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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08)화 (108/139)

108화

잠깐 지나가는 여우비라 맞아도 홀딱 젖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우산을 쓰긴 해야 했다. 실내가 목적지라면 또 모르겠지만, 산책을 나온 길에 계속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금방 그칠 테고 소나기도 아닌 부슬비 정도니 잠깐 불편한 것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

문제는 자꾸만 부딪치는 어깨가 아닌, 지레 부스럭거리는 마음이었다.

그냥 혼자 나갔다 온다고 할 걸 그랬나.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라 문서윤은 고요하게 한숨만 삼켰다.

토독, 톡. 약한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햇빛을 쬘 겸 나온 산책이라 목적지도 불분명했다. 문서윤은 그저 우연재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그가 우산을 쥐고 있으니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가는 빗줄기에 소매가 젖어 드는 순간이 느껴졌다.

여우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 오피스텔을 나와 몇 분 정도 걸었을 때였다. 뺨 위로 조그마한 물방울이 스치더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하나 남은 우산을 사고 나왔을 때는 완연한 여우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맑은 하늘이 쏟아 내는 비라 햇빛을 쬐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오피스텔 근처의 공원으로 들어서자 축축한 흙냄새와 파릇파릇한 잔디 냄새가 스며들었다.

문서윤은 비 온 뒷날의 아침을 좋아했다. 계절과는 상관없는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도, 한층 짙어지는 풀 냄새도, 다소 축축한 공기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깨끗하게 조경된 산책길을 걷자 군데군데 꿈틀거리는 지렁이들이 눈에 띄었다. 벌레를 보고 기겁하는 성격은 아니라 그냥 지렁이구나, 하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으나 질색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했다.

계속 땅 밖으로 나와 있으면 말라 죽을 텐데. 큰비가 내린 다음 날 아스팔트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지렁이가 땅 밖으로 기어 나오는 이유에 관심이 없겠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축축한 땅에 사는 생물은 피부를 통해서만 호흡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호흡 기관이 부재한 탓에 평생을 습한 흙 속에서 살아가며 그 안의 산소를 흡수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큰비가 내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방울이 땅을 가득 채우면 산소가 부족해졌다. 숨이 바닥난 흙 속에서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으니 잠깐의 호흡을 위해서는 땅 밖으로 몸을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고 다시 흙을 찾지 못하면 그대로 죽음이었다.

얇은 피부는 햇빛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찬란하고 따뜻한 빛에 온몸의 수분을 빼앗기고 나면 말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살기 위해 안식처에서 도망친 대가는 가혹했다.

“…….”

종종 떠오르곤 하는 날이 있었다.

열 오른 눈가, 그 위를 덮던 차가운 손, 엉망진창인 피아노 연주, 그리고 우연재에게 쏟아지던 햇살.

은연중에 우연재를 그런 존재라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를 잃은 이후부터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고, 2년이라는 공백에도 구질구질한 마음을 잃지 못했으니, 잠깐 보이지 않는 시기가 오더라도 언제나 곁에 있는, 제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그렇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밤이 와도 날씨가 흐려도 태양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게 햇빛이었다. 착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우연재가 언제나 제 곁에 있으리라는, 다소 오만한 착각이었다.

우연재가 제게 있어 햇빛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제가 햇빛을 영위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뿐이었다.

아버지와 피아노라는 비를 피해 잠깐 땅 밖으로 나왔다가 황홀한 착각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 것이다. 햇빛 아래에 오롯하게 설 수 있는 존재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문서윤은 축축한 땅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다. 한계에 도달하지만 않는다면 고여 드는 비를 견디는 것도 가능했다. 그 조금의 무게가 무거워 밖으로 기어 나왔을 뿐, 그가 머물러야 하는 자리는 그곳에 있었다.

주제를 모르고 햇빛을 열망했다가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결국에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 꿈틀거리며 서서히 죽어 가는 것도 모르고.

여우비가 내리는 지금은 괜찮았다. 축축한 바닥과 서늘한 공기가 있으니 당분간은 햇빛 아래에서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여우비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 후에 남는 것은 오직 햇빛 하나였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해야 했다.

제 짝사랑은 저나 우연재에게나 하등 도움이 될 게 없는 감정이었다. 소꿉친구라는 이름하에 올곧게 유지되고 있는 관계를 기어코 건강하지 않은 관계로 망치고 말 터였다.

우연재를 더 이상 망칠 수는 없었다.

땅을 내려다보며 걷던 문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투명한 우산 너머로 빗방울이 흘러내리더니 햇살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해와 저 사이를 가로막은 얇은 우산 덕분에 눈이 부셔 제대로 보지 못할 빛을 잠깐이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

“…….”

이쪽에서 먼저 시작했으니, 이쪽에서 먼저 끝내는 게 맞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내뱉지 못할 말이었다.

“우연재.”

툭.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동시에 새까만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떨어졌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서윤은 늘 우연재를 보고 있었으므로.

“이제 그만할게.”

다행히 몇 년간의 마음 앓이가 무색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해.”

뜬금없는 대화의 맥락에 우연재가 뺨을 찡그렸다. 슬쩍 올라가는 눈썹에는 뭘,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뭘 그만하는데, 서윤아.”

“알잖아.”

잠깐 정면에 시선을 둔 우연재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섰다. 싸구려 비닐우산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그 움직임을 따라 토독 미끄러지듯 낙하했다.

우산을 나눠 쓰고 있던 만큼 지극히 가까운 거리였다. 서로의 표정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

우연재의 얼굴에 깃든 감정은 당황스러움 따위가 아니었다. 오롯한 낭패감일 뿐이었다.

문서윤은 비에 젖은 소매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내뱉어도 우연재는 몰랐다며 부정하는 대신 곤란해할 것 같다고.

우연재가 문서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문서윤 역시 우연재를 잘 알았다.

그래서였다. 더는 이 감정을 움켜쥔 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만 좋아할게. 여기서 끝내자.”

그렇게 문서윤은 관계의 종말을 고했다.

꽃신

문서윤은 우연재를 몰랐다.

그리고 우연재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문서윤은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잘 안다 생각하겠지만, 실상 문서윤이 아는 우연재라는 인간은 그가 내비치는 겉꺼풀에 불과했다. 단순히 순진한 구석이 있어 그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숨기려는 이가 지나치게 교활했을 뿐이지.

단 하나뿐인 소꿉친구조차 눈치채지 못한 모습을 다른 사람이라고 알아차릴 턱이 없었다.

“군대요?”

우연재는 뺨을 찡그렸다.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눈썹 앞머리와 좁혀 든 미간, 덩달아 달싹이는 눈매가 여실히 짜증을 내비쳤다. 낮게 가라앉은 되물음에 맞은편의 남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몰랐니? 문 교수 말로는 이번에 입대 신청한 거라 바로 들어간다던데.”

조금의 언질도 없던 이야기였다. 우연재는 입술 안으로 지그시 혀를 깨물었다.

“……아버지가 신경 좀 써 주셔야겠네요.”

“그래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윤인데. 이왕 갔다 오는 거 편하게 갔다 오는 게 낫지.”

왜 말을 안 했지. 사소한 일상을 모두 공유하는 건 아니었으나, 다른 문제도 아닌 군대를 상의도 없이 결정할 줄은 몰랐다.

“서윤이가 가기 싫어했으면 어떻게든 뺐을 텐데, 미리 언질이라도 할 걸 그랬나. 이렇게 덜컥 갈 줄은 몰랐지 뭐냐. 허허, 생각보다 서운하네.”

“그러게요.”

우연재는 느릿하게 말을 받았다.

“뭐 하러 입대 신청을 했지…….”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미미한 두통이 몰려와 우연재는 얄팍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과연 문서윤이 언제쯤 이 이야기를 꺼낼지 궁금해졌다.

* * *

핸드폰을 켜자 오늘을 가리키는 날짜가 떠올랐다. 정확히 입대일이었다.

밤을 새워 기다린 게 무색하게도 끝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 한 달은 연락하지 못할 텐데도.

“아…….”

절로 짜증이 섞인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대체 왜 연락이 없지. 다른 친구들이 여태 조용한 걸 보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연락 없는 핸드폰의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짓누르길 몇 번, 불현듯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다.

여섯 살부터 함께해 왔으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이제 와 제 이상을 감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문서윤은 무른 듯 보이면서도 예민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제가 은연중에 그의 주변인들을 쳐 내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때는 사는 세상이 좁아 문서윤 주변에 괜찮은 친구들만 두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이 꼬이고는 했다. 얽혀 좋을 게 없는 인간들은 제 선에서 적정한 수준으로 쳐 냈는데, 그 사실을 눈치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한테 질렸나.

불현듯 떠오른 가정 뒤에는 직감이 밀려들었다.

문서윤은 도망친 것이다.

어쩌면 제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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