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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94)화 (94/139)

94화

“너도 참 너다.”

꼴꼴꼴 소주를 따른 남태은이 손을 내밀었다. 문서윤은 반쯤 남아 있던 소주잔을 그의 잔에 톡 하고 갖다 댔다. 유리잔끼리 부딪치며 쨍, 맑은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거길 홀랑 들어가냐.”

“그러게요.”

자조적으로 웃은 그는 소독용 알코올 맛이 나는 액체를 한 번에 삼켰다.

저녁을 먹기 위해 만난 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2차로 이어졌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근황 이야기가 사적인 주제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걔 아직도 네가 좋아하는 거 모르는 거 확실해?”

남태은이 앞에 놓인 닭발을 먹으며 물었다. 우연재는 절대 먹지 않을 음식 중 하나였다.

“무슨 뜻이에요?”

왜 갑자기 대화 주제가 그리로 튀는지 알 수 없어 문서윤은 의아하다는 표정만 지었다.

“아니, 너한테 질투 어쩌고 했다며.”

“아…….”

뜬금없는 질문이더라니, 친구 사이에 질투 운운한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확실하다니까…….”

문서윤은 확언했다.

“진짜 확실해?”

확신할 수 있는 이유야 여럿이었다. 제게 섹파가 있다는 오해도 오해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들이었다.

‘만약 자기 좋아하는 거 알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는 거부감은 두 번째 문제였다.

우연재는 짝사랑을 성욕에서 기인한 착각이라 치부했다. 만약 제 짝사랑 상대가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면 섹스하자는 제안 따위를 할 리가 없다는 의미였다. 성욕이 충족되면 결국 좋아한다 착각하는 마음만 더 커질 테니까.

게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를 오점으로 여기고 있는 그가 제 감정을 알면서도 침묵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제가 아는 우연재라면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답부터 얻어 낸 후 잘못된 감정이라고 설득할 게 분명했다.

‘……아닌가.’

이미 잤으니까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으려나. 남들과는 핀트가 살짝 엇나간 우연재의 사고 회로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질릴 때까지 대 주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우연재라면 알면서 모르는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제게 해가 되는 감정이라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문서윤은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야 입을 열었다.

“형. 저 걔랑 17년이나 알고 지냈어요. 걔 잘 알아요. 알았으면 이럴 리가 없다니까…….”

“모르는데 너한테 질투 어쩌고 소리 한다고? 게…… 아무튼, 역겹다고 한 주제에? 보통은 그런 거 싫어하면 그런 소리도 안 하지 않냐?”

남태은이 황급히 말소리를 줄였다. 문서윤은 물방울이 맺힌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저번에도 형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걔 그거 말버릇이라니까요.”

“존나 수상한데.”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요. 술이나 마셔요.”

대화가 길어졌다가는 잤다는 이야기까지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문서윤은 맞은편에 있는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따라 넣었다. 투명한 액체가 조그마한 잔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건데……. 아무튼, 그래서 앞으로 어쩌게.”

“뭐가요.”

“계속 그 관계 유지하면서 살 거야?”

그 관계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불명확했다. 우연재와 저 사이를 정의 내리는 명명보다는, 제가 일방적으로 우연재를 짝사랑하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형은 내가 우연재랑 잔 거 모르니까.’

우연재와의 섹스를 완전히 없었던 일로 칠 수는 없지만, 관계 유지에 대한 물음이라면 정답은 하나였다.

“그렇겠죠.”

문서윤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소주잔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꼭 순순히 수긍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걔 애인 생길 때마다 속앓이하고?”

“그러다 포기하게 되면 차라리 다행 아니에요?”

포기가 되지 않더라도 문서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익숙해지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을까, 또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포기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다행인 거냐. 너 혼자 실컷 상처받다가 멀어지는 거지.”

남태은의 거리낌 없는 발언에도 문서윤은 옅게 웃기만 했다. 그런 태도가 답답했던지 한숨을 푹 내쉰 남자가 구석에 대충 던져둔 겉옷을 뒤적거렸다. 일어서는 손에는 담뱃갑과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한 대 피우려고. 어쩔래?”

“아…….”

우연재가 싫어할 것 같은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나 우연재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술을 마신 데다, 남태은과 이야기를 나누어서인지 담배가 당기긴 했다. 그가 별말 없이 자리를 비웠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피울 거냐는 물음을 듣고 나니 이상하게 흡연 욕구가 치밀었다.

“같이 가요.”

문서윤은 짧은 고민 끝에 몸을 일으켰다.

흡연 구역은 술집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가까웠다. 문서윤은 남태은에게 담배 한 개비를 받아 들었다.

“이거 너 평소에 피우던 거보다 독할 텐데.”

“아까워요?”

“어쭈. 똥강아지가 이제 농담도 던질 줄 아네?”

가소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린 남태은이 라이터를 켜며 빈손으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문서윤은 그가 짓누른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한 뒤 불쑥 내밀어진 라이터에 담배를 가져다 댔다. 짧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내뱉자 끝으로 불이 붙었다.

“콜록. 아…….”

처음 담배를 배울 때처럼 기침이 튀어나왔다. 불을 붙여 주자마자 곧장 제 담배를 문 남태은이 옆에서 낄낄거렸다.

“독하다니까.”

그나마도 어쩌다 가끔 피우던 담배를 오랜만에 피우자 몸이 더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서윤은 콜록거리면서도 연기를 몇 모금 더 머금었다. 술에 취한 객기이든 아니면 오기이든 멍청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만 피워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못 피우면 그만 피워라.”

남태은이 툭 팔을 쳤다.

“한 개빈데 못 피울 건 또 뭐에요. 그거나 주세요, 주머니에 넣었다가 돌려 드릴게요.”

가벼운 반팔 차림인 남태은과 달리 문서윤은 얇은 카디건을 걸친 채였다. 손에 잡고 있기 불편했던지 남태은이 군말 없이 담뱃갑과 라이터를 건넸다. 문서윤은 두 물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흡연 구역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공기를 떠돌아다녔다.

우연재랑 안 마주치겠지. 냄새가 날아가기도 날아가겠지만, 곧장 씻고 방에 들어가면 눈치채지 못할 테다.

“문서윤 아닌 척하더니 마음고생하나 보다?”

“제가요?”

“엉. 너 군대에서 꼭 뭔 일 있을 때만 담배 피웠잖아. 학기 초 때 말고 잘 안 피우길래 끊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또 피우는 거 보니까 무슨 일 있긴 있구나 싶은데.”

담배를 알려 준 게 남태은이었으니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기는 했다. 문서윤은 손가락 사이에 걸린 기다란 물체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회색 연기가 검은색 공기에 섞여 차츰 흩어졌다.

“딱히 마음고생한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오랜만에 피우는 건 맞고? 기침하는 거 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한데.”

“오랜만이긴 하죠.”

“그럼 마음고생 중인 거 맞네. 골초도 아니고, 담배 자주 피우지도 않는 놈이 오랜만에 흡연 욕구 드는 이유야 뻔하지.”

남태은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존나 갑갑해서 그런 거 아냐.”

문서윤은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얇은 피부 위에서 담배 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문득 치민 흡연 욕구의 원인을, 스스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불이 훤히 들어온 거실이 그를 반겼다. 문서윤은 머뭇거리듯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우연재가 거실에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마음에 가라앉았다. 그와 싸운 게 남태은과의 약속 때문이었는데, 그 자리에 갔다 오는 길이라 그런지 아직 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예상대로 소파에 앉아 있는 우연재가 보였다. 문서윤은 망설이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마주치는 시간이 길지 않다 해도 계속 어색하게 구는 게 더 불편했다.

뒤늦게야 오늘은 피하는 게 나았으려나, 하는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소파 옆으로 다가간 이후였다.

“우연재.”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자 시선이 스르르 흘러왔다. 우연재가 눈매를 찡그렸다. 짜증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약속 갔다 와?”

“……응.”

거짓말을 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일 테다.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몰라 우연재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는데 그가 제 옆자리를 툭 건드렸다.

“옆에 앉으라고?”

담배 냄새가 날 것 같아 쉽사리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향수도 아니고 담배 냄새쯤이야 당연히 날아간 지 오래겠지만, 옷에 냄새가 배었을까 봐 걱정이었다.

“응. 얘기 좀 해.”

며칠 전 일을 이야기하려는 모양이었다. 주춤거리던 문서윤은 결국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뼘 정도 거리를 벌린 게 무색하게도 손쉽게 몸을 움직인 우연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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