를 드러낸 웃음을 감추듯 뺨을 짓눌러 입술을 가렸다.
본성부터 숨기는 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