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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07)화 (107/139)

107화

우연재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키스할까 봐 덜컥 겁을 먹은 게 무색하게도 입술이 뺨에 닿더니 말랑한 살덩어리가 눈물을 앗아 갔다.

“흐윽, 읏, 으응…….”

“울 거면, 하아, 나 때문에 울든가.”

뺨을 쥐고 있던 손가락 하나가 입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신음 때문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 손가락이 혀를 짓눌렀다. 덕분에 문서윤은 제 혀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을 따라 간신히 호흡을 조절할 수 있었다.

“흐으윽, 윽, 읏. 아!”

몸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치대는 허리 짓과 길을 트듯 내벽을 푹푹 찍어 대는 좆만 아니었다면 숨을 고르기가 훨씬 수월할 듯했지만, 차라리 이 상태가 나았다. 쾌감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모든 걸 잊고 싶었다.

“탈진까지, 하면, 안 되니까…….”

“하으, 아, 아아, 앗!”

우연재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받아 마셨다. 눈물 자국을 따라 내려온 입술이 언뜻 입꼬리를 스쳤다.

“너 지쳐서 잠들 정도로만 박을게.”

문서윤은 눈을 감았다.

혀가 본능적으로 입꼬리를 핥았다. 우연재의 입술이 스쳐 지나간 곳에서는 짠맛이 났다.

찰랑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렴풋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맨어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 그냥.”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문서윤은 그제야 제가 우연재에게 안겨 있음을 깨달았다. 몸을 스치는 따뜻한 기운은 욕조에 가득 채워진 물인 듯했다. 겨울에도 뜨거운 물 대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할 정도로 높은 온도를 좋아하지 않으나 뜨거운 물 덕분에 온몸이 나른했다.

섹스 후 침대도 아닌 욕조에서 우연재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이 낯설었으나, 밀어낼 힘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문서윤은 바르작거리는 대신 눈만 깜박였다. 너른 어깨에 뺨을 기대자 제가 남긴 잇자국이 보였다.

“……멍 들겠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돼?”

우연재가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내가 너한테 한 짓 생각하면 걱정 못 할 텐데.”

문서윤은 대답 없이 푸스스 웃기만 했다. 찰랑이는 물소리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물에 녹아드는 설탕처럼 서서히 섞여 들었다.

섹스가 끝나서인지, 아니면 뜨거운 물에 잠겨 있어서인지, 머릿속을 잔뜩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명료해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비슷한 것들을 한데 그러모을 수 있었다.

문서윤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섹스를 핑계로 실컷 운 덕분에 다행히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문서윤.”

우연재가 몸을 받친 팔을 천천히 움직여 등을 토닥였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몸을 감싼 물이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응.”

“무슨 일 있었던 거면 지금 말해.”

본가에 다녀왔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우연재가 말하는 무슨 일에는 어제는 물론 오늘까지 포함되어 있을 테고. 기분이 엉망인 원인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 어느 것도 털어놓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없다니까.”

문서윤은 담담하게 진실만 고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저를 엉망으로 망가트린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감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맞닿은 몸이 미세하게 움직인 덕분에 문서윤은 우연재가 저를 향해 시선을 늘어뜨렸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차마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는 제가 남긴 잇자국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몇 시간 후면 사라질 흔적이었다.

“뭐어, 알았어.”

목소리에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인지 우연재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토닥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별일 있었던 거 아니면 복잡한 생각 하지 말고…….”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내려와 목덜미를 문질렀다.

“자.”

나지막한 목소리 때문일까, 급작스레 잠이 쏟아졌다.

문서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톡 떨어지며 어딘가로 고여 들었다. 눈을 감은 탓에 그 종착지는 알지 못했다.

* * *

뜨거운 욕조에 잠긴 것처럼 따뜻하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공기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었다. 온기를 갈구하듯 무의식적으로 몸을 구기자 기다란 무언가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더니 장난을 치듯 휘감았다. 뒤이어 낮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

문서윤은 그제야 퍼뜩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꿈치가 금세 무너져 다시 쓰러지긴 했지만, 어쨌든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리기는 했다.

“뭐 해?”

그 꼴이 제법 웃겼는지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문서윤은 그제야 제 왼손이 그의 배를 짚고 있음을 깨달았다. 팔베개를 하고 눕듯 완전히 안긴 자세였다.

“……나 여기서 재웠어?”

“응.”

“왜?”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간신히 고개만 들어 올려 묻자 슬쩍 찌푸려지는 눈썹이 보였다. 첫 섹스 이후 아침마다 반복되곤 하는 레퍼토리 같아 문서윤은 어설픈 핑계를 둘러댔다.

“아니, 이제는 방 따로 있으니까…….”

“먹고 버리는 버릇 고치랬는데.”

지난번처럼 진심으로 짜증 난 건 아니었는지 찌푸려진 눈매가 서서히 풀리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재워 준다고 한 거 기억 못 하네.”

같이 자겠느냐 묻던 때가 떠올랐다. 섹스를 연상시키는 말이 줄줄이 이어져 당황했더니 꼭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또 몸을 섞었으니 농담이 농담이 아니게 되긴 했지만.

“아냐, 기억나. 아무튼……. 덕분에 잘 잤어. 고마워.”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 사람은 문서윤 자신이었지만 와인을 먹인 사람은 우연재고, 또 진탕 섹스한 상대도 우연재니, 술과 열기에 취해 기절하듯 잘 수 있었던 것도 우연재 덕분이었다. 뜨거운 물에 한참 몸을 담가 전신이 노곤하게 풀린 덕도 있을 테다.

“고마워?”

우연재가 눈가를 찡그리며 비죽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어딘가 미묘한 표정이었다.

“기분 이상하네?”

“뭐가.”

“딜도 취급 하는 건 상관없는데 남처럼 구는 것 같아서.”

문서윤은 멍하게 눈만 깜박거렸다. 평소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대신 여태 우연재의 품에 안겨 있을 정도로 머릿속이 곤죽으로 뭉개진 상태였다.

“너랑 내가 고작 이 정도로 고맙다고 할 사이야?”

그제야 우연재가 불쾌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허물없는 관계에 그어진 미묘한 빗금을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고마워서 고맙다고 한 것뿐이지만, 관계의 농도에 따라서는 그런 겉치레가 불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다.

저와 우연재가 그런 사이였다.

“고마우니까 고맙다고 하는 거지…….”

문서윤은 어물거리며 잔뜩 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손이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다.

바로 침대 아래로 내려서면 휘청거릴 게 뻔해 그는 곧바로 다리를 내리는 대신 멀거니 앉아 있기를 택했다. 지금은 우연재의 품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창문 일부러 열어 뒀나. 반쯤 열린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들어왔다. 폭우가 퍼부은 게 언제였냐는 듯, 여름 특유의 청량한 하늘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망막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날씨 좋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자 따라 일어난 우연재가 바닥으로 내려서며 툭 내뱉었다.

“밥 먹고 잠깐 나가.”

그럴까. 비가 온 뒷날이니 날씨가 많이 덥지는 않을 듯했다. 게다가 비 온 다음 날 특유의 청량감이 공기에 스며들었을 테니 홀로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문서윤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살랑이는 바람과 그에 묻은 서늘한 기운이 속눈썹을 간질였다.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고 생각했는지 우연재가 주의를 돌리려는 듯 뺨을 건드렸다. 홍채에 담긴 형체 없는 햇살을 그가 대신했다.

“같이 나가.”

우연재가 입술을 달싹였다. 느슨하게 휘어진 눈꼬리가 어딘가 잔뜩 포식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팡. 우산을 펼치는 소리가 약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튕겨 냈다.

“같이 쓰자고?”

문서윤은 먼저 한 발자국 내디딘 우연재를 멀거니 쳐다보며 물었다. 커다란 장우산도 아니고,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비닐우산이었다. 남자 둘이 함께 쓰기에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우연재가 눈에 띄게 큰 편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저 역시 작은 키는 아니라 둘이 함께 쓰면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똑같을 것 같았다.

“그럼 혼자 쓸까?”

뭐가 문제냐는 듯 우연재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나 그렇게 매정한 새끼 아닌데.”

“중학생 남자애 둘이서 써도 꽉 찰 것 같은데.”

“아, 문서윤 혼자 쓴다고?”

하얀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커다란 손안에서 빙글, 돌았다.

“존나 매정하네?”

하필 마지막으로 남은 우산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 가.”

결국 문서윤은 졌다는 픽 웃으며 좁디좁은 우산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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