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13)화 (113/139)

113화

가늘게 비가 내렸다.

우연재는 우산을 쥔 채 산책로를 걸었다. 흙냄새와 풀 냄새, 비 냄새가 한데 뒤섞였다.

딱히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아무리 잠깐 내렸다 그치는 여우비라 한들 비는 결국 비였다. 온몸을 젖게 만들어 불쾌함을 선사하는.

비 내리는 날의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우연재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문서윤을 혼자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아 같이 나온 참이었다.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릴 낌새가 없기도 했고.

그래도 곧 그치지 않을까 싶었다.

언제 부슬부슬 내렸냐는 듯 여우비가 자취를 감추고 나면 땅은 바짝 마를 것이다. 죽어 가는 지렁이 곁에는 개미 떼가 꼬일 테고.

“우연재.”

불현듯 찾아오곤 하는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우연재는 우뚝 멈춰 섰다.

차분하게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는 느릿하게 눈동자만 움직였다.

“이제 그만할게.”

문서윤은 담담한 어조였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평소처럼 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만한다고.

우연재는 뺨을 찡그렸다. 덩달아 한쪽 눈썹이 찌푸려지듯 올라갔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해.”

“뭘 그만하는데, 서윤아.”

되묻는 목소리가 성급하게 흘러나왔다.

“알잖아.”

우연재는 잇새로 혀끝을 씹으며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문서윤이 선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툭. 싸구려 비닐우산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그 움직임을 따라 토독 미끄러지듯 낙하하며 어깨를 적셨다.

“…….”

여태 느껴 본 적 없던 낭패감이 찾아왔다.

“그만 좋아할게. 여기서 끝내자.”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 * *

‘이제 그만할게.’

담담한 목소리가 연신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해.’

그러니까 도대체 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문서윤이 무엇을 그만하라고 하는지 그 목적어가 불분명했다.

너랑 나 사이에 그만할 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하…….”

저절로 흘러나오려는 욕설에 우연재는 말을 씹듯 습관처럼 혀끝을 짓씹었다. 문서윤이 요구하는 바에만 집중하고 싶었으나 그만하겠다는 말이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아 어지러웠다.

그는 간신히 생각의 갈래를 정리했다. 문서윤이 무엇을 그만하라고 하는지부터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뭘 그만하는데, 서윤아.’

‘알잖아.’

문서윤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만 좋아할 테니 여기서 끝내자는 통보 역시.

그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무엇을 그만하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연재는 똑같이 굴었다. 문서윤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말하고, 평소처럼 행동하고, 평소처럼 생각했다.

아니, 평소처럼 생각한 건 아닌가. 오히려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최악의 상황들을 곱씹었다. 스스로를 제어하기 위해서. 그러니 평소처럼 생각한 건 아닐 테다.

그러나 저도 모르는 사이 본성이 꿈틀거렸다 한들 문서윤이 그 주인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머릿속을 읽어 냈을 리는 없으니 생각에 대한 건 논외였다. 무엇보다 제 본심을 눈치챘다면 진작 도망갔을 것이다.

“내가 눈치챘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네…….”

문서윤의 감정을 아는 척하지 않은 건 지금의 관계가 나쁠 것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연재는 소꿉친구를 향한 제 집착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친구 사이에서, 그것도 남자들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허용치를 훨씬 초과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전문가들을 통해 받아 온 여러 종류의 가정 교육은 그가 살아가며 지켜야 할 명확한 선을 그려 주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교육은 우연재를 엇나가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 가끔 폭력적인 성향을 띄긴 했어도, 사춘기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으레 나타나는 다툼 정도로만 여겨질 수위였다.

지켜야 하는 선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문서윤을 향한 집착이 기준선을 이탈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못 본 척하기에는 너무나도 명백하고 눈에 띄는 이탈이었다.

수위를 범람한 집착을 인지한 만큼이나 우연재는 스스로가 지닌 욕구를 잘 알았다. 아무리 깊숙하게 숨기고 억눌러도 그 모든 욕구를 구성한 본질은 결국 저 자신이니 그 둘을 떼어 놓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늘 문서윤을 홀로 소유하고 싶었다. 소유욕이 아니라고 되뇐 게 무색하게도.

문서윤의 세계를 혼자 차지한 것만으로는 만족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더 명확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발견조차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거머쥐고 싶었다.

그렇다고 문서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오롯하게 갖고 싶었을 뿐이다.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흐르는 애정을 맞닥뜨린 순간, 그리고 그 애정의 방향이 피아노가 아닌 저 자신임을 깨달은 순간 환희에 몰락당한 건 문서윤의 마음까지 가졌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문서윤의 자그마한 세계를 유일하게 차지한 것에서 나아가, 그가 제게만 의지한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에서 나아가, 좋아하는 마음마저 얻어 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같은 성별을 좋아하는 게 가능한가에 대한 의구심은 더 이상 우연재에게 하등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문서윤이 저를 좋아한다는 절대적인 명제뿐이었다.

성적으로 끌려서 좋아하게 됐든, 아니면 그 전부터 간직한 마음이든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역시 그리 중요치 않았다. 인간의 일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감정을 제게 주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 스스로가 좋아하는 감정을 성욕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리고 우연재는 자신을 잘 알았다. 마음까지 가졌으니 문서윤에게서 가져오고 싶었던 부분 중 남은 건 이제 단 하나였다. 그건 몸을 섞는 행위 따위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고립이었다.

문서윤을 그 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세심하게 만들어 낸 기준점을 이탈할 때면 그 원인에는 항상 문서윤이 있었다. 제 소꿉친구가 걸려 있는 문제라면 선을 넘는 일에 거리낌이 없으니 너무나도 명백한 원인이었다.

그러니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꿉친구를 향한 집착이 과도할 정도로 비틀려 있는 상태에서 조금만 더 엇나갔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그래서였다. 문서윤과의 관계를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유지해야겠다고 판단한 건.

우연재는 제 결정을 저와 하나뿐인 소꿉친구 사이의 등가 교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문서윤이 원하는 바를 줄 수 있었다. 이미 같이 뒹굴었으니 또다시 몸을 섞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을 섞는 상대가 섹파가 아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문서윤 역시 육체적인 만족은 물론 정신적인 만족까지 느낄 수 있을 테니 괜찮으리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오랜 소꿉친구 역시 그가 원하는 바를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확신과 만족감이었다.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 그로부터 기인한 안온한 만족감.

그즈음, 우연재는 문서윤이 제게서 도망칠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친구 이상의 의미로 절 좋아하고 있으니까.

거의 평생이라고 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데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품고 있고, 거기에 더해 섹스까지 했으니 영영 떠나지 않으리라 여겼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문서윤이 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수월하게 평온한 삶을 선사할 수 있을 터였다.

섹스도 문제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문서윤과의 섹스는 늘 재미있었다. 문서윤을 만족시키는 게 만족스러우니 재미가 없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게다가 우연재는 누군가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보고 꼴려 소꿉친구를 저버릴 일은 없으니, 문서윤만 제게 만족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문제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문서윤의 짝사랑 상대를 알게 된 이후 우연재는 때때로 명명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는 했다. 문서윤을 조금 더 옭아매고 싶은 충동이었다.

나를 좋아하는데 그 새끼는 왜 만났을까.

종종 그런 의문이 엄습했다.

뭘 했길래 다른 사람 담배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지.

한 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우연재는 문서윤을 몰아붙이는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들을 꾸역꾸역 집어삼키며 인내했다.

그와 함께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제 인내심이 한 번이라도 닳고 나면 문서윤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것임을 직감한 탓이었다.

문서윤에게는 지켜 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법적 보호자인 아버지는 하나뿐인 친아들을 지켜 주기는커녕 대가에 눈이 멀어 제물처럼 상납할 게 분명했다. 지켜 주는 사람은 우연재 저뿐인 상황에서 법적 보호자가 손을 놓으면 문서윤이 어떻게 될지 그 결과는 눈에 보이듯 뻔했다.

넓고 넓은 새장에 갇혀서 평생 울기만 할 것이다.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원망하면서.

마음까지 소유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 갈증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우연재는 그렇게까지 문서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생각이 없었다. 꽉 눌러 둔 본심은 어떨지 몰라도 머리는 나름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는 선이 존재하는 관계가 좋았다.

문서윤의 감정을 모르는 체한 건 말하자면 우연재가 남겨 둔 마지막 선이었다. 다소 기형적인 관계였으나 아예 망가지는 것보다는, 그리고 문서윤을 망가트리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해.’

담담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또다시 귓가를 스쳤다.

도대체 뭘 그만하라는 거지.

이 노력을?

우연재는 평생 문서윤에게 무해하게 굴고 싶었다. 제 정상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2년간 군대라는 고립된 공간에 순순히 보낸 것도 어디까지나 숨 쉴 틈을 주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지속된 제 끔찍한 집착을 눈치채 도망가기 전에 숨통을 틔워 준 것뿐이었다.

정상적인, 좋은 친구로 남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뭘 그만하라는 거지.

‘그만 좋아할게. 여기서 끝내자.’

그리고 뭘 끝내자는 건데.

우연재는 천천히 그 순간을 되짚었다. 으레 그러하듯 문서윤을 기준으로 삼아서.

어릴 때부터 수많은 개인 교사들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그들에게서 받아 온 각기 다른 종류의 가정 교육들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기준만 세워 주었다. 오로지 그뿐이었다.

종종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곤 하는 돌발 상황들은 제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기준 삼아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하라고, 끝내자고 말한 사람이 문서윤이니 더더욱 그를 기준 삼아 제가 무엇을 놓쳤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뭘 놓쳤을까.

우연재는 문서윤이 본가에 다녀온 날부터 찬찬히 되짚었다. 저는 물론 문서윤의 말과 행동, 표정까지 모조리.

눈썹이 찌푸려지며 그 위로 신경질적인 홈이 패었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의 담담한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둥실거려 차근차근 생각을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하.”

우연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깨를 적시던 여우비에 익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폐가 조여들고 모든 숨구멍이 틀어막히며 호흡이 삼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끝내긴 뭘 끝내, 서윤아…….”

진흙탕으로 변한 머리는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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