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10)화 (110/139)

110화

“나 기숙사.”

“기숙사?”

문서윤의 대답을 낚아챈 사람은 김현승이 아닌 우연재였다. 우연재는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문서윤이 내뱉은 말을 되물었다.

“네가 왜 기숙사에서 살아, 서윤아.”

기숙사라니. 남이 쓰던 공간에서, 남이 쓰던 침대에서 자겠다고? 저 머릿속을 파헤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연재가 오피스텔을 계약한 건 순전히 문서윤 때문이었다. 본가는 답답할 테니까.

어릴 때 한 약속도 있으니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숙사라니, 참지 못한 헛숨이 입술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문이 기숙사에서 살든 말든 네가 뭔 상관.”

말 그대로 무슨 상관이냐는 듯 튀어나온 김현승의 반문에는 신경이 갉작거렸다.

우연재는 이럴 때마다 문서윤과 제가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했다. 제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퍽 짜증스러웠다.

“1학년 때 통학했었으니까 기숙사도 살아 보는 거지.”

평온하게 대답한 문서윤이 곱창을 입에 넣었다. 뜨거운 음료도 잘 마시지 못하는 주제에 호기롭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는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물을 찾았다.

우연재는 제 컵을 내밀었다.

“문서윤 여기 진짜 좋아하나 보네. 뜨거운 거 잘 먹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했지.

김현승과 자주 왔던 식당이라는 것부터 시작해 기숙사 문제까지 모조리 짜증이 났다. 약속은 완전히 까먹은 눈치였다.

그러나 우연재는 오래된 약속을 들먹이며 제 소꿉친구를 몰아세우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더 몰아붙여 봤자 안절부절못하며 도망갈 게 뻔했다. 차라리 나중에 적재적소에서 써먹는 편이 나았다.

“나랑 살래?”

그래도 미리 던져 봐서 나쁠 건 없었다. 우연재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문서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는지 문서윤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나랑 살자.”

우연재는 재차 흘리듯이 속살거렸다. 친구 사이에 당연히 할 수 있는 제안처럼 가볍게.

“또 무슨 헛소리야.”

이내 하얀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역시나 같이 살자는 약속은 완전히 잊은 눈치였다.

“왜애.”

우연재는 헛웃음을 삼키는 대신 말꼬리를 늘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오피스텔 넓은데. 내 침대도 넓고.”

와인을 잔뜩 먹여 재운 전적이 있으니 문서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테다.

“야, 문. 거절해. 이 새끼랑 살면 청소 노이로제 걸릴걸. 그리고 이 새끼 여자 친구 있잖아. 문 네가 존나 불편할걸?”

“처음부터 생각 없었어. 말이라도 고마워.”

우연재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잔 위로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들을 건성으로 쓸어내렸다. 처음부터 생각 없었다고.

“나랑 산다고 말씀드리면 문 교수님도 허락하실 텐데.”

동그란 물방울들이 손가락에 짓눌려 형체도 없이 흐트러졌다.

“얼굴도 모르는 남보다는 내가 편하지 않아?”

“당연히 네가 편하지. 그렇다고 평생 너랑만 놀 수는 없으니까……. 룸메랑 안 맞아서 힘들면 그때 얘기할게.”

평생 너랑만 놀 수는 없으니까? 우리 서윤이가 왜 자꾸 허튼 생각을 하지?

오래된 친구 관계가 지겨워졌을까 봐, 그리고 혹시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치게 숨통을 조였을까 봐 잠깐 시간을 줬더니, 군대에서 이상한 생각만 잔뜩 하다 온 모양이었다.

우연재는 속을 알 수 없는 머릿속을 가늠하듯 제 소꿉친구를 집요하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어쩌다 저런 생각을 했는지부터 차근차근 파악해야 했다.

“아무튼 말만이라도 고마워.”

“문서윤 룸메 좆같기를 기도할 건데.”

우연재는 뺨을 찡그렸다. 끄트머리가 올라간 입술이 농담처럼 가볍게 곡선을 그렸다.

차갑게 식어 가는 머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문서윤이 따라 웃었다.

* * *

올해 들어서서 첫 강의였다. 우연재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오래된 짝꿍은 태블릿을 쳐다볼 뿐, 돌아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

단정하게 뻗은 눈썹 사이로 금이 갔다.

2년 전이었다면 문서윤은 곧장 돌아봤을 것이다. 익숙한 향수 냄새를 눈치챘을 테니까.

우연재가 향수를 잘 바꾸지 않는 건 까다로운 취향 탓도 있지만, 반쯤은 문서윤 때문이었다. 기척을 내기도 전에 문서윤이 제 존재를 알아차리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역시 2년은 너무 길었지.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우연재는 뺨이 눌리도록 끈질기게 상대를 응시했다. 언제쯤 저를 알아볼지 궁금해졌다.

“어! 형! 안녕하세요.”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후배 하나가 뒤쪽을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우연재는 느릿하게 짧은 음절을 내뱉었다. 그제야 문서윤이 옆을 돌아봤다. 정말 저인 줄 몰랐는지 유순하게 빚어진 눈매가 한층 더 둥그렇게 휘어졌다.

우연재는 문서윤에게 제 존재를 각인시킨 뒤에야 후배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곧장 고개가 향한 방향으로 눈동자를 굴린 그는 서운함을 가장하며 눈썹 끄트머리를 떨어트렸다.

“문서윤 이제 나 못 알아보네. 전에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알더니.”

“너 왜 여기 있어?”

문서윤은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었다.

“왜 여기 있긴. 전공 들으러 왔지.”

“그러니까 네가 이 전공을 왜 듣냐고. 2학년 때 뭐 했어?”

“일부러 안 들었는데.”

우연재는 샐쭉 웃었다. 손바닥에 눌린 뺨이 폭 솟아올랐다.

“문서윤 내가 책임져야지.”

“무슨 책임?”

“내가 경영 오자고 꼬셔서 여기 왔잖아.”

문서윤이 피아노에서 공부로 진로를 튼 이후 우연재 역시 20대 초반의 전반적인 계획을 수정했다. 개중에는 문서윤이 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하게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에 입결이 높은 학과라 같이 가자고 꼬시는 것도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네 책임이야. 원서는 내가 썼는데. 아버지 말씀도 있고 어차피 여기 왔을걸.”

“내가 사대 간다고 했으면 사대 갔을 거면서.”

우연재는 부러 살살 눈웃음을 쳐 댔다. 문서윤이 같은 곳을 목표로 하도록 종용한 사람이 저였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하긴. 문서윤은 선생님이 더 어울리긴 해.”

단정하고 차분한 이미지가 선생님이라는 단어와 퍽 잘 어울렸다.

우연재는 선생님 운운하며 문서윤을 느긋하게 훑어 내렸다. 키도 평균보다 큰 편인 데다 누가 봐도 미인이라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인상이었다.

남고에는 못 보내겠지만.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가득 들어찬 새끼들이 천지일 테다.

“그래도 나 때문 아니라고 하는 건 존나 서운하네……. 난 문서윤이 미대 간다고 우겼으면 그때부터 미대 입시 했을 텐데.”

“죽을래?”

피아노는 잘 쳐도 미술엔 소질이 없는 게 떠올라 농담처럼 던지자 문서윤이 발끈했다. 우연재는 키득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같은 수업 듣는 거 왜 말 안 했어? 저번에 현승이 만났을 때 시간표 얘기했잖아.”

제대하자마자 다시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면 문서윤의 시간표부터 관리했을 것이다. 같은 학년도 아니고, 시간표까지 간섭하는 건 과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우연재 저는 태생이 이렇게 글러 먹게 태어난 인간이었다. 문서윤이 제가 쳐 둔 울타리를 벗어나면 불안하니, 그 안에 고이 가둬 두는 수밖에 없었다.

‘애가 딱히 불편해하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오랜 시간 동안 제게 익숙해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렇게까지 구는 스스로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연재의 머릿속에는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부재했다.

“서프라이즈 재밌잖아.”

문서윤의 시간표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제 시간표를 끼워 맞추기란 쉬웠다. 성격상 전공은 거의 다 들을 테니, 비워 둔 2학년 전공을 끼워 두면 그만이었다.

하필이면 1년에 걸쳐 비워 둔 전공 수업이 모두 이번 학기에 몰린 바람에 시간표가 더러워졌지만,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소화할 수 있었다.

‘다음 학기가 문제지.’

그래도 저나 문서윤이나 경영대에서 살 테니 큰 문제는 없을 테다.

“네가 언제부터 서프라이즈 좋아했다고.”

“저번에 너 알바하는 카페 찾아갔을 때 생각나서.”

“뭔 소리야.”

우연재는 가늘게 웃었다. 져 줘야 할 것 같아 문서윤을 찾아간 날이었다.

“빡돈 상태였는데 얼굴 보자마자 화 풀렸잖아.”

“네가 왜 빡돌아?”

정말 모르겠다는 말투에 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직도 모르네.”

말없이 홀랑 입대해 버린 것도, 내내 연락이 없던 것도, 제대 이후 저를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도 문서윤에게는 아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꽃신 주면 알려 줄게. 언제 줄 거야?”

“생일 때 준다니까. 골라 놔.”

군대를 기다려준 이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단순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서윤이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얀 얼굴이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는 모습이 봄 날씨와 제법 잘 어울렸다.

우연재는 웃지 않았다. 버릇처럼 문서윤을 탐색했을 뿐이다.

* * *

좆같기를 바란 문서윤의 룸메가 제게만 좆같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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