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우연재는 밀려드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하나같이 ‘문서윤 입대한 거 알고 있었냐.’는 내용이었다. 훈련소 수료식이라 문서윤이 친구들에게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막 카페에 들어선 김선주가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그의 시선은 핸드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의미 없이 메시지들을 넘기는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
어쩔까. 우연재는 짧은 고민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우연재.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조그마한 기계를 통해 흘러들었다.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는지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 그대로였다.
“문서윤이네?”
어쩔 수 없이 빈정거리듯 어조 끄트머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날 안 찾았나. 힘든 일이 없어서.
- 이제야 연락해서 미안. 화난 거 아니지?
우연재는 그제야 지난 몇 주간 제 신경 줄이 갉작인 이유를 깨달았다.
- 나 어쩌다 보니까 입대했거든. 갑자기 들어오게 된 거라 정신없어서 미리 연락할 생각 못 했어. 미안. 오늘 훈련소 수료식이라……. 자대 배치받으면 당분간 더 정신없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으음……. 알았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우연재는 언제 비아냥거렸냐는 듯 상냥한 대답을 꾸며 냈다. 전화가 어색하게 끊기면 관계 역시 어색하게 끊길 테다.
“누구야?”
통화 상대가 궁금했는지 김선주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 여자 친구랑 있어?
“응.”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당황한 표정이 훤히 그려졌다.
- 미안. 끊을게. 휴가 나가면 보자.
전화는 2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뚝, 하고 끊겼다.
“뭐야. 누군데 얼굴이 그렇게 심각해?”
김선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교양 과목 조별 과제로 알게 된 그녀는 ‘너나 나나 소문 많이 몰고 다닐 텐데 가볍게 만나 보는 건 어때? 서로 귀찮은 일도 줄일 겸.’ 하고 제법 흥미로운 제안을 해 왔다.
인간적으로 괜찮은 상대라 선선히 수락한 지도 어느덧 두 달째였다.
“소꿉친구.”
우연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친구? 그 친구한테 무슨 일 있어? 너 이렇게 기분 더러워 보이는 거 나 처음 봐.”
“군대 갔거든.”
“헉. 벌써? 일찍 갔네. 고생하겠다.”
군대라는 단어에 김선주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생 덜하게 해 줘야지.”
공익도 아니고 현역으로 간 이상 몸이 힘든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아버지가 신경 써 주셨으니 문제없는 인간들이 모인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었다. 문서윤은 손을 썼단 사실을 평생 모르겠지만.
‘1년 반…….’
함께한 시간이 자그마치 15년이었다. 오래된 친구 관계가 슬슬 질릴 때가 되긴 했으니, 한 번쯤은 숨통을 틔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기네.’
제게는 인내의 시간이 될 것이다.
* * *
우연재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계획에 없는 휴학이었으나, 문서윤과 2학년이나 벌어지는 게 내키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1년 정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머리를 비웠다가 1년 먼저 복학할 생각이었다.
문서윤이 복학할 즈음이면 제게는 눈에 익은 후배들이 생길 테고 또 거슬리던 몇몇 인간들은 졸업하고 없을 테니 그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김선주와는 당연히 헤어졌다. 한 명이 휴학했으니 쓸모가 없어진 관계였다.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문서윤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고는 했다. 출처는 문 교수 혹은 아버지였다.
문 교수에게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휴가같이 외출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아버지에게 듣는 이야기는 아버지의 군 쪽 인맥을 통한 군대 내부의 이야기였다. 지나치게 잘 지내고 있는지 훈련소 수료식 이후에도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문서윤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연재는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소꿉친구를 향한 제 집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문서윤을 향한 집착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집착의 원인 역시 분명했다.
여섯 살. 제 곁에 꼬물꼬물 다가와 피가 묻은 손을 아무렇잖게 쥘 때부터 시작된 욕심이었다.
문서윤을 향한 집착을 잘 아는 만큼, 그는 제 소유욕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뇌의 일부가 정상적이지 않으니 어릴 때 느낀 천진한 소유욕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나이를 먹은 만큼 우연재는 자기 객관화를 제법 잘할 줄 알았다.
‘참아야지.’
근래의 그는 인내심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숨을 쉬게 해 주기로 결정했으니, 응당 그에 맞춰 제 욕심도 억누를 줄 알아야 했다. 면회를 가지 않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문서윤 없이 보내는 시간은 최장기간을 갱신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실수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이 닥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무언가에 대한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가까이하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우연재는 문서윤이 저를 얼마나 의지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게 선뜻 먼저 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이 있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대부분은 이쪽에서 먼저 화두를 던져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 편이었지만, 가끔은 끝까지 모르는 체할 때도 있었다. 그래야 제게 의존하려는 성향이 강해질 테니까.
상대가 필요로 하는 걸 항상 먼저 나서서 해 주는 쪽은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법이다. 문서윤이 저를 필요로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외면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요즘은 제법 궁금했다. 문서윤이 언제쯤 먼저 연락을 해 올지.
* * *
우연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온갖 쓸모없는 연락이 와 있었으나, 막상 기다리는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기댔다. 갑작스러운 반동에 의자가 반쯤 돌아가다 움직임을 멈췄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간신히 목표치에 도달한 인내심은 그 시간이 지나자마자 뭉텅이로 숭덩숭덩 깎여 나가며 끝끝내 닳고 닳아 밑천을 내보이는 중이었다.
설마하니 군 생활 내내 연락이 없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제대하면 바로 연락하겠지, 생각한 게 우습게도 여전히 문서윤은 메시지 한 통조차 보내오지 않았다.
우연재는 문서윤이 제대 후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닐 텐데 카페 아르바이트 같은 일은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 교수 때문인가.’
결혼했다고 들었다.
문서윤 성격에 새 사람이 들어온 집에서 편하게 지낼 리는 없으니 아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택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문서윤의 내심이 궁금한 건 왜 여태 연락이 없는가였다. 다른 친구들이 그의 아르바이트 사실을 알게 된 지금까지도.
김현승에게 이미 알고 있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 카페의 위치도, 하다못해 알바 시간까지 알고 있는 상태였다.
제가 그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그리고 당사자도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듣게 되기까지 끝끝내 연락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진짜 질렸나.”
몇 주 있으면 개강이었다. 곧 얼굴을 보지 못한 지 2년을 채운단 소리였다.
단정하게 깎인 손톱으로 팔걸이를 건드리던 남자는 시간을 확인한 뒤 천천히 일어섰다.
이번에는 져 줘야 하는 모양이었다.
외출을 위해 습관적으로 향수를 뿌린 우연재는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방금 뿌린 향수는 2년 전, 휴학계를 제출하고 영국에 갔을 때 처음 접한 향수였다. 근래에 자주 사용하는 향수였으나 문서윤에게는 낯선 향일 테다.
‘나인 거 못 알아채면 기분 더러울 것 같은데.’
결국 우연재는 다시 샤워를 하고 나와 문서윤에게 익숙한 향수를 뿌렸다.
‘그래도 못 알아보면…….’
억지 핑계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만약 문서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해 밀어내더라도 낯선 향수 냄새가 섞인 탓이라 자위할 수 있었다. 향수 냄새가 섞여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통창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카페였다. 먼저 나온 여자가 롱패딩을 입은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우연재는 차에서 내려섰다. 카페를 훤히 밝히던 불이 꺼진 것과 동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얇은 롱코트 위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려 잔뜩 흐트러졌다.
우연재는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팔을 뻗어 허리부터 낚아챘다.
“서윤아.”
갑자기 뒤에서 껴안자 놀랐는지 파드득 어깨를 떤 문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1년 반도 아니고 2년이나 입 닥치고 기다렸는데…….”
순한 눈매에 담긴 갈색 눈동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맞닥뜨린 것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우연재는 주인에게 혼나 시무룩해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꾸며 내며 칭얼거리듯이 물었다.
“꽃신 안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