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피아노를 처분하겠다니. 아버지가 왜 그 문제를 저와 상의하지 않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걸까. 우연재와 본가에 왔을 때 한 번 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 장식품이 된 지 오래된 악기이기는 했다. 그래도 어머니와 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물건이었다.
본가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이고, 또 가장 최근의 기억이기도 했다. 이 집에 담긴 기억은 어머니와 함께 치던 피아노로 시작해 우연재에게 쳐 준 피아노로 끝이 났다.
“하아…….”
가슴이 답답했다. 문서윤은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속눈썹 결이 느껴질 정도로 눈가를 문지르다 손을 내리자 정면으로 그랜드 피아노가 보였다.
아버지께서 언제까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아직 젊으시니, 다른 분을 만날 수 있겠다 늘 생각했었다. 다른 분을 소개해 주셨을 때 수월하게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였다.
곧 상대가 아버지와 불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들어 괴롭긴 했지만, 확증이 없으니 울렁거리는 감정 역시 그럭저럭 삭일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피아노에 남은 추억을 이런 식으로 별것 아닌 양 취급하실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게 맞는 일인가? 다른 분과 가정을 이뤘으니 피아노도 치워야 하는 건가?
아버지가 앞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제가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리가 이해하는 것과 가슴이 죄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문서윤은 옷자락을 쥐어짜듯 움켜쥐며 고개를 내렸다. 시야에 들어와 있던 피아노가 무릎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잡념이 먹구름처럼 몰려들자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스물셋이나 먹은 성인이 이런 일로 괴로워하는 게 정상인가 싶었으나,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불현듯 우연재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부부랑 자식이 같은 것도 아니고……. 교수님은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어도 너는…… 씹, 하나뿐인 엄마 잃은 건데.’
그때는 똑같은 아픔이라 여겼다. 아버지에게도, 제게도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모두 착각이었다. 제게 소중한 추억이 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소중하리라는 건 정말이지 우매한 오판이었다.
문서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진심으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위해 피아노를 칠 때면 행복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희석된 기억이었으나, 마음이 붕 뜨듯 설레는 감정만큼은 여태 선명했다.
“윽…….”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기대를 저버렸어야 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었던 만큼, 은연중에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 회피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누구도 찾지 않아 홀로 남겨진 피아노처럼 소중한 기억 역시 잊히게 될 줄을 모르고. 멍청하게.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도 다른 감정들이 그러하듯 한시적인 마음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빛이 바래 사라질 테다.
* * *
문서윤은 눈을 떴다.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확인하자 시간이 아침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우연재가 깨워 주는 버릇 때문에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잤더니 평소와는 다른 느린 기상이었다. 날씨나 많이 안 더웠으면 좋겠는데. 그는 작은 바람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을 마실 겸 주방으로 나가자 생각지도 못한 고요함이 깔려 들었다. 생활 소음은 물론이고 사람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묘한 정적이었다. 문서윤은 차가운 물 대신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우연재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우연재.”
노크를 하며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디 나갔나? 조심스레 문을 열자 텅 빈 침실만이 그를 반겼다.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는 사람이 자다 일어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깨끗했다.
“어디 나갔나 보네.”
우연재의 정리 습관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가만히 서서 천천히 물을 마시고 있자니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어머니의 기일도 기일이지만, 그보다는 텅 빈 오피스텔 때문인 것 같았다.
‘어제 딱히 나간다는 말 없었는데…….’
자연스레 어제저녁이 떠올랐다.
저조한 컨디션을 눈치챈 우연재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라는 듯 집요한 시선을 보내왔으나 문서윤은 피아노에 대해 털어놓는 대신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다 큰 성인이 피아노 하나 때문에 속상해하는 게 멋쩍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니만큼 속상함을 느끼는 건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우연재에게만큼은 그 감정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게 그 피아노가 어떤 존재인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하게 애착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우연재도 어릴 때부터 우리 집 왔다 갔다 하면서 봤으니까 만약 얘기 꺼내면 내가 어떤 기분인지 눈치채겠지.’
상처를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내보이며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문서윤 저는 후자였다. 무엇보다 근래에 제게 신경을 기울이는 친구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문서윤은 마음을 털어 내듯 다 마신 컵을 깨끗하게 씻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부터 하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뒤 꽃다발을 찾아서 어머니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본가에서 옷을 챙겨 와 다행이었다. 문서윤은 제 차림새가 단정한지 다시 한번 점검했다. 대학에 입학하며 외할아버지께서 기념으로 맞춰 주신 슈트가 있긴 하지만, 제 나이에 입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하얀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참이었다.
이 정도면 깔끔하니까 괜찮겠지. 그대로 방을 나가려는데 우연재가 선물한 향수가 눈에 띄었다.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향수를 뿌렸다. 어머니를 보러 가는 것도 오랜만이니, 이왕이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향수 뿌린다고 어른스러워지는 것도 아니긴 한데…….”
괜히 민망한 웃음과 함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어제 기분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것치고는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았다. 정신적으로 지쳤는지 잠을 푹 잔 덕분도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평소답지 않게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몸이 약간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문서윤은 마지막으로 검은색 재킷을 챙기며 방을 나섰다. 괜히 우연재의 방문을 힐금거리다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채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반짝 불이 켜지며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당연하게도 우연재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의 존재에 놀라 멈칫 멈춰 서는 순간 신발을 벗는 남자와 딱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네. 전화해서 깨우려다가 말았는데.”
“일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됐어. ……어디 갔다 와?”
우연재는 슈트 차림이었다. 아무리 스물셋이라고 해도 슈트가 어울릴 만한 나이가 아닌데, 검은색 정장이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장례식장에 찾아왔을 때도 어색한 느낌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소리 내어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친구들의 모습이 어땠는지 자세히 살필 겨를은 없었지만, 정장 차림의 우연재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태 그 기억이 또렷한 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걸친 저와 달리 우연재는 완전히 익숙해 보여서일 테다. 무엇보다 교복을 입고 온 다른 친구들과 달리 정장을 입고 온 게 고마워 도저히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검은색 상복은 제가 친구들과는 다른 처지라는 걸 완연히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그 괴리감에서 기인한 우울과 불안은 새까만 정장을 입고 온 우연재를 마주한 순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당시에 느낀 감정을 정확히 뭐라 정의 내려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어쩌면 안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옷 하나가 가져다준, 홀로 동떨어진 게 아니란 안도.
“볼일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어. 생각보다 안 더워. 이모 뵙기 좋을 것 같던데.”
“안 더워? 다행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우연재가 아무렇지 않게 뺨을 쥐더니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뒤로 물러서고 싶었으나 얼굴이 잡힌 상태라 도망가면 티가 날 것 같았다.
“왜?”
결국 문서윤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우연재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눈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천천히 깜박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빠르게 깜박이는 눈이 동요를 내보일까 봐 겁이 났다.
“안 울었네. 울었나 해서.”
집요하게 얼굴을 훑어 내리던 시선이 떨어져 나가나 싶더니 손 역시 천천히 물러났다. 문서윤은 괜히 툴툴거렸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나저나 언제 나갔다 왔어?”
“새벽에.”
“새벽?”
누가 돌아가셨나? 문서윤은 다시 한번 우연재의 차림새를 살폈다. 그러나 하얀 셔츠에 검은색 슈트는 딱히 장례식을 연상시키지 않았다. 애초에 장례식장에 갔다면 벌써 돌아오지도 않았을 테다.
“요즘 해 일찍 뜨잖아.”
“그야 그렇지……. 아무튼 나 갔다 올게.”
“진짜 같이 안 가도 돼?”
현관을 나서려는데 우연재가 말을 붙였다.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간 채였다.
“괜찮다니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 문서윤은 다시 한번 웃었다.
“연재야. 나 진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