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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03)화 (103/139)

103화

우연재에게 전화를 건 건 차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으나 여름은 여름이라 어쩔 수 없이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열을 식힌 뒤 손등으로 달아오른 눈가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 응.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통화가 빨리 연결돼 문서윤은 무심코 우연재를 불렀다.

“연재야.”

곧바로 대답이 흘러나오리란 예상과 달리 긴 침묵이 흘렀다. 분명 목소리 들었는데, 연결된 거 아닌가? 문서윤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며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는 중이었다.

“우연재.”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안 들리나?”

아무래도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 응.

뒤늦게야 우연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 없길래 전화 안 들리는 줄 알았네. 아니면 벌써 현승이 만났어?”

- 문서윤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가늠 좀 하느라.

순간 말문이 막혀 문서윤은 애꿎은 혀를 깨물었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쉰 그는 핸들에 머리를 기대며 가볍게 물었다.

“어땠을 것 같은데.”

- 연재야, 하고 부른 거 보니까 운 것 같긴 한데…….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우연재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 대부분 성을 함께 붙여 부르고는 했다. 다른 친구들은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우연재는 이름만 부르면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간질거리는 마음 때문이 분명했다.

- 김현승 얘기 꺼내는 거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문서윤은 피식하고 웃었다.

“나 조금 있다가 출발하려고. 서울 도착하면 5시 좀 넘을 것 같은데.”

- 오래 있었네.

잔뜩 늘어지는 어조가 오래 있었네, 가 아니라 울었네, 로 들렸다. 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눈가를 식히느라 출발이 늦어지기는 했다. 문서윤은 내색하는 대신 괜찮은 척 목소리를 꾸며 냈다.

“오랜만에 보니까 할 말 많아서.”

- 내 욕 했어?

나지막하게 묻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너무 무겁지 않은,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산뜻한 어조였다. 문서윤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서 살랑거리던 꽃잎들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우연재 예쁘냐고 했지, 뭐.”

그는 그렇게 ‘꽃다발 너야?’라는 물음을 간신히 삼켜 냈다.

- 아, 좋네…….

좋다는 말이 마음에 콱 틀어박혔다.

- 누가 간만에 예뻐해 줘서?

문서윤은 핸들에 기댄 고개를 천천히 떼어 냈다.

“내가 아니라 엄마가 너 예뻐한 거라니까…….”

건너편에서 키득거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어디 있을 거야? 바로 거기로 갈게.”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면 안쓰러워 보일 게 분명했다. 물론 우연재도 김현승도 갑작스러운 약속 취소에 의문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기일이니 마음이 변덕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갈 게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우울한 기색을 보이면 우연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다. 입을 다물면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겠지만, 늘 그랬듯 저를 달래려 들면 이번에는 기어코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 시끄러운 데는 좀 그렇고……. 와인 마실래?

“와인? 우리 저번에 갔던 데?”

- 응. 김현승이 자꾸 조르던데. 자기는 도대체 언제 데려가냐고.

시끄러운 곳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문서윤은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알았어. 거기로 갈게.”

그래도 어머니 기일인데, 차분하게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빨리 와.

우연재가 느릿하게 말을 받았다.

“보통 천천히 오라고 하지 않아?”

- 그거야 입에 발린 소리고.

“입에 발린 소리 좀 해.”

- 싫은데.

어조만큼이나 늘어지는 말꼬리 뒤로 다정한 말이 따라붙었다.

-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

직원의 안내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간 문서윤은 화장실부터 들렀다. 그는 손을 씻으며 힐긋 제 얼굴을 살폈다. 운 게 티가 나지 않을까,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상태였다. 몇 시간을 내리 운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괜찮았다. 우연재의 눈썰미를 생각하면 들킬 확률이 높았지만, 조명이 어두워 크게 티가 나지는 않을 듯해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하…….”

문서윤은 다시 세면대를 향해 시선을 떨어트리며 손을 씻는 데 집중했다. 차가운 물이 몇 번이고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물을 잠근 그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야 화장실을 나섰다.

2층부터는 프라이빗하게 운영되는 바였다. 다른 손님은 없는지, 열려 있는 문이 보였다. 저기 있나 보네. 곧바로 들어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들었다.

“그런데 문은 괜찮대? 오늘 어머니 기일이잖아.”

문서윤은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냐며 능청스럽게 들어가면 될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김현승처럼 능청을 부릴 만한 재주가 없었다.

“안 괜찮은 것 같던데.”

“쓰읍, 술 마셔도 되나?”

“둬. 차라리 먹이고 좀 재우는 게 나아.”

언제 들어가야 하지. 아무래도 제 이야기가 끝나면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문서윤은 쥐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아니, 문이 애야? 먹이고 재우게?”

“우리 현승이는 애한테 술을 먹이나 보네.”

“씨발,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티격태격하는 대화 소리에 문서윤은 소리 없이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상극인 것처럼 보여도 잘 맞으니 지금껏 관계가 유지되는 것일 테다.

“그나저나, 문은 혼자 간 거야?”

“아마도.”

“너라도 같이 가 주지. 내가 말해 봤자 거절할 거 뻔하고, 그래도 우 네가 가겠다고 했으면 같이 갔을 것 같은데.”

객관적인 김현승의 자아 성찰에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졌다. 그 역시 우연재와 마찬가지로 좋은 친구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에야 만난 사이다 보니 어머니의 기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문득 서운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혼자 가겠다고 하는데 계속 물어보는 것도 좀 그래서. 그리고 따로 갔다 왔어.”

“너 혼자?”

“새벽에.”

역시, 짐작대로 꽃다발은 우연재가 갖다 둔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천천히 벽에 기대서며 발끝을 응시했다. 보드라운 꽃잎이 나무 아래가 아닌 제 마음에 들어찬 기분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설렐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도 우스웠다.

“그래? 잘했네. 야, 우연재. 가끔 생각하지만 넌 존나 참된 친구야. 문이 왜 성격 더러운 너랑 친한지 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성격 더러운 우연재 친구인 김현승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야 너른 마음으로 봐주는 거고.”

낄낄거리던 김현승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너 문한테 아빠 하듯이 하는 버릇은 좀 고쳐라, 짜샤.”

“아빠?”

“너 가끔 문서윤 애 취급 할 때 있잖아. 아까 술 먹이고 재운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누가 성인 남자한테 재운다는 표현 쓰냐?”

“아, 그거.”

우연재가 코웃음을 내뱉듯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뭐라고.”

“진지하게 말한 거라니까? 네가 문서윤 아빠세요?”

“으음……. 차라리 아빠면 나을 것 같은데. 아빠면 1촌 아냐?”

가볍게 던진 농담에 문서윤은 쓰게 웃고 말았다. 때로는 피로 이어진 관계도 가까운 촌수도 의미가 없어지는 때가 오고는 했다. 문서윤 역시 아버지보다 우연재에게 더 의지하는 편이었다. 딱히 그를 짝사랑해서는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없었어도 더 의지가 되는 사람은 우연재였다.

“하여튼, 존나 또라이 새끼.”

김현승이 혀를 차며 말을 받았다. 어떤 표정일지 빤히 예상이 갔다. 우연재를 흘겨보며 답이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을 것이다.

언제 무거운 대화 주제가 등장했었냐는 듯, 다소 가벼워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슬슬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김현승이 또다시 농담을 던졌다.

“차라리 결혼한다고 하지? 부부는 무촌인 거 아냐? 그럼 너 1촌보다 가까워지는 건데.”

자연스레 움직이려던 걸음이 고장 난 로봇처럼 불시에 멎었다. 이대로 들어가면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았다. 지나치게 어색하게 굴다 분위기를 망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우 너 어차피 검머외잖아. 미국은 결혼도 가능하지 않냐?”

평소처럼 받아치는 농담이 따라오는 대신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깔린 정적에 문서윤은 호흡을 멈췄다. 삽시간에 찾아온 무거운 적막이 폐를 짓눌렀다.

“야……. 뭘 그렇게 정색해.”

마찬가지로 분위기에 눌렸는지 김현승이 멋쩍은 목소리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네가 1촌 드립 치길래 한 말이잖아. 아, 알았어. 이건 내가 선 넘었다. 미안.”

“…….”

“근데 솔직히 우연재 네가 아니라 문이 더 기분 나빠해야 할 것 같…….”

“그럴까?”

고요하게 잦아든 호흡이 쿵 떨어지는 심장 소리와 함께 빠르게 제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연재의 반문은 지극히 가벼웠다. 그런데도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트리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뭐. 갑자기 또 뭔 소린데.”

“미국 가서 문서윤이랑 결혼할까?”

미친 듯이 질주하던 심장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문서윤은 눈을 깜박였다. 진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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