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발걸음이 향한 장소는 거실과 연결된 통창이었다. 거실에 널따란 발코니가 딸린 구조라 문만 열면 얼마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마침 꼭대기 층이라 이웃에 폐를 끼칠 일도 없어 흡연 장소로 적절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미지근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조용한 산책길을 걸으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초여름의 바람이었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담뱃갑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서 사각형 특유의 각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툭 튀어나온 모서리를 짓누르자 뭉툭한 감각이 손끝을 찔러 댔다. 종이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아프지는 않았다. 몰려오는 긴장감을 억누르기에 딱 좋은 정도였다.
그는 우연재가 어슬렁거리듯 다가오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진짜 피울 거야?”
“응.”
“……담배 냄새 싫어하잖아.”
“너랑 피우는 거면 상관없는데.”
우연재가 기대듯이 난간 위로 팔을 올렸다.
“문서윤 기분이 얼마나 좆같았길래 군대에서 담배 시작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거야 어릴 때니까 그런 거고…….”
많이 피우는 건 아니어도 너무 철없는 이유로 시작했나 싶어 살짝 민망해졌다. 문서윤은 말을 얼버무리며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돌려주는 거 왜 까먹었지.’
개강하고 나면 남태은에게 두 갑으로 갚아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반쯤 열린 뚜껑 아닌 뚜껑을 열자 우연재의 시선이 진득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긴장할 일이 아닌데도 소꿉친구 앞에서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것 같아 초조함이 몰려왔다. 문서윤은 괜스레 입술 안쪽을 이로 짓누르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물어.”
살짝 고개를 내린 우연재가 입술만 벌렸다. 난간에 기댄 팔을 떼어 낼 생각이 없어 보여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팔을 뻗어 그 입술에 담배를 물렸다. 너무 가까이 다가갔는지 톡 튀어나온 손가락뼈가 입술을 스쳤다. 깜짝 놀라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데 도리어 우연재가 손목을 잡아챘다.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
담배를 슬쩍 물려던 입술이 명확한 발음을 내뱉었다.
“나 더러워?”
“뭐?”
“왜 이렇게 화들짝 놀라. 떨어지겠네…….”
손목을 쥔 손이 물러난 건 툭 불거진 뼈에 닿았던 입술이 담배를 제대로 문 직후였다.
우연재는 입술 사이로 힘을 실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치를 보며 손을 떼어 낸 문서윤이 지레 찔린 사람처럼 눈을 피하며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곤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라이터를 켰다.
그 모든 과정을 우연재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관찰했다. 덕분에 불길이 담배 끄트머리에 닿은 순간 붉은 입술이 달싹거리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문서윤에게 약한 척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쪽이 훨씬 잘 먹히니까.
우연재는 틈을 노렸다. 제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마음에 차지 않는 새끼를 만나러 가게 둔 것도 그래서였다. 만나고 나서도 저와의 말다툼을 떠올릴 테고,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문서윤이 자기 일 전부 다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긴 하지.’
아니나 다를까, 먼저 선을 긋자 문서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너한테 선 그으려던 거 아니야.’
우연재는 그렇게 손쉽게 원하는 답을 얻어 냈다.
일부러 예쁜 척 가증을 떨고, 속상한 척 눈꺼풀을 내리깔고, 미안한 척 사과하는 일련의 행위에서 죄책감 따위는 한 톨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었다.
먼저 굽히고 들어간 건 잠깐의 감정적 동요에 매몰돼 문서윤에게 계속해서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문서윤에게 이상한 새끼들이 꼬이는 건 문서윤 탓이 아니었다. 예뻐서 꼬여 드는 새끼들이 문제일 뿐, 문서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새빨갛게 태우던 감정을 갈무리한 것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문서윤은 제 본성을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고민하는 낯을 바라보며 질투 운운한 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쓰레기 기호품인 담배를 배우고 있는 것도 그래서였고.
차라리 문서윤에게 배워 같이 피우면 피웠지, 다른 새끼와 이런 시간을 공유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저 꼴을 다른 새끼가 계속 보게 두라고. 우연재는 집요한 시선으로 문서윤의 입술을 훑어 내렸다. 불이 붙은 하얀 담배가 도톰한 입술을 빠져나와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렸다.
노골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유순한 눈매가 이쪽을 향했다. 우연재는 저도 모르게 혀를 세워 입술 사이에 든 담배를 건드렸다. 허연 물체가 까딱, 위아래로 흔들렸다.
“불붙여 줄 테니까…….”
제게 담배를 알려 주는 게 머쓱했는지 문서윤이 또다시 입술을 핥았다. 붉은 혀가 설핏 드러났다 자취를 감췄다.
“응.”
그 모습을 샅샅이 쳐다보며 우연재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숨 한 번 들이마셔.”
“왜?”
“그래야 불붙으니까.”
문서윤이 라이터 부싯돌을 돌렸다. 우연재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은 채 고개만 숙였다.
“한 번 빨아.”
시키는 대로 순순히 담배를 빨아들이자 짤막한 호흡과 함께 불이 붙었다.
“한 번 빨면?”
우연재는 부러 살살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서윤이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주춤거리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냥…… 피우면 되지.”
그냥 피우라고. 우연재는 다시 담배를 입술 사이로 가져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쓰레기 같은 맛이 났다.
“콜록.”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기침을 내뱉자 문서윤이 서둘러 담배를 쥔 손목을 잡아챘다.
“한 번 피워 봤으니까 됐잖아. 그만 피워. 이거 독해.”
독한 담배 피우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그 의미를 눈치챈 듯 문서윤이 입술을 깨물며 핑계를 둘러댔다.
“원래 이렇게 독한 건 안 피우는데……. 아무튼, 그만 피워. 이제 무슨 맛인지도 알 거 아냐. 재떨이 할 만한 거 찾아올 테니까 잠깐 들고 있어 봐.”
어쩔 줄 몰라 하던 문서윤은 쥐고 있던 담배를 넘긴 뒤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우연재는 연이어 기침을 내뱉는 대신 싸늘한 시선으로 문서윤이 쥐여 준 담배를 내려다봤다. 원래 피우던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담배도, 라이터도 문서윤 게 아닌 다른 이의 물건이란 의미였다.
그게 왜 네 주머니에 있는데. 얌전하게 굴자 다짐한 게 무색하게도 매캐한 담배 연기가 머리를 가득 채우듯 두통이 밀려왔다.
“하.”
우연재는 입꼬리를 비틀며 문서윤이 빨았던 담배를 입술 사이로 물었다. 깊게 들이마신 뒤 내뱉자 두통이 한층 짙어졌다.
“그만 피우라니까?”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문서윤이 제법 엄한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손가락에 있던 담배를 앗아 가 종이컵에 쑤셔 넣었다. 뒤이어 입술에 걸린 담배마저 뺏어 들었다.
“콜록. 아…….”
우연재는 기침을 내뱉었다. 미간이 좁혀지며 단정하게 뻗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조그마한 기침을 몇 번 더 내뱉은 그는 커다란 몸을 치대는 대형견 흉내를 내며 문서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른 몸이 상대의 체구에 맞춰 구겨졌다.
“어지러워.”
“많이?”
애달프게 중얼거리며 기대서인지 문서윤은 허리를 감싼 팔을 내치지 못했다. 도리어 깜짝 놀라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챈 우연재는 몸에 힘을 실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릿속을 맹렬하게 떠도는 욕구를 그대로 실현할 것만 같았다. 담배 냄새 때문에 익숙한 체향이 느껴지지 않는 건 퍽 아쉬웠으나, 문서윤을 끌어안고 있는 덕에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응. 머리 도는 것 같아.”
그는 문서윤이 거리를 두려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몸을 기대듯 허리를 감싼 팔을 옥죄었을 뿐이다.
“문서윤.”
“부축해 줄까? 들어갈래? 바람 쐬는 게 나을 것 같…….”
“다른 냄새 달고 오지 마.”
결벽적인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의 문제가 감각 쪽으로도 이상을 일으키는지 우연재는 냄새에 예민한 편이었다. 문서윤에게서 풍기는 이질적인 냄새를 곧잘 알아차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담배는 물론 향수 냄새도 포함해서.
“어쩌다 피운 거야. 자주 안 피우는 거 알잖아.”
“다른 냄새 달고 오지 말랬더니 다른 소리만 하네…….”
문서윤이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다른 소리는 무슨 다른 소리야. 아무튼 담배 끊을게. ……그러니까 이런 걸로 질투니 뭐니 하지 마.”
뒷말은 망설임 끝에 내뱉는 것처럼 들렸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우연재는 이번에도 모르는 체하길 택했다.
담배도 담배지만 문서윤이 끊어 내야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다른 냄새는?”
“안 달고 온다니까.”
마침내 원하는 대답이 떨어졌다.
“응. 그래야지.”
우연재는 문서윤을 완전히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담배 냄새가 체향을 가린 탓인지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