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우연재는 문서윤이 저를 피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
“…….”
물론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저를 멀리하는 명확한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김선주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게이는 더럽다 운운한 말 때문인지, 아니면 같이 담배를 피우던 양아치 새끼 때문인지 도통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후자면 더 기분 잡칠 것 같은데…….”
의미 없이 손가락 사이로 굴리던 펜이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같은 남자를 좋아한단 사실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만약 문서윤이 저를 피하는 이유가 전자라면 사과로 마음을 풀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후자면?
고작 1년하고도 몇 개월 남짓 본 새끼 때문에 저를 피한다고 생각하자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우연재는 늘 문서윤과의 관계에 자신이 있었다.
문서윤이 쉬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공을 들여 가며 저를 학습시킨 것도 있지만, 함께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긴 만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유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에 기대 안주할 마음은 없었다. 소꿉친구도 나이를 먹으면 소홀해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는 했으니까.
미국 유학을 미룬 것도, 문서윤에게 같은 과에 진학할 것을 권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는 세계와 보는 세계가 비슷해야 했다.
그러나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예상치도 못한 이유로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야 말았다.
‘진짜 그 새끼 때문이면…….’
제대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으나 문득문득 초조함이 치밀었다. 단순히 남자를 좋아하는 문제 때문이 아닌, 제삼자 때문에 저를 피하는 것 같다는 예감에서 기인한 초조함이었다.
“하…….”
우연재는 욕설을 삼키며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역시 군대를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데. 당연히 상의를 해 올 줄 알고 미리 말을 꺼내지 않은 제 불찰이었다. 숨 쉴 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순순히 보내 준 것뿐인데, 어느샌가 그 틈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느지막이 자세를 바로 한 우연재는 날짜를 셈했다. 마지막 중간고사까지 열흘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문 교수와의 식사 약속이 잡혀 있으니 그날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신경이 바짝바짝 말라붙는 감각에도 그는 기다리기를 택했다.
과연 그날은 불면을 피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 * *
문 교수와의 식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우연재는 그 남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와의 자리는 제법 즐기는 편이었다. 그와 만날 때마다 문서윤이 제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나쁘지 않지.’
문서윤의 결핍은 제게 있어 완벽함이었다. 그리고 우연재는 이런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픈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불륜을 저지른 남자의 애정은 받느니만 못했다. 차라리 그 결핍에서 기인한 외로움을 제게 기대 해소하는 쪽이 나았다.
짧은 점심 식사는 문서윤이 아직도 제게 기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자리였다. 바닥을 치던 기분이 그나마 나아진 것도 그래서였다. 문서윤 역시 언제 어색하게 굴었냐는 듯,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 눈이 언제 왔지…….”
“눈?”
갑자기 웬 눈. 우연재는 반문했다.
“그냥. 그런 얘기 있잖아. 첫눈 오기 전까지 봉숭아 물 남아 있으면 첫사랑 이뤄진다고.”
그런 와중에 갑자기 쓸데없는 속설을 꺼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10년도 훌쩍 지난 과거에 눈이 언제 왔는지 궁금해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갑자기 저런 얘기는 왜 하지. 의아함에 신경이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김다정 만났어?”
우연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김다정? 그게 누군데?”
“햇님반 김다정. 문서윤 첫사랑 상대.”
문서윤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나 보네. 어떻게 기억을 못 하지.”
우연재는 아직도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했다. 문서윤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꼭 잡고 헤실헤실 웃던 순간이었다.
“진짜 기억 안 나는데.”
기억도 못 하는데 눈이니 봉숭아 물이니 그딴 소리는 도대체 왜 하지. ……짝사랑한다던 그 새끼랑 이뤄질지 궁금해서?
“딱 그 정도라 그래.”
우연재는 느른한 어조를 가장하며 가볍게 핸들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서윤아.”
스르르 눈동자를 굴리자 저를 쳐다보고 있는 문서윤이 보였다.
“그딴 거에 연연하지 마.”
왜 이제 와 첫사랑 같은 불필요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으나, 결국 쓸데없는 감정이었다.
“첫사랑 같은 거…….”
문서윤이 앓고 있는 짝사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24시간을 지나치게 오래 붙어 있다 보니 착각한 것이다. 저를 대신해 잠깐이나마 기대게 된 존재를 좋아하는 거라고.
우연재는 문서윤이 그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깨닫길 바랐다.
“좆도 아니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감정이었다.
* * *
“연재야. 나 이제 너랑 안 놀래.”
우연재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언제 꼭 붙들고 있었냐는 듯, 제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누군가와 팔짱을 낀 문서윤이 보였다.
“다정이가 그러는데 원래 여자 친구랑만 노는 거래.”
“나랑 안 논다고?”
“응.”
문서윤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정이랑 결혼할 거니까 다정이 말 잘 들어야 돼.”
결혼? 우연재는 뺨을 찡그렸다. 어린애 특유의 토실한 뺨이 볼록 솟아났다.
“일곱 살인데 무슨 결혼이야. 결혼은 어른 되면 하는 거야.”
“어른 돼서 할 거야! 봐 봐.”
문서윤이 손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손톱 끄트머리에 주황빛이 보였다.
“어제 첫눈 왔잖아. 엄마가 첫눈 오기 전까지 안 지워지면 첫사랑 이뤄진댔어! 그러니까 난 다정이랑 결혼할 거야. 다정아, 나랑 결혼할 거지?”
“응! 그러니까 이제 우연재랑 놀지 말고 나랑만 놀자.”
“그래서 이제부터 너랑 못 놀 것 같아.”
일방적인 선언에 우연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눈만 깜박였다.
“잘 있어, 연재야.”
문서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뒤를 돌아 사라졌다. 늘 제 손을 꼭 붙잡곤 하던 손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손을 쥐고 있었다. 당장 뛰어가 저 사이를 갈라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상하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연재는 숨만 헐떡거렸다. 문서윤을 부르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목소리 역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텅 빈 손을 움켜쥐는 게 전부였다. 평소와 달리 아무것도 쥐지 못한 손이었다.
몸을 흔드는 손길에 우연재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응.”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혼몽한 시야 안으로 문서윤이 들어왔다. 뒤이어 시원한 체온이 이마 위로 달라붙었다.
“나 꿈꿨어…….”
문서윤이 뭐라 물었으나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우연재는 대충 대답을 돌려주며 제게서 벗어나려는 이의 허리를 옭아맸다. 도망가려는 상대와 대거리를 하고 있자니 두통이 한층 심해졌다.
우연재는 기어코 문서윤을 끌어안았다. 마침내 원하는 이를 품에 안은 남자는 문서윤이 침대를 벗어나길 포기하게 만든 뒤에야 느릿하게 눈을 떴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분명 제가 아는 문서윤인데, 머리가 뭉개져서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까다로웠다.
예전에는 곧잘 저 자그마한 머릿속을 읽어 내곤 했는데, 확실히 2년이란 시간이 길긴 길었던 모양이다.
“꿈꿨는데…….”
우연재는 열 띤 호흡을 내뱉었다.
“우리 어릴 때 나왔어…….”
곧 잊힐 꿈이었다. 그런데도 그 잔재가, 그때 느낀 기분의 찌꺼기가 여태 온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곰 인형 따위의 우습지도 않은 핑계를 들먹이며 문서윤을 끌어안았는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지키려는 듯 슬쩍 몸을 물린 문서윤 때문인지도 몰랐다.
우연재는 모르는 척 문서윤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익숙한 체향이 느껴지고 나서야 그나마 초조함이 가라앉았다.
“그때…….”
나른함에 빠져드는 몸과 달리 기분을 잡치게 만든 악몽은 계속해서 맴돌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겨울에 눈 언제 내렸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눈이 내린 날짜까지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12월에 왔겠지.”
문서윤이 당연한 대답을 내놓았다.
“응……. 그럼 손톱은?”
“손톱? 무슨 손톱?”
“봉숭아…….”
티끌만 한 주황빛이 떠올라 우연재는 욕지기를 삼켰다. 온몸을 끓게 하는 열 때문인지 까딱하면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그 순간 거대한 수마가 몰아닥쳤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는 깊은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