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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99)화 (99/139)

99화

“나 챙기는 사람 너밖에 없잖아.”

문서윤은 괜히 죽을 먹는 척, 살랑거리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을 제외하면 제가 이 시기에 겪곤 하는 우울증을 다들 몰랐다. 외가댁에서 신경을 써 주시기는 하지만, 가까운 관계의 사람 중에 저를 챙기는 사람은 우연재뿐이라는 소리였다.

“응. 나밖에 없지.”

우연재가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러니까 내 옆에만 잘 붙어 있어.”

여름철 우울증 환자는 겨울철에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보다 자해 가능성이 높다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신체적으로 늘어지는 대신 초조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정보도 함께였다.

“확실히 계절성은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옆으로 다가온 우연재가 머그잔을 건넸다. 문서윤은 따뜻하게 데워진 컵을 받아 들며 소파에 고개를 기댔다.

“계절성 우울증은 아닌 것 같다고.”

우연재가 입술에 컵을 가져다 대며 힐긋 쳐다보는 시선을 보내왔다.

“곧 기일이라 그런가.”

문서윤은 지금처럼 우연재가 아무렇지 않게 기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면 미묘한 고마움을 느꼈다. 당황하며 어색하게 웃는 것보다는 평범한 일이라는 양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런가 봐. 그래도 기일 지나면 조금씩 괜찮아지니까……. 올해도 초가을쯤 되면 컨디션 정상적으로 돌아올걸.”

“같이 가 줘?”

우연재가 가볍게 물었다. 목적지는 어머니가 계신 곳일 테다.

문서윤은 서늘한 공기와 달리 미지근한 차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혼자 가는 게 좋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함께 갔지만, 면허를 딴 이후로는 혼자 가고는 했다. 그래야 속에 담아 둔 말을 꺼내 들 수 있었다.

“혼자 가야 엄마한테 우연재 욕도 하지.”

괜히 심란해지는 마음을 감추고 싶어 문서윤은 장난스레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아, 지금까지 내 욕 많이 했어?”

우연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럼 나는 문서윤이 요즘 서운하게 군다고 말씀드려야겠네.”

“내가 뭘 서운하게 굴어.”

문서윤은 옆에 앉은 이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평소처럼 ‘왜, 요즘 나 서운하게 만들잖아.’라고 대꾸하며 살살거리리라는 예상과 달리 우연재는 눈꺼풀만 내리깔았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컵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문서윤.”

“왜?”

“요즘 밤에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바로 옆방을 쓰는 것도 아니고, 뒤척이는 걸 눈치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맥을 못 췄으니 그가 제 상태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하기는 싫어 문서윤은 차를 마시는 척 대답을 회피했다.

다 마신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기만 하자 우연재가 컵을 가져가더니 제가 마시던 컵 옆에 내려 두었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맞네.”

“……시간 좀 지나면 괜찮아져.”

옆으로 돌아앉은 우연재가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자연스레 고개가 기울어졌다.

“같이 잘래?”

무슨 뜻이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문서윤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우연재를 응시했다.

“너 그럴 때 옆에 사람 있으면 잘 자잖아.”

“……내가?”

“응.”

“네가 어떻게 알아?”

금시초문이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흐무러지듯 휘어지는 눈꼬리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서윤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와 한 침대에서 잔 날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짝사랑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제대로 잠든 적이 드물었다. 지난 7년간 우연재와 한 침대를 공유하며 푹 잠이 든 날은 손에 꼽을 수 있었다. 주로 시험공부를 하다 피곤함에 찌들었을 때였다.

피곤해서 그런 거지 옆에 사람 있어서는 아니었는데. 의아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기억 하나가 불현듯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섹스했을 때.

최근에 우연재가 같은 침대에서 잠든 저를 본 건 그때뿐이었다. 미지근한 차가 몸을 데운 것처럼 안쪽에서부터 열이 뻗쳤다. 에어컨 바람이 선선하게 돌아가고 있는 공간에서 뺨을 붉히면 지나치게 의식한 티가 날 것 같아 문서윤은 그 순간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재빨리 거절했다.

“애도 아니고. 됐어.”

“왜.”

우연재가 몸을 조금 움직이자 허벅지에 그의 무릎이 닿았다. 여름이라 반바지를 입고 있는 저와 달리 우연재는 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맨살에 부드러운 옷감이 쓸리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군대에서 훈련받았을 때 아무 생각 안 났다며.”

“그거야 계속 몸 쓰니까…….”

우연재가 가늘게 웃었다.

“이렇게 순진해서 그딴 새끼들은 어떻게 만났지…….”

한 박자 늦게야 그 말뜻이 완전히 이해됐다. 문서윤은 그제야 제가 과민 반응을 보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조금 전까지 따뜻한 차를 마셨는데도 그랬다.

그는 괜히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랑 또 그럴 생각 없어. ……원래 그렇게 자주 하는 편도 아니고.”

“그래? 알았어.”

지나치게 평온한 대답은 오히려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들렸다.

“그래도 필요하면 말해.”

문서윤은 또다시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요즘 들어 자잘한 스킨십이 부쩍 늘기는 했어도 이런 대화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섹스 좋았나. 그래서 자꾸 이런 얘기 꺼내는 건가?’

근래의 우연재는 약간 이상했다. 뭐가 이상하냐고 물으면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미묘하게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문서윤은 그 미묘한 티끌이 제 눈에만 보이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우연재를 오랫동안 봤고, 그를 잘 알기에 느껴지는 티끌이지,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테다.

‘뭔가 좀…….’

알고 있는 느낌.

불현듯 뇌리를 급습한 문장이었다. 문서윤 저조차도 왜 갑자기 그 문장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최근 우연재가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우연재.”

“응.”

문서윤은 제 옆에 앉은 친구를 조심스레 살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과 말투였으나 미묘하게 느긋한 분위기가 풍겼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눈썹도,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입술도, 저를 마주 보는 눈빛도 그런 느낌이었다.

“왜.”

늘 여유로운 편이긴 했다. 제반 사정이 완벽한 데서 오는 여유로움일 수도 있으나 타고난 성격 역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래 왔으니 이제 와 새삼스럽게 그의 그런 면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뭔가가 갉작이는 느낌이 엄습했다.

“너…….”

문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섣불리 묻기가 어려웠다. 고작 이상하다는 느낌 하나 때문에 소꿉친구가 제 감정을 알고 있다고 단언하는 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응. 나 뭐.”

“나한테……. 할 말 있어?”

우연재는 눈치가 빨랐다. 만약 제 짝사랑이 저를 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할 말이 있냐는 물음 하나에 그 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을 터였다.

문서윤은 숨을 죽이며 차분하게 우연재를 살폈다. 잠깐 엇나간 시선이 스르르 옮겨 오더니 그가 얄팍하게 눈가를 접었다.

“할 말?”

“응.”

이 자리에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냐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지. 문서윤은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뒷감당에 대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덜컥 던진 질문이라 심장이 거세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 없이 내뱉을 만한 질문이 아니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많은데.”

“……뭐?”

시선이 뒤엉키자 긴장이 한층 거세졌다. 우연재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손끝에 절로 힘이 실렸다.

“나랑만 놀아.”

“어?”

“다른 새끼랑 노는 거 질투 나니까 나랑만 놀라고.”

기다란 눈매가 야트막하게 휘어지며 눈꼬리가 살며시 접혔다.

“또 뭐가 있더라. 알바 빨리 그만둬? 기숙사 나와?”

순식간에 맥이 풀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는지 손바닥이 다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그게 다야?”

“더 해 줘? 다 들어주게?”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평소처럼 웃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근래에 느낀 우연재의 미묘한 분위기는 제 노파심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애야? 그런 거 조르게?”

“왜, 난 진심인데.”

우연재가 능글맞게 웃더니 이내 무언가를 재 보듯 가늘게 눈가를 좁혔다.

“나한테 할 말 있어서 떠봤어?”

“그런 거 아니야.”

문서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대답했다.

“있는 것 같은데.”

우연재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고개를 떼어 내자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며 그의 무릎이 또다시 맨살을 뭉갰다.

문서윤은 재차 부정했다.

“아니라니까.”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는데도 심장은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여전히 빠르게 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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