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는 우연재를 잘 알았다.
애초에 감정 변화가 큰 편이 아니라 가끔은 자세히 살펴야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연재의 감정 변화와 진심을 기민하게 읽어 낼 수 있다 자신했다.
그리고 잘 안다는 건 단순히 그의 표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말버릇도, 목소리에 스미는 미묘하게 다른 어조도, 각기 다른 어조에 담긴 진심도 잘 알았다.
그러니까, 저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생각 못 했는데.”
저와 달리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김현승이 혀를 차며 미친놈,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
문서윤은 또다시 눈을 깜박였다. 아니, 눈을 깜박이고 있는지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피아노처럼.
무생물이라도 된 양 눈을 깜박일 수도, 호흡을 이어 나갈 수도, 체온을 느낄 수도 없었다.
아.
불현듯 찾아오곤 하는 직감이 있었다.
나무 아래에 놓여 있던 하얗고 보드라운 꽃다발을 누가 가져다 뒀는지 알아차리는 순간처럼.
“결혼하면 내가 문서윤이랑 제일 가까워지는 거네.”
고작 목소리 하나에서, 말투 하나에서, 미묘하게 다른 어조 하나에서, 문서윤은 깨달았다.
진작 들켰구나.
좋아한다는 거.
우연재가 내뱉곤 하는 농담과 진담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김현승은 농담으로 치부하며 미친 새끼, 하고 낄낄거리고 있지만 우연재는 결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하여튼 또라이 새끼. 문이 하겠냐?”
“왜애.”
설마, 아니겠지. 엄마 기일이라 예민해져서 착각하는 거겠지.
문서윤은 애써 부정하면서도 우연재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신경에 날을 세웠다.
“우리 서윤이 나 존나 좋아하는데.”
쿵, 쿵, 쿵, 쿵.
이명에 가려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게 언제였냐는 듯 심장 뛰는 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네네, 그러시겠죠. 문이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하냐? 걔한테 미움 사는 새끼는 분명 지옥 떨어질 새끼일걸.”
우연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듯 픽, 하고 웃었다.
동시에 문서윤은 명확하게 읽어 냈다. 그것은 고작 웃음소리 하나에 담긴 자만이었다.
“아, 아쉽네. 김현승이 봤어야 하는데…….”
“뭘?”
“있어, 그런 게.”
그건 명백한 자만이었다.
우연재는 지금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는 감정과 저를 좋아하는 감정을.
어떻게 알았지? 도대체 언제, 뭘 봤길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문서윤은 숨을 헐떡이지 않기 위해 침을 삼켰다.
그는 우연재를 향한 짝사랑을 명확하게 남겨 둔 적이 없었다.
오롯하게 홀로 간직한 마음이었다. 일기를 쓴 적도, 메시지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도, 하다못해 익명의 힘을 빌려 조언을 구한 적도 없었다. 남태은은 알고 있으나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다.
혹시라도 들킬까 무서워 자그마한 그림자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저 꾸역꾸역 삼켰을 뿐이다.
그렇게 꼭꼭 숨겨 왔는데, 도대체 언제, 어쩌다가 들켰지.
너무 놀란 탓에 피가 빨리 도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예에.”
김현승이 못 믿겠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하자 우연재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진짠데.”
“어, 그렇다고 치자.”
“문서윤 앞으로도 나만 좋아할 거니까 괜히 질투하지 마.”
흡족함에 흠뻑 젖어 과시하는 듯한 목소리가 또다시 쐐기를 박았다.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에 문서윤은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헐떡이는 호흡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왜 진작 알았으면서 여태 아무 말도 없었을까.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같이 자자는 말은 대체 왜 한 걸까. 여러 의문들이 끊임없이 몰려와 마음을 어지럽혔다.
고작 짧은 대화 하나에 마음을 들켰다고 확신하는 게 이상할지 모르나, 상대는 우연재였다.
습관처럼 내뱉는 농담들이 있기는 했다. 주로 ‘교수님 자리 뺏을까’라든가 혹은 부모님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던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식이었다. 그의 본가를 방문한 날 결혼 인사 왔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으니 결혼이라는 단어 역시 완전히 처음 듣는 농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문서윤은 목소리와 그 안에 숨겨진 어조만으로도 우연재가 농담을 던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도대체 왜…….’
우연재의 머릿속을 알 수 없었다. 할 말이 있냐 물었을 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그러면서 진지하게 결혼할까, 하는 소리는 왜 내뱉고 있는지.
“하.”
문서윤은 새어 나오려는 숨소리를 간신히 삼켰다.
한바탕 싸웠던 날, 그리고 처음 섹스한 날, 우연재와 오갔던 설전이 뒤죽박죽 뒤엉켰다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연재는 좋아하는 감정도 결국은 성욕이라고 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성욕을 착각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제 감정을 단정 지었다. 제게 섹파가 있다는 오해와 함께 소위 말하는 몸정을 짝사랑이라 오해하는 거라며 대신 성욕을 처리해 주겠다는 말이 이어졌다.
꿈에서조차 하지 못한 상상이었으나, 문서윤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짝사랑 상대와 자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건 그토록 손쉬운 일이었다.
두 번째 섹스는 꼴렸다는 우연재의 말과 함께 시작됐다. 혹시 그날 눈치챘나, 순간 그런 의심이 뇌리를 엄습했다.
도대체 어떻게. ……피아노 때문에?
눈치챈 게 그날이었다면 섹스를 제안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차라리 나를 좋아해.’
좋아하는 감정을 성욕이라 치부하고 있으니, 반대로 성욕을 이용해 저를 더 좋아하게 만들려는 의도인지도 몰랐다.
‘편하잖아, 그럼.’
결혼 운운하는 것도 그 결은 다르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건 곧 제도였다. 사람과 사람을 묶어 두는, 법적 효력이 생기는 제도.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결혼을 했다면 섹스 역시 상대와만 하는 게 맞았다.
우연재 입장에서는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저를 좋아하고, 제게 성욕을 느끼고, 또 섹스까지 수락했으니 그대로 옭아매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성을 좋아하는 감정은 이성애가 주류인 사회에서 독이 될 테니, 차라리 저와 제도적으로 묶어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평범한 친구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과분한 희생이었다. 그러나 고작 저 이유만으로 제게 섹스하겠느냐는 제안을 건넨 우연재라면 결혼 정도는 손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
문서윤은 간신히 벽에서 등을 떼어 낸 뒤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화장실이었다. 밖에 서 있다 들키는 것보다는 화장실에 있었다는 핑계를 대는 편이 나았다.
수전을 틀자 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그는 폽업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를 멀거니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하…….”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까지 제 감정을 모른 척한 것에 대한 배신감도, 그 감정을 들킨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도 아니었다.
그저 많이 아팠다.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소중하게 간직해 온 짝사랑이 그 상대에게 정말로 별것 아닌 취급을 당한 것만 같았다. 결혼이라는 말이 쉬이 나올 정도로.
“별거 아니긴 하지……. 그게 성욕이면.”
한편으로는 죄악감이 더 커져만 갔다. 우연재를 좋아해서, 우연재가 그 사실을 눈치채서, 단순히 저를 구제하기 위해 저런 고려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섹스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 그 어떤 동성 친구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유혹적이라 해도 제 선에서 거절했어야 하는데 뭣도 아닌 욕심 하나로 우연재의 사고 회로를 망가트린 기분이었다.
‘미국 가서 문서윤이랑 결혼할까?’
분명한 진심이었다.
문서윤은 우연재가 고민을 허투루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침묵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테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고백했으면…….’
지금처럼 약간의 고민 끝에 저 얘기를 꺼냈을까.
제가 아는 우연재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면 내가 감정 묻길 기다리는 걸 수도 있고.’
때때로 우연재에게 제 마음을 들키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문서윤은 우연재가 망설임 없이 관계를 명확히 하리라 여겼다. 접으라고 하든가, 아니면 관계의 종말을 고하든가, 둘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제가 고백 없이 마음을 접을 때까지. 몸까지 대 줬는데 기다림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다.
그 정도로 제가 우연재에게 붙잡고 싶은 친구인 것 같아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커다란 죄책감이 숨을 짓눌렀다. 제게 뭐든지 내줄 수 있는 친구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에게 하등 쓸모도 없는 감정뿐이라는 게 비참했다.
“하아.”
심장이 연신 쿵쾅쿵쾅 달음박질을 쳐 댔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길 몇 분,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음으로 바꿔 둔 덕에 소리 없는 잠잠한 울림이었으나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순간 숨통이 절로 조여들었다.
우연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