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성인 남자 두 명이 짐을 옮기는 데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백미러로 멀어져 가는 기숙사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 침대 들어온다던데.”
우연재가 툭 내뱉었다.
“아, 기사님한테 연락 왔어?”
“응.”
“시간 딱 맞췄네.”
문서윤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본가에 들어가는 대신 우연재와 지내겠다고 하자 편하게 자라며 침대를 주문해 주셨다.
‘교수님이 침대 주문해 주셨다고?’
‘응. 며칠 뒤에 기사님 오실 것 같은데.’
‘뭐어……. 알았어.’
어쩐지 마뜩잖아하는 기색이었으나, 커다란 가구를 옮겨야 하는 일에 미리 집주인의 양해를 구하지 않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게. 존나 아쉽게. 며칠만 더 늦게 왔으면 내 침대에서 재웠을 텐데.”
“뭐라는 거야.”
별것 아닌 농담에 동요하게 될 것 같아 문서윤은 괜히 제 침대가 들어갈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려 냈다.
‘그러고 보니까…….’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쓰자 퍼뜩 드는 의문이 있었다. 지금까지 의아하게 생각하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빈방 있는 거 말 안 했어?”
“뭐가.”
우연재가 핸들을 돌리며 대꾸했다.
“지금까지 계속 네 침대에서 잤잖아.”
오피스텔의 크기와 구조상 방이 여러 개인 건 알고 있었지만, 굳이 다른 사람의 집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구경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빈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연재가 아파 오피스텔을 찾은 날 마음을 졸이며 한 침대에서 자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우연재가 콧잔등을 찌푸리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픽 웃었다.
“너 불편했을까 봐 그렇지.”
차마 불편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책임을 떠넘기자 새까만 눈동자가 힐긋 닿아 왔다.
“선 긋네…….”
“…….”
“침대 넓고 지금까지 나랑 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냐고 물으면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와 다른 말을 얹으면 괜히 친구를 의식한 꼴이기도 했고. 이성도 아니고 동성 간에 의식이라니, 이상해 보일 게 뻔했다.
우연재가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소꿉친구라는 관계에서 의식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을 테다.
“그리고 문서윤 존나 매정하네?”
저를 향해 토로되는 서운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설핏 찌푸려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아파서 누워 있는데 다른 방 가서 자려고 했어, 그럼?”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속상하니까 오늘 울어야지.”
찌푸려진 얼굴이 펴지며 입꼬리에 장난기가 매달렸다. 습관 같은 농담에 문서윤은 옅게 웃으며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앞으로 문서윤이 같이 자 주지도 않을 텐데.”
어쩐지 미묘하게 들리는 뉘앙스였으나 우연재 특유의 말버릇일 테다.
신호에 걸린 차가 매끄럽게 멈춰 섰다. 핸들을 툭, 툭 두드리던 소리가 몇 번 이어지더니 가벼운 목소리가 시선을 잡아챘다.
“오늘 알바 가지?”
“응.”
1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평일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참이었다. 대신 저녁 타임에만 하던 일을 낮까지 늘리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 알려 줘.”
깜빡. 빨간불이 초록 불로 바뀌자 차가 출발했다. 문서윤은 별 의미 없이 되물었다.
“아르바이트 시간은 왜?”
“왜긴.”
새까만 시선이 스르르 닿았다가 물러났다.
“알아야 뭘 할 거 아냐.”
* * *
뭘 한다는 걸까, 의아함을 품은 게 무색하게도 문서윤은 엉겁결에 우연재를 따라 일과를 보내는 중이었다.
사이다 캔을 딴 그는 탄산이 올라오는 음료를 레몬청 위에 부어 넣으며 최근의 제 생활을 곱씹었다. 그렇게 거창한 일과는 아니었다. 평일 오전이나 아르바이트가 없는 주말은 공부를 하거나 우연재와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오후와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이었다.
‘우연재는 스터디 나갈 줄 알았더니……. 하긴, 필요 없지.’
문서윤은 청이 사이다와 잘 섞이도록 휘저은 뒤 진동 벨을 호출했다. 이제는 일이 손에 익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움직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우연재도 한 달 뒤면 3학년 2학기였다. 슬슬 취업 준비를 시작하며 스터디를 꾸리는 게 보통이었지만, 실상 그에게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졸업 이후의 계획이야 알아서 세우고 있을 테고, 미국행은 확정이니 대부분의 동기들과는 방향이 다를 테다.
‘아저씨 말씀 들어 보니까 졸업하자마자 바로 나갈 것 같았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지 궁금했으나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괜히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같이 가자는 소리나 들을 게 분명했다.
“왜 유학 포기했는지 모르겠네.”
조용한 혼잣말은 샷을 내리는 기계 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문서윤은 아직도 우연재가 갑작스레 미국행을 미룬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시 아저씨나 이모의 반응을 떠올려 보면 두 분이 내리신 결정은 아닌 듯했다. 우연재 고집에 거의 포기하신 뉘앙스였던 것 같기도 했고.
어릴 때야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단순히 기쁘고 좋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의아한 부분이 제법 많았다.
‘생각이 있겠지.’
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우연재가 내린 결정이니, 어련히 계획이 있을 터였다. 그의 부모님이 유학 포기 선언에도 회유 대신 수긍을 택한 것 역시 철두철미한 계획성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빠. 샷 하나만 더 내려 줘요.”
“알았어. 아메리카노야?”
“네.”
문서윤은 곧장 원두를 내렸다. 얼음 잔을 든 송주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상큼한 냄새가 풍겨 왔다.
“향수 바꿨어?”
평소라면 의식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연재가 남태은의 향수에 질색한 이후부터는 저도 모르게 향수에 반응하게 됐다.
“네. 이제 여름이잖아요. 기분 전환 겸 바꿔 봤어요. 남자 친구가 선물해 줬는데 괜찮아요?”
“잘 어울려.”
“냄새 심하지는 않죠? 카페라 심하면 안 되는데.”
“괜찮아. 손님들은 모르실 것 같은데.”
“그럼 다행이고요.”
송주아가 자연스럽게 샷이 내려온 에스프레소 잔을 가져갔다. 문서윤은 주문지를 확인한 뒤 다른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향수 이야기를 해서인지 문득 우연재가, 정확히는 그의 향수 냄새가 떠올랐다.
근래에는 특별히 외출할 일이 없어 뿌리지 않는 듯했지만, 문서윤에게는 우연재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향수가 있었다. 지난겨울 허리를 끌어안는 팔에 크게 놀라지 않은 것 역시 우연재의 얼굴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그의 향수 냄새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거 쓰는 것 같던데……. 여름이라 바꾸려나.’
수집하듯이 사 모으는 편은 아니어도 우연재의 드레스룸에 가면 향수를 몇 병 볼 수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향수를 쓰는 사람들도 꽤 많으니, 우연재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사용하는 여름 향수도 지난겨울에 맡은 냄새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문서윤 제가 알기로는 2년 사이 취향이 바뀐 게 아니라면 우연재가 선호하는 향은 늘 비슷했다.
“하여튼 까다롭다니까.”
문서윤은 다 만든 음료를 트레이 위에 올려 두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카페에서 오피스텔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문서윤은 호출한 택시에 올라탔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 데다 어릴 때부터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한 편이 아니라 버스나 지하철보다는 택시가 훨씬 익숙했다. 가끔 우연재가 근처에 나올 일이 있으면 그의 차를 타고 가는 편이었지만, 그게 아니면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는 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둔 핸드폰이 미세한 진동음을 알렸다. 우연재인가 싶어 확인하자 태은 형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종강 이후 첫 연락이었다.
“여보세요.”
- 똥강아지. 잘 살고 있냐?
오랜만의 연락이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죠. 종강한 지 2주 좀 안 됐는데 잘 살고 못 살고 할 것도 없지 않아요?”
우연재의 오피스텔로 들어간 지도 어느덧 2주째였다.
문서윤은 창가에 툭 고개를 기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시간은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기숙사에서 살 때는 하루하루가 일정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근래에는 전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다 이런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쌓여 갔다.
“형은 별일 없죠?”
- 나야 똑같지.
“바쁘지 않아요? 형 3학년이잖아요. 저희 과 보니까 3학년부터 스터디 많이 하던데.”
- 어쭈. 똥강아지 주제에 부모 노릇 하려고 하네?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소리에 문서윤은 또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슨 부모 노릇이에요. 잔소리한 것도 아닌데. 그냥 물어본 거지.”
- 대한민국은 이게 문제란 말이야. 왜 꼭 나이에 정해진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3학년 때 스터디 해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
그 뒤로 일장 연설이 줄줄이 이어졌다. 문서윤은 남태은의 실없는 농담을 들으며 빠르게 지나쳐 가는 풍경을 응시했다. 밤이라 이곳저곳 켜져 있는 불빛들이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