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95)화 (95/139)

95화

어떻게 말을 꺼낼지,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언제 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서늘한 기류가 흐른 게 언제였냐는 듯 먼저 몸을 치대 오는 우연재의 태도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계속 싸늘한 태도를 유지했다면 그 행동이 낯설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을 테다.

우연재가 고개를 떨어트리더니 어깨에 코를 묻었다.

“담배 냄새 나네…….”

오래전 담배를 피우다 걸린 날이 겹쳐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피게 됐다. 문서윤은 아무렇게나 올려 둔 손가락을 의미 없이 꼼지락거렸다.

“담배 피웠어?”

껴안듯 허리를 가로지른 팔이 움직이더니 커다란 손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문서윤은 그제야 남태은의 담배와 라이터가 제 주머니에 있음을 깨달았다.

“문서윤.”

“어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뭉개려는 순간 우연재가 어깨에 묻은 코를 떼어 냈다. 고개까지 완전히 바로 한 건 아니라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뭉그러졌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자 빤히 올려다보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담배 맛있어?”

그때처럼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긋하게 물어보는 어조에 문서윤은 간신히 말을 골랐다.

“맛있어서 피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피우는 거지. 그리고 나 거의 안 피워.”

내내 붙어 있었으니 근래에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일단 씻고 올게. 그때 얘기해.”

그렇다 해도 담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냄새부터 지우는 게 좋을 것 같아 허리를 껴안은 팔을 슬쩍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가르쳐 줘.”

느슨하게 들러붙은 팔에 힘이 실리며 몸이 압박됐다.

“뭘?”

“담배.”

우연재가 무척이나 평온한 목소리로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갑자기?”

잘못 들었나 싶어 문서윤은 눈을 깜박거렸다.

우연재가 시끄러운 술집을 싫어하는 데에는 담배 냄새도 한몫했다. 그 정도로 담배를 혐오하는 편이라 갑자기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담배를 피운단 사실을 걸렸을 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빈정거리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 지금처럼 진심은 아니었다.

“그냥.”

당황한 되물음에도 우연재는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말꼬리를 늘였다.

“질투 나서.”

뜻밖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질투 많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너한텐 그 소리가 좆도 아니었나 보다, 그치.’

그때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 절로 입술이 달싹여졌다. 동시에 문서윤은 지금이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걸 직감했다.

“뭐가…….”

그러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단어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눈썹꼬리를 축 떨어트린 채 올려다보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저도 모르게 되묻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너랑 못 하는 일 다른 사람은 너랑 하잖아.”

“…….”

“질투 나니까 내가 배워야지 어떡해.”

지난 몇 달간 때때로 떠오르곤 하던 의문이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문서윤은 우연재와 저 사이의 유대를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유대감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우연재처럼 굴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여전히 특별한 소꿉친구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이다가도,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구는 친구에게 비정상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미안해졌다.

“우연재.”

역시 사과하자. 마음에 대한 사과는 못 하더라도.

문서윤은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내며 우연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쪽 무릎을 접어 완전히 소파 위로 올리듯 자세를 틀자 허리를 감싼 팔이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다. 어깨에서 뭉그러지던 머리카락이 그와 함께 달아났다.

“그때 ……미안해.”

“미안?”

우연재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따라 하듯 느지막이 자세를 바꿨다.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는데.”

“그냥, 내가 그날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서.”

문서윤은 짧게 침묵했다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평소대로 물어본 것뿐인데 내가 괜히 다른 말 했다가 네 기분만 상하게 만들었잖아. ……형 싫어하는 눈치라 그랬어. 미안.”

우연재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한쪽 눈이 찡그려지며 눈매가 미세하게 달싹였다.

“좆같이 군 건 난데 왜 네가 사과해.”

“어?”

“문서윤이 자기 일 전부 다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긴 하지.”

문서윤은 눈만 깜박였다.

“내가 뭐라고, 그치.”

자조적인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네가 나한테 숨기는 거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빡돌았나 봐.”

우연재가 툭,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약한 목소리였다.

“그러다 질투 나서 너한테 화낸 거고.”

문서윤은 손을 움찔거리다 말았다. 선을 그은 사람은 분명 저였는데, 우연재가 이제 와 동의를 표하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꼭 그가 그의 일을 제게 전부 말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만 같아서.

“앞으로는 조심할게.”

우연재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고개만 살짝 돌리며 말했다.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터라 자연스레 시선이 맞닿았다.

“미안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과에 문서윤은 또다시 입술만 달싹였다. 그에게 사과할 생각이었지, 사과를 받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아니, 나는……. 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어.”

“내가 좆같이 군 거라니까, 서윤아.”

“…….”

“그러니까 앞으로도 선 잘 그어.”

순간 심장이 쿵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선을 긋는다며 제게 서운함을 토로하던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우연재는 지금 제게 선을 그으라 말하고 있었다.

“그래야 내가 잘 지킬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너한테 선 그으려던 거 아니야.”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우연재의 팔을 붙잡으며 오해를 다잡기 위해 애썼다.

“아니야?”

우연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찌푸려진 눈매 때문인지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라니까. 네가 형 싫어하니까 말 못 한 거고……. 앞으로는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우습게도 우연재와 저 사이에 또 다른 선이 생기는 건 싫었다. 그와 선을 그으려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소꿉친구라는 관계에서까지 선을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알았어, 그럼.”

우연재가 천천히 머리를 떼어 냈다.

“그래도 화낸 건 나니까. 내가 미안해.”

“……아냐. 거짓말한 내 잘못도 있지.”

선선히 받아들이는 우연재를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었는지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안도가 마음 한구석으로 스며들었다.

“그래서…….”

우연재가 팔을 뻗어 아무렇게나 놓인 손을 툭 건드렸다.

“안 가르쳐 줘?”

뭘? 순간적으로 치민 의문은 몇 초 정도가 흐른 뒤에야 해소되었다. 뒤늦게야 담배를 배우니 뭐니 했던 소리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넘겨짚은 차라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문서윤은 뺨을 찌푸렸다.

“피워서 좋을 것도 없는데 뭘 또 가르쳐 줘.”

“왜애.”

우연재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늘어지는 말꼬리가 꼭 고집을 피우는 어린아이 같았다.

“넌 그새 배워 왔잖아.”

문서윤은 괜히 입술을 핥았다. 성인이니 담배를 피우는 건 자유였지만, 기호 식품이라고 하기에는 몸에 이로울 게 없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질투 난다니까.”

고작 담배 하나에 질투가 난다는 우연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술렁거렸다.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존재하는 그런 질투심일 텐데, 그 단어 하나에 흔들리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과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하자 우연재가 입술을 삐죽이듯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가르쳐 주기 싫은가 보네.”

“…….”

“다른 새끼한테 배울까?”

“야…….”

“네가 있는데?”

문서윤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한숨을 흘려보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고작 한두 개비 피운다고 바로 중독되지는 않으니 한 번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몸에 나쁜 물건이라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충족되면 우연재도 더는 조르지 않을 테다.

‘싫어할 거 뻔하기도 하고. 질투도 그냥 하는 소리겠지.’

깔끔 떠는 성격도 성격이지만, 흡연 자체가 우연재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피우는 거라 배우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일단 알았어. 대신 한 개비만 피워.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옆으로 돌아앉느라 소파에 올린 다리를 내리며 문서윤은 천천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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