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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97)화 (97/139)

97화

등을 툭 건드는 손길에 문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송주아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왜?”

“사장님이 이번 주에 회식하재요!”

난 또 뭐라고. 문서윤은 픽 웃었다.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회식을 하고는 했는데, 벌써 그 시기가 온 모양이었다. 맛있는 걸 내 돈도 아닌 사장님 돈으로 잔뜩 먹을 수 있으니 아르바이트생 입장에서는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사장님이 회식에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라 더욱 그럴 테다.

“뭐 먹고 싶은데?”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죠.”

송주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메뉴들을 읊기 시작했다.

“초밥도 좋고……. 아니면 저번처럼 한우 먹을까요?”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오빠는 맨날 그렇게 말하더라.”

“진짜 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오빠 생각보다 입맛 까다로운 것 같던데.”

“내가?”

처음 듣는 소리에 문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편식한다거나 뭐 그런 소리는 아니고요. 가끔 같이 밥 먹을 때 은근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나쁜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여태 제 입맛이 까다롭다고 의식해 본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우연재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까 따로 맛있다고 생각해 본 음식들은 전부 우연재가 데리고 간 곳들이기는 했네.’

문서윤은 기본적으로 음식에 큰 관심이 없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종종 끼니를 거르기도 했고 무언가를 먹을 때도 배만 채우면 되지 꼭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무 음식이나 무던하게 잘 먹는 것도 그래서였다.

“흐음, 뭐 먹지. 소고기도 좋긴 한데 저번에 먹어서 다른 거 먹고 싶은데……. 아, 장어 어때요?”

“장어?”

문서윤은 소리 내어 웃었다. 20대 초반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다소 생소한 메뉴였다.

“장어 싫어해요?”

“아니. 가리는 거 없어. 그냥 장어 얘기하니까 좀 웃겨서.”

“왜요. 장어가 얼마나 비싼데.”

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은 송주아가 씨익 웃으며 카운터에 팔을 기댔다.

“그럼 장어 먹으러 갈까요? 사장님도 괜찮다고 하실 것 같은데. 요즘 맨날 체력 달려서 죽겠다는 말 입에 달고 사시잖아요.”

“그래, 그럼.”

“그럼 제가 사장님한테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금요일에 일찍 마감을 하고 밥을 먹으러 가지 않을까 싶었다. 문서윤은 우연재한테 미리 말해야겠다, 생각하며 싱크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갔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몇 초 뒤 송주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갔어? 아까 그 남자 손님들?”

“손님은 무슨 손님이에요. 손놈들이지. 진짜 개진상.”

대학가 근처 개인 카페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중년 남자들이었다. 어린 여자애라 만만했는지 주문을 받는 송주아에게 계속 시비를 걸어 대신 주문을 받은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했다. 그나마 다른 손님들이 많지 않은 시간이라 망정이었지, 음료가 나온 이후에는 가져오라며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한 문서윤은 화를 내는 송주아를 도닥인 뒤 직접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무시하는 시선이 불편했으나 그들의 빈정거림에 일일이 상처를 받을 정도로 아쉬운 처지는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봐 봐요. 컵도 그냥 놓고 간 거. 어? 뭐야.”

“왜?”

“컵 하나 비어 보이는데……. 깨트렸나? 아씨, 어쩐지 생각보다 일찍 가더라. 도망갔나 봐요.”

문서윤은 홀로 나가려는 송주아를 제지했다.

“됐어. 내가 치울게.”

“빗자루 들고 갈게요.”

남자들이 앉았던 테이블로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깨지는 순간 곧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떠드는 목소리가 워낙 커 그 소음 때문에 미처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내용물을 다 마신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음료까지 남아 있었다면 치우는 게 더 까다로웠을 테다.

문서윤은 무릎을 굽혀 앉은 뒤 커다란 유리 조각들부터 치우고는 이어 작은 조각을 손에 쥐었다. 익숙하게 정리하려는 순간 문가에서 딸랑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

의식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바람에 손가락이 엇나가며 예리한 조각이 피부를 파고든 것이다. 문서윤은 쥐고 있던 유리 조각을 미리 모아 둔 잔해 위에 올려 둔 뒤에야 피가 나는 손가락을 살폈다.

“헉. 오빠. 괜찮아요?”

빗자루를 가지고 오던 송주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괜찮아. 주문부터 받아.”

“피 나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잠깐만요.”

괜찮은데……. 문서윤은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 송주아가 가지고 온 쓰레받기에 커다란 조각들을 옮겨 담았다. 대충 정리를 마쳤을 즘에는 그새 길게 그인 모양 그대로 피가 방울방울 솟아오르고 있었다.

“병원 안 가도 돼요?”

불쑥 다가온 송주아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주문받았어?”

“사람이 다쳤는데 어떻게 주문부터 받아요.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송주아가 그를 끌고 들어간 곳은 비품실이었다. 문서윤은 그녀가 가져온 휴지로 피를 닦아 낸 뒤 상처 주변을 꾹 눌렀다. 그때 제법 매섭게 날아온 손이 손목 근처를 찰싹 때렸다.

“오빠. 뭐 해요? 그렇게 누르면 또 피 나오잖아요!”

“아…….”

끝에서부터 연고를 짜낸 송주아가 조심스럽게 약을 상처 위로 올리더니 반창고를 꽁꽁 동여맸다. 뒤늦게야 그녀에게 동생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어쩐지 조금 멋쩍어졌다.

“남은 거 제가 치울 테니까 오빠는 주문받고 있어요. 음료는 치우고 나서 만들 테니까 주문만 받아요. 알았죠?”

“내가 할…… 알았어.”

엄하게 노려보는 눈빛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문서윤은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괜찮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포스기를 누르자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우연재가 보면 또 한 소리 하겠네, 그 생각부터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연재가 손을 향해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다쳤어?”

“컵 깨져서. 별거 아냐.”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봐.”

뒤로 숨기는 게 더 수상해 보일 게 뻔해 문서윤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긴 손가락이 뒤엉키며 밴드를 붙인 검지를 건드렸다.

“피 나는 것 같은데.”

손가락에 붙어 있던 시선이 얼굴을 향해 올라오자 속눈썹이 덩달아 스르르 움직였다. 한 박자 늦게 지나치게 가깝다는 자각이 몰려와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실었다. 손을 빼내려 한다 생각했는지 다른 손가락들이 손을 받치듯 손등 위로 달라붙었다.

“약 발랐어. 나오다 만 피 나오는 거겠지.”

“봐.”

어차피 씻으려면 밴드를 떼어 내긴 해야 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우연재가 밴드를 떼어 냈다. 안에 덧댄 솜이 피를 흡수했는지 피가 묻은 밴드와 달리 손가락은 나름대로 깨끗했다. 붉은 선이 가느다랗게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깊게 안 다쳤어?”

우연재가 짧게 깎인 손톱 끝으로 그 주변을 누르며 언뜻 짜증이 스민 목소리로 물었다. 단순히 상처를 자세히 보려는 의도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손등을 떠받치고 있는 부드러운 손가락과 달리 딱딱한 손톱이 맨살을 누르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상 작용 때문일 테다.

미쳤구나, 문서윤. 문서윤은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며 입을 열었다.

“깊게 다쳤으면 병원 갔지. 그냥 스친 정도야. 컵 깨진 거 치우는데 다치면 얼마나 다친다고…….”

손을 떼어 내고 싶었으나 손등을 감싸다시피 한 손가락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아르바이트 그만 안 둬?”

“이번 방학까지는 계속할 거라니까. 2학기는 모르겠지만.”

“고집부리는 이유를 모르겠네……. 이제 교수님 피한다고 괜히 고생할 필요 없잖아? 본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랑 같이 사는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우연재라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던 차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본가가 아닌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으니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아버지를 피할 필요가 없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문서윤에게는 다른 의미로 피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거인인 우연재였다.

그의 오피스텔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건 순전한 제 의지였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긴장감에 피가 마를 게 불 보듯 훤했다. 그러니 함께 사는 방학 동안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서는 안 됐다. 잠깐이나마 숨을 쉴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 바쁜데 갑자기 그만두는 것도 그렇잖아.”

문서윤은 간신히 구차한 핑계를 둘러댔다. 방학 시즌은 한산한 편이었지만, 개인 카페 특성상 오고 가는 손님들이 많아 부적절한 핑계는 아니었다.

“그럼 다쳐서 사람 속상하게 만들지나 말든가.”

우연재가 눈썹 끝을 내리며 뺨에 힘을 실었다. 일부러 더 속상한 척하는 게 뻔해 문서윤은 픽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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