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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92)화 (92/139)

92화

- 아무튼. 시간 되면 밥 한번 먹자고. 나 요즘 심심해.

“좋긴 한데 저 주말밖에 시간 안 돼요. 평일에 아르바이트하느라.”

- 주말? 흠.

잠깐 말소리가 끊겼다. 뒤늦게야 남태은의 애인이 직장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심심하다고 말하는 것도 애인이 평일에 출근해서가 아닐까 싶어 문서윤은 잠깐 머뭇거렸다.

“형 주말에 애인이랑 데이트하느라 바쁘지 않아요? 시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은데…….”

시간 안 맞으면 개강하고 봐요, 하고 말하려는데 문득 카페 정기 휴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면 저 카페 휴일에 만나도 되고요.”

- 아냐. 이번 주는?

“이번 주요? 모레?”

- 엉.

딱히 약속이랄 게 없었다.

“상관없는데……. 안 바빠요?”

- 바쁘길 바라는 눈치다?

“그게 아니라 혹시라도 저 때문에 데이트할 시간 뺏기는 걸까 봐 그렇죠. 어차피 개강하면 얼굴 보잖아요.”

- 애인 주말에 출장 가서 나도 시간 비어.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 술 마시면 더 좋고.

“알았어요.”

문서윤은 선선히 수락했다. 그러고 보니 종강 후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외출한 날이 손에 꼽았다. 동기들이야 어색하지는 않아도 우연재와 매일같이 붙어 지내다 보니 데면데면한 면이 있었고, 동창들 역시 남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는 편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사람도 만날 겸 외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형 어디 살아요? 중간에서 만나요.”

- 그럴래? 뭐 먹을래.

“전 다 괜찮아요.”

- 일단 갈 만한 데 찾아보고. 정 없으면 학교 근처에서 먹어도 되고.

“그럼 형이 정해서 연락 주세요.”

- 오냐.

자연스레 통화가 끊겼다. 이야기를 오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화면에 떠오른 숫자가 생각보다 길었다.

“다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서윤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택시에서 내려섰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목덜미를 주무르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려는 순간 불쑥 튀어나온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문서윤.”

완전히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우연재가 어깨 위로 턱을 얹었다. 향수를 뿌린 것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어딘가를 다녀온 모양새였다.

“어디 갔다 왔어?”

“아버지 호출.”

아저씨 만나고 왔구나. 잘은 몰라도 모임 같은 데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멀뚱히 서 있는 대신 슬쩍 몸을 물렸다. 아무리 학교 근처가 아니라 해도 다 큰 남자 둘이 딱 붙어 있으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일부러 밀어내는 걸 눈치챘는지 우연재가 픽 웃으며 몸을 물리더니 이내 오피스텔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전화 안 받던데.”

우연재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힐긋 시선을 던져 왔다.

“전화했었어?”

“운전하는 김에 데리러 갈까 하고.”

“택시 타고 왔어.”

“봤어.”

봤다고? 타이밍 좋게 마주쳤다 싶더라니, 차에서 내리다 저를 발견한 듯했다. 데리러 간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귀가 시간이 카페 마감 시간과 우연히 겹친 것 같았고.

문서윤은 우연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색한 사이도 아니고, 어색해질 만한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잠시간 흐르는 침묵에 숨이 막혔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힐금 우연재를 살폈다.

저런 옷 입어서 그런가. 평상복 차림이 아닌 걸 오랜만에 보는 데다가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에 은은한 향수 냄새까지 깔리자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몰려오는 듯했다.

향수 냄새야 익숙했지만, 오히려 익숙해서 더 의식하게 됐다.

긴장이 몰려온 탓인지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움찔, 손끝을 떨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춰 서는 일 없이 금세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같이 들어오니까 좋네.”

우연재가 비밀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그러게.”

엘리베이터보다 너른 공간에 들어서자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문서윤은 안으로 들어서며 티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앞에서 직접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갈지, 아니면 벨을 누를지 고민하며 쭈뼛거린 게 언제였냐는 듯, 이제는 이 공간이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신발을 벗는데 우연재의 손에 들린 조그마한 종이 가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 사 왔나 보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선물.”

“갑자기?”

우연재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가방을 벌려 내용물을 확인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박스가 들어 있었다.

“지나가는데 생각나서.”

“어……. 고마워. 뭐야?”

빈말로라도 거절할 사이는 아니었다. 문서윤은 박스를 꺼내 뚜껑을 열며 물었다.

“향수.”

대답이 끝나자마자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병이 나타났다. 투명한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웬 향수?”

“저번에 너희 집 갔을 때 보니까 내가 선물해 준 거 다 거기 있길래.”

“아…….”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라 기숙사에 들고 간 게 없기는 했다. 기껏 받은 선물을 쓰지도 않고 방치한 것 같아 멋쩍음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다른 향수 없지 않나……. 쓰는 거 있어?”

문서윤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향수병만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우연재에게 받은 선물이라 기분이 좋았다.

“없잖아, 서윤아.”

문서윤은 재차 대답을 종용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느닷없지만, 오늘 이렇듯 시선이 뒤엉키는 건 지금이 처음이란 사실이 자각됐다. 밖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고, 엘리베이터에서는 도둑 눈짓을 보낸 게 전부였으니 얼굴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우연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사근사근하게 웃는 낯이었다.

문서윤은 한 박자 늦게야 그가 묻는 말에 대답했다.

“없지. 나 향수 잘 안 쓰는 거 알잖아.”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준 사람 면전에 대고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라 눈치를 보는데 우연재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물받은 건?”

“어?”

“다른 사람한테 선물받은 건 없냐고.”

“없지. 누가 향수를 선물로 줘.”

여자들은 모르겠으나 남자들 사이에 향수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문서윤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잘 쓸게. 고마워.”

“향 맡아 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은 우연재가 향수를 가져가더니 이내 손목까지 낚아챘다. 칙, 소리와 함께 액체 같은 포말이 튀어 올랐다. 우연재의 향수 위로 다른 향수가 뒤섞였다. 천천히 섞이는 냄새에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잡힌 손목을 얕게 떨었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조용한 공간 때문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우연재가 향수를 뿌린 손목을 끌어다가 코를 묻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들이마시는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져 절로 손끝이 곱아들었다.

“잘 어울리네.”

“나한테 맡아 보라면서 왜 네가 맡아.”

긴장한 걸 들킬 것 같아 문서윤은 자연스레 팔을 비틀어 빼냈다. 우연재를 따라 하듯 손목을 코끝에 가져다 대자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분명 좋은 냄새일 텐데도 순간적으로 뺨에 열이 올라 그 외의 감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손목에 섞여 든 우연재의 향수 냄새만 의식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좋다. 잘 쓸게.”

무난한 답을 내놓자 우연재가 삐딱하게 웃었다.

“응. 좆같은 거 쓰지 말고 내가 골라 주는 거 써.”

태은 형 향수가 그렇게까지 별로였나. 저렇게 질색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약간 의아했으나 우연재 취향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문서윤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주말에 뭐 해?”

우연재가 향수를 다시 건네주며 물었다.

“왜?”

병을 받아 들던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왜?”

우연재가 말을 따라 하며 슬쩍 눈썹 앞머리를 찌푸렸다.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가는 목소리에는 되물을 줄 몰랐다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같이 사는데 이 정도도 못 물어보게 하네…….”

“아니. 못 물어보게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물어보니까 그렇지. 토요일은 친구 만날 것 같은데.”

차마 남태은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대충 둘러대자 우연재가 눈을 맞춰 왔다. 스르르 내리깔리는 눈꺼풀에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친구 누구?”

“그냥…….”

“아까 통화한 그 새끼?”

그 안에 숨겨진 새까만 눈동자가 무언가를 캐내듯 가늘게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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